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40화 (140/236)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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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인 11시를 5분 정도 넘겨 벨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간 수빈은, 입구 왼편에 위치한 휴게실 원탁 테이블에서 초면인 세 명의 사람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박감독을 발견하였다.

제법 잘 사는 집 사모님인 듯 네이비 색깔의 라운드 밍크코트를 걸친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 여인, 180 가까운 키에 낯짝이 번지르르하고 하얀색 롱패딩을 입고 있는 청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플한 검은색 투피스 차림에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도서관 사서 같은 타입의 젊은 여인, 이렇게 세 명과 함께 박감독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 직원들은 아닐 거고, 박감독님 손님들이 오신 모양인데.'

수빈을 발견한 박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흔들더니 자신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자신을 부르자 수빈은 박감독이 앉아 있는 원탁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수빈이 가까이 다가가니 손님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박감독님. 손님들이 오신 모양이에요."

"손님? 손님이라면 손님이지. 여기 앉게나. 일단 같이 차나 한잔하자고."

"네? 손님들이 많이 불편하실 거 같은데요."

"괜찮아. 강감독. 빨리 앉아보게나."

자신의 팔을 잡아 끄는 박감독의 힘에 못 이겨 수빈이 자리에 앉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사서 타입의 여성이 자신의 검은색 샤넬 토트백에서 제법 큰 사이즈의 보온병을 꺼냈다.

'차향을 보니 보이차를 직접 타온 모양이로군.'

젊은 여성이 보이차를 컵에 가득 따라 자신에게 공손히 건네주자, 수빈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신 수빈은 감탄성을 터뜨렸다.

"호오. 좋은데요. 운남성에서 만든 보이차 같군요."

수빈의 말에 젊은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운남 방양빙 차창에서 만든 보이차입니다. 입에 맞으신가요?"

"네. 이주 좋네요. 감사합니다."

수빈은 찻잔을 손에 들고 차를 조금씩 음미하다 자신의 왼편에 앉은 박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려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독님. 오소라씨는 아직 안온 모양이에요?"

"응? 무슨 소리야? 이미 와있는데."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회의실에서 발표 준비라도 하고 있나요?"

그때 수빈의 오른쪽에서 얼굴 하나가 불쑥 눈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저 아까부터 와있었는데요. 사장님."

수빈은 눈앞에 들이밀어져 있는 까만 생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차분한 톤으로 화장을 한 단정한 얼굴의 여성을 바라보다 불현듯 짚이는 생각이 있었다. 경악에 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빈이 괴성을 질렀다.

"네~에? 말도 안 돼! 앗 뜨거워."

수빈은 손가락으로 쏟아진 뜨거운 찻물을 황급히 털었다.

잠시 후 수빈은 회의실에서 박감독과 함께 나란히 자리에 앉아서, 앞에서 분주히 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 오소라를 생경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거의 천변역용술(千變易容術) 수준으로 바뀐 거 같은데.'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박감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강감독. 이해 좀 해줘. 소라가 갑자기 너무 많이 변해서 큰누나가 걱정을 많이 했나 봐. 혹시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데 빠진 거 아닌가 해서 말이야."

박감독의 말에 수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사이비 종교 교주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세상에 어떤 사이비 종교가 교인에게 쇼핑하라고 몇 천씩 준답디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누나 집에서 소라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많이 궁금했나 봐. 아무리 캐물어도 소라가 통 대답을 안 해주니까 여기까지 같이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가족들이 총출동했나 보군요."

박감독과 대화를 나누며 수빈은 한쪽 편에 앉아 소곤거리고 있는 모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잘난 아들만 편애해서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든 무책임한 어머니와 자기 동생이 그렇게 온몸으로 절규를 하는데도 외면하고 고시공부만 죽어라 한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인 오빠라는 한심한 인간들이 저기 앉아 있는 거군.'

수빈은 박감독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 까지는 좋습니다만, 회의 중에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됩니다."

"걱정 말게. 내가 신신당부를 해놨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네."

이윽고 오소라가 밤하늘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을 한채 활기찬 목소리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제가 만든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렸을 때, 사장님께서 저에게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번 일을 맡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오소라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할 때,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눈빛이군. 열정에 불타오르는 눈빛이야.'

다시 허리를 편 오소라가 말했다.

"사장님께서 저에게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자신을 완전히 탈바꿈시켜야만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수빈이 질문을 툭 던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제가 현장에 나가게 된다면, 직접 만나고 협상해야 할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를 먼저 떠올려 보았어요. 그 사람들은 몇 백억이 나가는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당사자 이거나 아니면 그 대리인들일게 자명하죠. 즉, 이 사회의 지도층 내지는 기득권층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제 꼴을 떠올리면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 저를,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만나 줄까요? 아니 설사 만나주더라도 제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수빈이 다시 질문을 툭 던졌다.

"그래서 제가 돈을 보내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가신 겁니까?"

오소라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씩씩하게 답변을 하였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과 동등한 관계로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반드시 저 자신부터 격을 맞춰야만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쉽게 보이는 곳부터 맞추자는 생각으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명품들을 쇼핑하기 시작했죠."

수빈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오소라에게 칭찬을 하듯 가볍게 박수를 몇 번 쳤다.

- 짝짝.

"좋습니다. 훌륭한 판단력입니다. 제가 적지 않은 돈을 보내준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셨군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왜 신(身)이 다른 것들 보다 앞에 나와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계속 진행해 주시죠."

"네. 그래서 제가 머리도 염색하고 옷도 백도 구두도 다 명품으로 바꾸고서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지금 화면에서 보시는..."

잠시 후 수빈은 정면 스크린에서 계속해서 바뀌는 몇 십 채의 빌딩들을 건성으로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네. 고생이 많았겠는데.. 하지만 이번 일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은 근면 성실이 아니지. 어디 한번 슬슬 찔러 볼까?'

수빈은 손을 들어 오소라의 발표를 끊었다. 그런 다음 냉정한 톤으로 말했다.

"오소라씨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고생한 건 충분히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물건이 너무 많아서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런 식이라면 실망인데요. 부동산에 그냥 맡긴 것과 지금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오소라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야무지게 불끈 쥐고서 대답했다.

"저도 이틀 정도 발로 뛰어다니며 조사를 하다가 사장님과 똑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무작정 조사를 하는 게 과연 맞는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죠."

수빈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죠?"

"생각하는 방향을 180도 바꿔버렸어요. 사장님. 지금 저희가 구입하고자 하는 건물은 그때 포트폴리오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존 영화사들과의 전쟁에서 일종의 병참기지이자 공성전을 할 수 있는 옹성 역할을 할 건물을 구입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완전히 반대 입장으로 생각해 봤죠. 내가 만약 기존의 거대 영화사 사장이라면 우리 영화사를 어떻게 처리하려 들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짓밟으려고 하고, 어떤 수법으로 짓뭉개려고 할까?"

- 짝짝짝.

오소라의 대답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적을 상대하는 모든 병법(兵法)들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자 필수로 요구되는 마음가짐이죠. 이거 오소라씨가 내린 결론이 뭘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 계속해 주시죠."

수빈의 격려에 오소라가 살짝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저라면 우리 영화사를 어떻게 짓밟을까 고민을 해봤습니다. 제가 떠올린 방법은 네 가지였어요. 첫째는 가장 손쉬운 폭력. 하지만 이 방법은 불가능해요. 사회적 약자에게나 통하고 특히 사장님 같은 유명 연예인에게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죠. 둘째, 자금 유입을 차단하는 방법. 하지만 이 방법도 안돼요. 아직 정확히는 파악을 못했지만, 300억짜리 빌딩을 손쉽게 구입할 정도로 사장님에게는 자금 여유가 충분한 걸로 보이니까요."

오소라는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지혜로운 눈동자로 수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세 번째는 핵심 기술자 빼오기. 하지만 이것도 탈락. 왜냐면 사장님에게는 이미 외삼촌, 아니 박감독님이라는 든든한 동업자가 있으시고 지금 다른 뛰어난 기술자들과도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추진 중이시라고 들었으니까요. 결국 남은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수빈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장단을 맞췄다.

"과연 그게 뭘까요?"

"시장 진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막는 것. 저라면, 만약 제가 상대 영화사 사장이라면 반드시 이 방법을 쓸 거예요."

오소라가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신생 영화사를 죽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작한 영화를 스크린에 절대 걸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겁니다. 그냥 말려서 죽이는 거죠. 기존의 재벌 그룹의 영화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그룹 내에 수많은 영화관들과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들끼리 카르텔을 맺고 우리가 제작한 영화를 걸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가 없게 되고 그냥 앉아서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수빈이 지체하지 않고 즉각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뭡니까?"

"최소한의 자구책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자체적으로 확보한 스크린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관객들에게 작품을 보여줘야만 하는 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런 다음 여론전을 펼치든 해외 시장을 개척하든지 하면서 역습을 노려야겠죠. 그리고 이미 영화관들은 예전의 영화 필름을 영사기에 돌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디지털 영사시스템으로 바뀐지 오래라 아주 손쉽게 영화를 걸 수 있습니다. 건물을 사려면 반드시 이점을 고려해서, 최소한의 스크린 숫자를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 짝짝짝짝짝.

수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Brava!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그래서 고른 건물은?"

오소라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스크린에 영상 하나를 바로 띄웠다.

"제가 선택한 건물은 바로 이겁니다. 대학로 쪽에 위치한 건물이에요. 서울대 병원 건너편에...."

잠시 후 예정된 발표를 모두 마치고 당당한 자세로 자신의 눈앞에 우뚝 서있는 오소라를 보며, 수빈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소라씨."

"네. 사장님."

"이 세상에는 오소라씨 같은 특출한 사고방식을 지닌 인재들이 간혹 있습니다. 시운(時運)을 잘 만난다면 엄청난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재들이죠. 하지만 그런 인재들의 대부분이 빛을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현실로 끌고 와서 실제로 구현한다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입니다. 투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강인한 의지력 그리고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투쟁심이 있어야만 겨우 가능할까 말까 하죠. 그렇지 않다면 방구석에서 뒹굴며 하는 단순한 뇌내 망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수빈은 오소라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소라씨는 그 어려운 걸 해낼 수 있는 특별한 인재입니다. 머리 좀 좋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몇 년간 고시 준비나 하는 흔해 빠진 인재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런 사람들 몇 백 명을 모아놔도 오소라씨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수빈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오소라의 가족들에게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만큼 오소라씨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절대 제가 놓쳐서는 안되는 인재죠."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던 오소라의 몸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맡긴 일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처리하셨습니다. 지금 아마 오소라씨의 발바닥은 물집이 가득하고 뒤꿈치가 다 까졌을 겁니다. 그런 건 눈으로 직접 안 봐도 다 알아요. 요 며칠간 몇 시간 자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소라씨.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때 약속한 대로 오소라씨에게 1억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서있는 오소라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소라씨가 동의한다면, 제가 세우는 영화사에 부사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산과 인사에 관련하여 전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같이 더 넓은 세상을 힘차게 한번 날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오소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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