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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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장이 추억에 젖은 듯 촉촉하게 물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그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다니.. 정말 다행이야."
"젊었을 때는 미모가 장난 아니셨을 것 같던데요?"
수빈의 질문에 박사장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장난 아니었지. 오죽하면 별명이 여왕이었겠나. 요즘이야 얼굴 좀 뜯어고치고, 비싼 메이크업 받고, 뽀샵 처리 잘하면 개나 소나 여신이니 갓이니 하면서 떠들어 대지만.. 우리 때는 안 그랬다네. 얼굴에 칼 대지 않은 천연 미인에, 화장 따위는 하나 안 하나 똑같이 아름다워야만 했지. 거기에 미모에 걸맞은 품격까지 갖추어야만 비로소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줬다고. 지금이랑은 격이 달라."
"사장님. 그런 식으로 우리 때는 어떻고 저떻고 말씀하시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뭐 들어도 상관없네. 그게 사실이니까.."
"제가 듣기로는 예전에 음대생이셨다고 하던데요."
"그랬지. 강이사는 나이가 어려 잘 모를 거야. 예전에 국제 그룹 해체 사건이라고 있었네.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이었지. 그때 그 사건의 여파로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기 전까지는 S대 음대를 다녔었지. 영어도 아주 유창하게 잘했어. 학교에서 소문난 재원(才媛)이었다네."
"그렇군요. 음악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탬버린 솜씨가 아주 예술이시던데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셨습니다. 리듬감에 필에 거기에 장비까지.."
"달리 '탬짱'이겠나."
"탬짱요? 관세청의 여왕 말고 그런 별명도 있으셨습니까? 탬버린을 짱 잘 치셔서 붙은 별명인가요?"
"그 당시에는 '짱'이라는 표현 자체가 없었어."
"그럼 뭡니까?"
"탬버린의 장인(匠人). 우리 때에는 뭔가를 잘하는 사람에게 장인의 솜씨라고 칭찬을 많이 했었지. 탬버린의 장인을 줄여서 탬장. 부르기 편하게 탬짱이라고 바뀐 거야."
수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꾸 우리 때 우리 때 하시네요. 추억이 새록새록 돋나 봅니다."
"강이사도 나이 들어봐. 그럼 지금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분께서는 사장님이 매너가 아주 좋으신 분이라고 칭찬하시더군요"
박사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내가 젊었을 때부터 비교적 매너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녀를 너무나 좋아했다네. 그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그러다 보니 그때 그녀 곁을 맴돌던 수많은 다른 남자들처럼 용기 있게 작업을 걸 엄두도 못 냈었지. 그래서 아마 내가 매너가 좋은 걸로 착각했을 거야."
"사장님이 의외로 순진한 면도 있으시군요. 그렇게 뛰어난 재원이라는 분이 사장님이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챘을까요? 그랬다면 사장님이 오래간만에 직접 연락을 하셨다고 해도 여기까지 왕림해 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그 당시 사장님의 애틋한 마음을 다 아시니까 감사한 마음에 보답 차원에서 와주신 거겠죠."
수빈은 허리를 젖히고 기지개를 펴듯 양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며 말했다.
"다 알면서도, 그때에는 어쩔 수 없이 모른척하셨을 겁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지 않습니까?"
"후. 그런 걸까.."
그 시절을 추억하는 듯 초점 없이 텅 빈 공간을 응시하는 박사장을 보며 수빈이 말했다.
"그분께서 사장님께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지금은 매인 몸이라서 만나기 힘들지만, 언젠가 보다 나이가 많이 들면 서로 편하게 얼굴 보면서 차나 같이 한잔하자고요. 그리고 사장님으로 취임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가? 고맙군.. 이거 사장이 된 보람이 있는걸."
수빈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휙휙 바뀌는 박사장을 위해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 밤늦은 시간에 뭘 보고 계셨던 겁니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던진 수빈의 질문에, 박사장이 아직 추억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몽롱한 눈빛으로 짧게 대답했다.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어떤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냐고요."
수빈의 말에 정신을 차린 박사장이 보고 있던 서류를 수빈에게 밀었다. 수빈은 서류를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쳐 보았다.
"이건.. 오소라씨가 작성한 영화사 건물 구입에 관련한 포트폴리오 아닙니까?"
"자네가 하도 칭찬을 하길래 나도 한번 들여다봤네."
"들여다보신 감상이 어떠십니까?"
"첫 장, 첫 줄부터가 새롭더군. 1장. 영화사 건물을 구입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 거기 시작부터가 내가 가진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어."
박사장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수빈이 빙긋 웃었다.
"특이한 시각에 개성적인 접근이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건물의 입지, 상태, 가격, 대출 등등을 언급하면서 줄줄이 떠들어 되겠죠."
"신규 영화사의 건물을 구입할 때에는, 기존 영화사의 견제와 방해를 대비하기 위해 적들과의 전쟁시 방책 겸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수 있는 건물로 반드시 구입해야만 한다.. 첫 줄부터 난데없이 그런 소리가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네."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그런 의견을 20대 중반의 평범한 여자가 내놓다니.. 저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서 일반 회사에 제출하면 아마도 1차 서류 심사에서 다 떨어질걸세. 강이사나 되니까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는 거지."
"그런가요? 제가 강태공(姜太公)을 알아본 주나라 무왕(武王)이라도 된듯한 기분이군요."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나?"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나도 관심이 가서 말이지."
"남의 회사 인재를 함부로 탐내시면 곤란한데요."
"어허. 남의 회사라니. 섭섭하게 왜 이러나? 어차피 영화사도 나랑 같이 합작할 거 아닌가."
"아직 돈을 받은 건 아닙니다만.."
"무슨 소리야? 내가 오소라 계좌로 벌써 2천만원이나 보냈지 않은가? 이미 나도 영화사에 한발 걸친 상태라고."
"그 돈은 입금할 때 제하고 보내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이사.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긴가?"
수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오소라씨는 제가 계획을 좀 더 보충해 오라고 지시해서 지금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자네가 볼 때는 잘 해올 거 같은가?"
"글쎄요. 결과를 봐야겠죠. 제 예상으로는 중책 이상은 들고 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중책? 그게 뭔가?"
"제가 생각할 때 포트폴리오를 보완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또? 또 세 가진가?"
"이게 습관이 되어 나서.. 그럼 말하지 말까요?"
"아닐세. 내가 잘못했네. 궁금하니 빨리 말해보게나."
"상, 중, 하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하책(下策)은 작금의 현실만을 보고 기존 재벌 그룹의 거대 영화사들에게 순순히 굽히고 들어가 신생 영화사의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이죠. 전형적인 갑과 을의 관계로 가는 겁니다. 지나가는 개도 낼 수 있는 계책이죠. 한낱 미물인 개도 세상에 태어나면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니까요."
"만약에 말이야. 오소라가 하책을 들고 오면 어떡할 건가?"
"미련 없이 잘라야죠."
"그렇군. 중책(中策)은 뭔가?"
"재벌 소속의 영화사들과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입니다. 갑과 을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 설정을 하는 거죠. 현재 제가 가진 능력과 자금력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다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럼 오소라가 중책을 들고 오면?"
"제가 세울 영화사에 고위 간부로 채용해서 제대로 굴려야겠죠."
수빈의 말에 박사장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지막 상책(上策)은 뭔가?"
"제가 가진 능력과 오소라 자신의 잠재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적들과의 싸움을 망설이지 않는 겁니다. 기존의 거대 영화사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맛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투쟁심 높은 사람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죠.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 오소라씨가 상책을 들고 온다면.. 제 속마음을 제대로 짚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랑 찰떡 궁합인 거죠."
"그렇군. 만약 들고 온 게 상책이라면 자네는 어떡할 건가?"
수빈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소라씨에게 전권을 줘야겠죠. 그런 투쟁심 강한 인재를 얻는다는 건 하늘이 절 돌봐주시는 거랑 다름없습니다. 제가 옆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큰 가닥만 잡아준다면, 적들과의 싸움에 선봉에 나서서 거침없이 싸워 나갈 겁니다.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무적의 선봉장이 되는 거죠."
"허어.. 자네는 오소라를 아주 높이 평가하는군?"
"제 개인적인 평가로는 시대를 잘 타고났으면 일국의 왕이 될 수도 있는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군. 뭐 어차피 자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언제 다시 만날 예정인가?"
"크리스마스 지나고 바로 만나기로 약속을 해놨습니다. 하루빨리 영화사를 설립해야 하니까요.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곧 만나겠죠"
수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장님도 이제 그만 퇴근하셔야죠?"
"그래야지. 정리 좀 하고 퇴근하겠네. 먼저 들어가게나."
"알겠습니다. 사장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래. 강이사도 메리 크리스마스."
수빈은 박사장을 남겨두고 사장실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다음 날. 수빈은 미리 잡혀 있는 행사들을 소화하느라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그런 바쁜 와중에서도 짬을 내어 점심 무렵에는 콘티 경매에 참가하여 최종 낙찰을 받은 당사자와 만나 점심을 함께 하였다.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날에도 수빈은 행사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행사를 모두 끝마친 후 수빈은 저녁 늦게 백성철 매니저의 집으로 찾아가 백성철의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숨돌릴 틈 없이 바쁘게 보낸 수빈은, 아침 일찍부터 회사로 나가 녹음실에서 열심히 영화 음악 편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최종 편집을 마무리하고 완성본을 플레이 시킨 수빈은 눈으로 영상을 보고 귀로 음악을 들으면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군. 나쁘지 않아. 노림수가 제대로 통했어.'
최종 완성본을 USB에 담은 수빈은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밴에 올라탔다. 밴을 타고 드림픽처스에 도착한 수빈은 편집실로 찾아갔다. 장감독 혼자서 초췌한 얼굴로 영상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열심히 편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감독님. 혼자 계시네요."
수빈의 인사에 며칠간 면도를 하지 못한 듯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장감독이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강감독. 잘 왔네. 이리로 앉게나. 서감독은 너무 졸리다고 잠시 숙직실에 눈 붙이러 갔다네."
"그렇군요. 감독님은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습니까?"
"크리스마스? 그런 걸 챙길 정신이 어디 있겠나. 나랑 서감독이랑 둘이서 편집실에서 계속 살았다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1월 중순 개봉을 목표로 하는데 내가 쉴 시간이 없지."
"그래요? 개봉 시기가 제 예상보다 몇 주 더 빠르네요?"
"다 강감독 덕분이지. 30분 가까운 분량을 강감독이 맡았으니 내가 작업해야 할 분량이 많이 줄었지.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개봉하기로 욕심을 내었네."
"그렇군요. 작업은 어디까지 되신 겁니까?"
"거의 다 끝나가네. 해바뀌기 전에 다 마무리 할 수 있을거 같아."
"대단하네요. 두 분이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수빈은 품에서 USB를 꺼내어 장감독에게 내밀며 말했다.
"다행히 저도 작업을 잘 마무리했습니다."
장감독이 떨리는 손으로 USB를 건네받았다.
"여기에 강감독의 작품이 담겨 있는거지?"
"그렇죠. 영상과 음악까지 깔끔하게 다 마무리 지었습니다."
"강감독. 내일 혹시 시간이 되는가?"
"바쁘긴 합니다만.. 내라면 또 못 낼건 없겠죠. 무슨 일 때문에 물어보시는 겁니까?"
"내일 나랑 같이 영화 시사회를 하세나. 친한 사람들 몇 명만 조용히 불러서 말이지. 그 친구들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고. 내가 오늘 중으로 서감독이랑 같이 일차적인 작업을 마무리 지어 놓겠네. 자네 꺼야 이어붙이기만 하면 될 테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야."
"비밀 시사회라.. 좋습니다. 시간을 내보죠. 오전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내일 오전 10시로 정하지. 가능하겠나?"
"네. 시간 맞춰 오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보세나. 강감독도 친한 사람 두세 명 정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한번 골라 보죠."
잠시 후 수빈은 드림픽처스를 나와서 오소라를 만나기 위해 벨 스튜디오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