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38화 (138/236)

#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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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회사로 나간 수빈은 A&R 팀 조민석에게서 영화 음악이 녹음되어 있는 USB를 건네받았다. 밤에 있을 추가 녹음을 위하여 수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편집 작업에 매달렸다.

저녁 무렵 수빈은 연말이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잡혀있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행사를 무사히 끝마치고 밤늦게 회사로 다시 돌아온 수빈은, 복귀하자마자 제1 녹음실로 달려가 편집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수빈은 시간을 확인하고 장비들을 점검하면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띵동

문자 알림 소리에 수빈은 핸드폰을 확인하였다.

- 다 와가요.

단문의 문자를 확인 한 수빈은 녹음실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정문 쪽으로 내려갔다. 1층 보안실을 찾아간 수빈은 당직 경호요원을 발견하고선 다가갔다. 수빈을 발견한 경호요원이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요. 강이사님. 반갑습니다."

"그래요. 밤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신 겁니까? 지금 녹음실에서 작업 중이시라고 전해 들어서, 퇴근하실 때는 바로 주차장 쪽으로 나가실거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지금 제가 초대한 손님이 곧 도착하실 거라서요. 그분이 사내로 들어가실 때 보안 절차를 생략하기 위해서 제가 직접 모시러 내려왔습니다."

수빈은 보안요원의 명찰을 흘낏 본 다음 말을 이었다.

"고정남씨. 지금 오시는 분은 사장님도 아시는 분이니, 출입기록이나 출입증 패용 절차 같은 것들은 모두 생략해 주세요."

보안요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강이사님. 그럼 지금 오시는 손님은 강이사님의 책임 아래 들어가시는 걸로 알고, 따로 기록은 남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어렵게 모신 손님이라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질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이사로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보안요원의 말에 수빈이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대답할 때, 회사 정문으로 차가 한대 미끄러져 들어왔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상징하는 엠블럼이 라디에이터 그릴에 떡하니 달려있는 차량이었다. 시중에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뉴 메르세데스 S63 차량이 도착하자 수빈과 보안요원이 다가갔다.

수빈이 운전석 문쪽으로 다가가자, 한눈에 보아도 아름답고 세련된, 나이 때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키의 중년 여성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긴 머리에 굽이 높은 검은색 롱부츠를 신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회색빛이 살짝 감도는 하얀색 머플러를 매고 있었다. 살짝 조여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코트의 허리띠가 늘씬한 그녀의 몸매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수빈은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전화드렸던 수빈입니다."

중년 여성이 수빈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어머. 정말 잘생기셨다. 우리 딸이 수빈씨라면 꺼벅 죽는 이유를 알겠어요. 화면에서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는데요. 너무 멋있으시다.."

"칭찬 감사합니다. 따로 짐 같은 건 없으십니까?"

"아. 운전석 옆좌석에 캐리어가 있는데.."

옆에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안요원이 잽싸게 차 문을 열고선 은색의 조그마한 캐리어를 차 밖으로 꺼내었다.

잠시 후 수빈은 캐리어를 끌고 중년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선 녹음실로 올라가고 있었다.

"수빈씨가 이사에요? 아까 경비 아저씨가 수빈씨를 보고 강이사님이라고 부르던데."

"네. 얼마 전 이사로 진급했습니다."

"어머. 정말 대단하시다. 그 나이에.. 우리 딸 얘기로는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20대 초반이라고 그러던데. 벌써 이사님이시구나."

"네. 얼마 전에 이사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박실장님은 얼마 전 사장님으로 취임하셨습니다. 회사 지분을 많이 인수하셨거든요."

"그래요? 그럼 동주씨가 이제 YK의 어엿한 사장님이 되셨네요. 세월이 참 빨라요.."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중년 여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빈은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영지에요. 김영지."

"그럼 김여사님으로 불러.."

영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왜 이러세요. 수빈씨. 사람 마음 아프게.. 그냥 영지 누나 어때요?"

"그랬다간 박사장님 손에 맞아 죽을 거 같은데요. 영지씨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말에 여성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흐응. 차갑고 도도하셔라. 젊은 애들이 완전 반할 스타일이시다. 수빈씨. 여자애들에게 인기 많죠?"

수빈은 가볍게 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직 애인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 하실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머. 강이사님이 수줍어도 하시네. 귀여워셔라. 그래요. 수빈씨. 시간도 늦었고 하니 빨리 끝내죠.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수빈은 미리 준비해둔 모니터에 영상을 띄웠다.

"영화 영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차적으로 작업을 해서 음악을 입혀놓은 상태입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영지씨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악보가 따로 없습니다. 영상을 보시고 음악을 들으시면서 편하게 악기를 연주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적절하게 편집을 다시 하겠습니다."

"보고 들으면서 필(feel) 받는 데로 하라는 말이죠?"

"네. 영지씨만의 필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연주를 해주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지금 말달리는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은 '주페'의 '경기병(輕騎兵) 서곡'인거 같은데.. 원곡과 좀 다르네요? 수빈씨가 직접 편곡하신 건가요?"

그녀의 말에 수빈은 살짝 놀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경기병 서곡'에 '윌리엄 텔 서곡'을 살짝 섞어서 편곡했습니다."

잠시 후 그녀가 영상을 보다 수빈에게 다시 물었다.

"수빈씨가 쓰러질 때 나오는 음악은 '베르디'의 '진노의 날'을 편곡하신 거죠?"

"네. 그걸 베이스로 한 겁니다."

"거기에 뭘 섞은 거예요? 귀에 익숙한 느낌이 있는 걸로 봐서는 완전 새로운 곡은 아닌 거 같고.. 근데 편곡을 많이 해서 그런지 어떤 곡인지 떠오르질 않네요. '진노의 날'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섞은 음악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찌르는 아픔 같은 느낌을 주려는 거 같은데.."

수빈은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며 답을 슬쩍 흘렸다.

"바그너의.."

"아.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 그걸 섞은 거였군요. 근데 느낌이 사뭇 다르다."

"편곡을 했으니까요. 악기 편성도 다르고.. 클래식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시는군요?"

"박사장님이 말 안 해주시던가요? 제가 그쪽으로 가기 전에는 클래식을 사랑하던 음대생이었다고.."

"사장님이 영지씨에 대해서 말을 아끼셔서.. 못 들었습니다."

수빈의 대답에 마음이 흡족한 듯 김영지가 콧소리를 내었다.

"흐응. 역시 동주씨가 매너가 참 좋아요. 사람은 안 변하나 봐요. 젊었을 때도 매너가 참 남다른 분이셨는데, 지금도 똑같네요. 좋아요. 영상을 다 봤으니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가 일어나 코트를 벗었다. 코트 안에는 블랙으로 된 재킷에 짙푸른 스키니 진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은색 캐리어를 집어 들고 비밀번호를 맞추기 시작했다.

- 딸칵.

캐리어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반으로 갈라졌다.

- 취리링. 띠링. 띠리링.

캐리어가 좌우로 갈라지자 한쪽마다 각각 3개씩 걸려있는 각양각색의 탬버린이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색, 노란색, 황금색 심지어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탬버린이 캐리어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동그란 모양, 반달 모양, 삼각형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탬버린이 가방이 움직일 때마다 아름답고 경쾌한 소리를 연신 흘리고 있었다.

"이야. 종류가 참 다양하네요."

캐리어를 펼쳐놓고 다시 자리에 착석한 그녀가 대답했다.

"음악의 장르가 다양하듯이 탬버린도 다양해야겠죠? 각각 용도가 다 달라요.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그녀의 말에 수빈은 손으로 녹음 부스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저쪽 문을 열고 녹음 부스 안에 들어가시면 영상을 보실 수가 있을 겁니다. 마이크 앞에서 헤드셋을 쓰시고, 제가 신호를 드리면 영상을 보시면서 자유롭게 연주를 해주시면 됩니다. "

수빈의 말에 김영지가 수빈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젊군요. 매너가 부족해요. 하기야 그 나이 때는 그런게 또 매력이죠. 수빈씨. 이럴 때는 같이 들어가서 상대방 여성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고, 머리에 헤드셋을 직접 씌워 주는 게 매너에요. 이왕이면 달콤한 멘트도 함께 말이죠. 박사장님에게 한참 더 배우셔야겠어요."

느닷없는 매너 얘기에 당황한 수빈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습니까?"

"절 꼬시거나 작업을 하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에요. 누군가와 일을 할 때는 상대방 기분을 최대한 맞춰주고 업시켜줘야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않겠어요? 아직 접대를 별로 안 해보셨나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수빈의 손목을 잡아끌고 녹음 부스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시간이 흘러 수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콘솔 테스크에 앉아서 녹음 부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음악에 취해버린 듯, 열정적인 탬버린 연주로 인해 땀에 흠뻑 젖은 머릿결을 연신 쓸어올리고 있는 김영지를 바라보며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도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시는군. 성격도 털털하고 명랑 쾌활해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타입이시고. 한창때의 미모를 고려해 보면 박사장님이 아직까지도 못 잊고 계시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군..'

수빈은 콘솔 데스크에 있는 마이크 스위치를 올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이만 녹음을 끝내겠습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밖으로 나온 김영지에게 마른 수건을 건네며 수빈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오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수건으로 얼굴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뭘요. 기분 전환도 되고 좋았어요. 요즘 딸이 한창 사춘기라 저도 짜증이 많이 쌓였었는데.. 덕분에 확 풀고 가네요."

"잠시 쉬시면서 땀 좀 식히시죠. 바로 나갔다간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조금 있다 제가 차까지 배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화장도 다시 좀 해야겠네요. 근데.. 녹음을 계속 여러번 하다 보니 하나 궁금한게 생겼어요.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말씀하시죠."

"제가 첨에 들었을때는 영화 음악이 참 좋구나, 편곡이 부드럽게 잘됐구나, 영상이랑 딱딱 들어맞는구나, 그런 생각 정도였었는데.. 막상 탬버린을 치면서 녹음을 하다 보니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었어요."

"어떤 걸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편곡을 할때...."

수빈은 김영지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날카로운 식견에 감탄을 하며 대답했다.

"이야. 엄청난 센스십니다. 여태껏 녹음 작업을 하면서, 음악을 전공했고 그걸로 밥 먹고산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영지씨께서 유추하신 게 정확합니다. 그걸 노리고 편곡 작업을 한 겁니다."

"정말요? 어쩜 그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강이사님이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보기엔 영지씨께서 더 대단하신 거 같습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칭찬을 건네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수빈은 김영지의 배웅을 마치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밤늦은 시간이라 김비서는 보이질 않았다. 비서실 방안의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어두컴컴하였고, 사장실로 통하는 좁은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박사장이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박사장이 잔뜩 긴장을 했는지 돌처럼 굳은 얼굴로 물었다.

"다 끝났는가?"

"네.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녹음 결과는 잘 나왔나?"

"잘 나왔습니다."

"그러면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겠군. 조만간 개봉을 할거 같은데, 강이사는 얼마 정도를 예상하나?"

박사장의 연속되는 영혼 없는 질문에, 수빈이 피식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선 박사장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솔직해 지시죠. 지금 묻고 싶은 건 그런 하찮은 문제가 아닐 건데요?"

박사장이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쁘던가?"

"여전히 아름답고 고우셨습니다. 몸매도 관리를 잘하셨는지 아직도 늘씬하시더군요."

수빈의 대답에 박사장이 추억을 떠올리듯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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