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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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마음을 정한 듯 허리를 굽혀 허이사를 손수 일으켜 세운 다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이사님.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 아시죠?"
일어선 허이사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고 있네. 이 나이에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정말 미안하네."
허이사의 대답에 수빈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그런 말들이 다 허이사님 처럼 자기 욕심에, 자기 마음대로 하시려는 분들 때문에 생긴 말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하는 말 명심하세요. 허이사님이 애인분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이 보약은 그분이 드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수빈의 말에 허이사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네.
"알겠네. 내가 그만 욕심을 부렸네. 회사로 들어오다가 우연히 자네 매니저를 만나는 바람에.. 내가 그만 실수를 했어."
"그 쪽은 같은 여성이라도 허이사님 애인 분하고는 상황이 달라요. 현재 몸 푼지 얼마 안 된 분이고, 애기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고 있는 여성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만나서 체질까지 다 확인을 했고요. 그래서 제가 당분간은 드셔도 좋다고 한 겁니다."
"후. 내가 그걸 미처 몰랐지.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잘못했네. 그러니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말은 부디 거두어주게나."
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이번 한 번만 봐드리겠습니다. 제가 허이사님 말처럼, 누구는 이뻐서 주고 누구는 미워서 안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가 박사장님 사모님도 안 드렸는데.. 그럼 제가 박사장님을 미워해서 그랬겠습니까? 나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하아.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약은 잘 쓰면 보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약이 됩니다. 앞으로 어디 가셔서 경솔하게 자랑하지 마시고, 누구에게 함부로 권하지도 마세요. 만약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로 두 번은 안 봐드립니다."
허이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거네. 내가 맹세하지. 또 그러면 내가 개아들이야."
사장실에서 허이사의 보약 욕심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송경호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YK 사옥에 도착하였다.
1층 안내실에서 안내를 받아 A&R 팀 녹음실로 찾아간 송경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잘 나가는 3대 기획사의 최신 녹음실답게, 넓은 평수의 공간에 연식이 얼마 되지 않았는지 번쩍번쩍하는 고가의 최신형 장비들이 송경호의 눈에 들어왔다.
콘솔 박스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콘솔 데스크에는 아직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았고, 녹음실 한쪽에 줄지어 놓여 있는 소파에는 연주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연주자들 중에 한 명이 송경호를 발견하고선 번쩍 손을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송경호를 불렀다.
"경호야. 시간 맞춰 잘 왔다. 이리로 와라."
"오정호. 일찍 와있네."
송경호가 소파에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호형은?"
"녹음 부스 안에서 지금 민석이 형이랑 장비 체크하고 있다. 금방 나올 거야."
"그래? 나오면 인사드려야겠네."
그때 녹음실 문이 활짝 열리면 A&R 팀 정팀장이 서류뭉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정실장이 날카로운 눈매로 잠시 사람들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연주자 분들. 2시가 다 되어가서 잠시 인원 체크 좀 하겠습니다."
이윽고 인원 체크를 모두 끝마친 정팀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보셨겠지만 오늘 사람이 많습니다. 사물놀이 4명, 바이올린 4명, 기타 2명, 베이스 2명, 드럼 1명 등 다 합쳐서 13명이나 되죠.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다들 지시에 잘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나 저나 스트레스 안 받고 손해도 안 봅니다. 잘 아시겠습니까?"
- 네. 잘 알겠습니다.
그때 녹음 부스 안에서 덩치가 산만한 이성호가. 마치 산중에서 먹이를 찾는 곰처럼 웨죽걸음으로 걸어 나와서 정팀장에게 인사를 하였다.
"다녀오셨습니까. 팀장님."
"그래. 성호야."
"네. 팀장님."
"연주자들 장비 세팅도 좀 하고 튜닝들도 미리미리 해놔. 강이사님 오시면 바로 연습 들어갈 수 있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녹음 일정이나 방법 같은 것들도 미리미리 알려주고.."
"네. 알겠습니다."
험악한 인상의 이성호가 어슬렁거리며 소파에 앉아 있는 연주자들 앞으로 다가가자, 연주자들이 다들 긴장을 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송경호는 이성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지각하지 않고 시간 맞춰 잘 왔다는 듯 이성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연주자들 앞에 선 이성호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깡패 같은 놈 아닙니다.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러분들의 일정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동안 연습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러면서 악보도 숙지하시고 서로 호흡도 좀 맞춰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동안 최종 녹음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성호는 말하는 도중 때마침 녹음 부스에서 걸어 나오는 조민석을 보며 물었다.
"민석아."
"네. 형님."
"연주자 분들 수고비는 어떻게 되는 거냐?"
"아. 오늘 일당이 필요하신 분은 끝나고 저에게 오셔서 영수증을 쓰시고 현금으로 받아 가셔도 되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신 분들은 내일 녹음이 끝나고 나면 저녁에 계좌로 한꺼번에 임금이 될 겁니다."
이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주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셨죠?"
- 네.
"연주비는 그렇게 알고들 계시고, 내일 녹음은 영화에 삽입될 영화 음악을 녹음할 겁니다. 녹음 부스 안에 들어가시면 앞쪽에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영화 영상이 나올 거니까 보시면서 참고해주시고요. 안에 들어가시면 연주자분들 이름이 붙어있는 자리마다 개인 악보가 비치되어 있으니까 살펴보시면 될 겁니다."
이성호가 연주자들을 좌우로 둘러보며 말했다.
"부스 안에서 동영상 촬영이나 녹음 같은 건 일절 안됩니다. 상식적인 거니까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하고요. 혹시 다른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연주자 중에 유일한 홍일점인 바이올리니스트 서정희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지휘는 어느 분이 하시나요? 영화 음악 감독님이 직접 오시는 건가요?"
"네. 여러분들을 직접 오디션 봤던 강이사님이 음악 감독이십니다. 그분이 직접 오셔서 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송경호가 오정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호야. 넌 영화 음악 감독이라는 강이사가 누군지 아냐?"
오정호가 작은 목소리로 알려줬다.
"왜 아이돌 그룹 BBG라고 있잖아. 거기 리더인 수빈씨가 강이사님이야."
오정호의 대답에 아이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던 송경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빈이 누군지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 얼마 전 밥 먹다 TV에서 얼핏 봤던, 자신이 저지른 폭행 사건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앳된 수빈을 떠올리며, 송경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버렸다.
"그 양아치 같은 놈이 음악 감독을 한다고? 그 어린놈의 새끼가?"
그 순간 녹음실 여기저기에서 즉각적으로 고성이 터졌다.
콘솔 테이블에 앉아서 장비를 만지고 있던 조민석이 양손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고선 벌떡 일어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뭐라 그랬지?"
소파 한쪽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정팀장이 서류를 집어던지고선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금방 어떤 놈이 말한 거야?"
연주자들 앞에 서있던 이성호가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굉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새끼가 처 돌았나?"
부지불식간에 내지른 자신의 한마디에, 녹음실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급변하고 자신을 향해 폭언들이 쏟아지자, 송경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얼굴 가득 살기를 띤 이성호가 성큼성큼 걸어와 송경호의 멱살을 움켜잡고 소파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이 쌍놈의 새끼가.. 정호가 사정을 해서 기껏 참가시켜줬더니 개소리를 찌껄여? 강이사님이 네 친구냐? 아가리를 찢어줄까?"
송경호 옆에 앉아 있던 오정호가 놀라서 허둥지둥하며 일어나 이성호의 손을 부여잡으며 사정했다.
"아이고. 성호 형님. 경호가 몰라서 실수한 겁니다. 실수한 거예요. 실수.. 형님. 제발 이 손 좀 놓으세요."
정팀장이 다가오며 급히 외쳤다.
"야. 성호야. 그놈 멱살 놔라. 그러다 치겠다."
"하지만 팀장님. 이놈이 감히 강이사님을.."
"나도 들었어. 인마. 그렇다고 두들겨 팰 수는 없잖아. 저 새끼는 그냥 회사 밖으로 내보내버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부르지 마라. 싸가지 없는 새끼. 누구보고 감히.."
조민석이 다가오며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경호! 오늘 일당은 계좌로 입금시켜 줄 테니까 악기 챙겨서 꺼져라. 어디서 감히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
송경호가 정신이 나가서 입만 뻐금뻐금 거리고, 오정호가 사태를 수습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을 때, 주변에 앉아 있던 연주자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그때, 수빈은 사장실을 나와 녹음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녹음실 쪽으로 걸어가며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냥 베풀기만 하면 고마운 줄을 모르지. 허이사를 그 정도로 닦아세웠으면 당분간은 내 말이 잘 통하겠군.'
가벼운 마음에 수빈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녹음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장군을 발견한 이등병들처럼 자리에서 칼같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 오셨습니까. 강이사님.
- 나오셨습니까. 이사님.
- 강이사님. 준비 끝났습니다.
- 어서 오세요. 이사님.
수빈은 엉겁결에 인사를 하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다들 일찍 오셨네요."
수빈은 속으로 어리둥절하였다.
'분위기가 왜 이래?'
수빈은 정팀장 쪽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팀장님. 준비는 다 됐나요?"
수빈의 물음에 정팀장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이사님.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들 바쁘실 텐데 빨리 시작할까요? 일단 다 같이 튜닝부터 맞춰보죠."
"알겠습니다. 이사님."
잠시 후 녹음 부스 안에서 연주자들이 미리 정해진 자신들의 자리에 착석하였고, 그 앞쪽에 수빈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개인적으로 튜닝을 해오셨겠지만, 합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귀찮으시더라도 다시 한번 튜닝을 하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단 한 사람의 불평불만 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연주자들을 보며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뭔 일이 틀림없이 있긴 있었군. 다들 군기가 칼같이 들었는데..'
"먼저 기타리스트 네 분들부터 튜닝 하겠습니다. 일단 라 음(音)부터.. 개방현입니다. 리드 5번, 베이스 3번. 하나. 둘. 셋."
- 띠잉. 띠잉. 띠잉. 띠잉,
수빈은 귀를 기울여 기타리스트 네 명이 튕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프로들이시라 튜닝이 비교적 잘되어 있네요. 하지만 합주라 한 명에게 맞추겠습니다. 송경호씨?"
수빈의 호출을 받은 송경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이사님."
송경호가 벌떡 일어나자 수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들 왜 이렇게 긴장들을 하고 계십니까? 긴장 푸시고 앉으세요."
"네."
"지금 제가 듣기로는 송경호씨 기타가 가장 정확하게 튜닝이 되어 있습니다. 다들 송경호씨 기준으로 맞춰주세요. 송경호씨는 계속 라 음을 쳐주세요."
- 띵. 띠잉. 띠잉. 띵
잠시 후 기타리스트들의 튜닝을 끝마친 수빈은 바이올리니스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바이올린도 맞춰 보겠습니다. 다 같이 G선, 솔 음부터 맞춰 볼게요. 하나. 둘. 셋."
주의 깊게 소리를 들은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정희씨에게 맞추겠습니다. 서정희씨는 ADEG 순으로 계속해서 쳐주세요."
잠시 후 바이올린 튜닝을 마친 수빈이 연주자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다 같이 맞춰보겠습니다. 바이올린은 GDAE, 기타는 솔레라미 순으로 쳐주세요. 제 손을 보시고 지휘에 맞춰서 순서대로 치시면 됩니다. 하나. 둘. 셋,"
- 띵. 띠잉. 띵. 띠잉. 띵. 띵.띵. 띵.
잠시 후 수빈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 짝짝짝.
"아주 좋습니다. 녹음이 끝날 때까지 지금 튜닝을 유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영상을 보시면서 녹음을 어떻게 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수빈이 부스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민석씨. 영상 틀어주세요."
대형 모니터에 편집한 영상이 나오자시 수빈이 설명을 시작했다.
"영상을 보시면서 설명을 들으세요. 전체적인 영상의 길이는 28분 11초입니다. 이 중에 음악이 깔리지 않는 7분 21초를 빼고, 단순한 음향 효과 정도에 불과한 4분 32초가 또 빠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연주하는 부분은 16분 18초 정도가 됩니다."
수빈이 연주자들과 같이 영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연주가 들어가는 부분은 크게 4가지로 나눠집니다. 저기 오른쪽에 말을 타고 있는 제가 보이시죠? 제가 말을 타고 일행과 같이 달리다가 혼자 떨어져 나옵니다. 그 부분이 첫 번째 연주가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떨어져 나온 제가 적들과 싸우는 장면이 두 번째 연주가 들어가는 부분이고요. 제가 적들에게 당해서 죽어가는 장면에서 세 번째 연주가 들어갑니다. 마지막 연주 장면은 적들이 절 지나쳐서 다시 말을 타고 달리고, 그걸 제가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숨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잠시 후 30분 정도 되는 영상이 끝나자 수빈이 연주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영상은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제가 영상 시간에 맞춰서 알아서 지휘를 할 테니까, 연주자분들은 머릿속으로 영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개략적으로 그리시면서 제 지휘만 잘 따라오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사물놀이팀은 이따가 제가 따로 디렉팅을 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영상을 주의 깊게 봐주세요. 그럼 영상을 다시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이 부스 밖을 쳐다보자 조민석이 다시 영상을 플레이시켰다. 연주자들이 영상을 보는 동안 수빈은 A&R 팀원들을 만나기 위해 부스 밖으로 나갔다.
수빈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팀장과 이성호, 조민석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튜닝해 온 걸 보니 연주자들을 잘 뽑은 거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건 제가 믿고 맡기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시겠죠. 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간섭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
자신들을 믿는다는 수빈의 말에 팀원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수빈의 치사에 이성호가 대표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연주가 잘 뽑히면, 오늘 중으로도 녹음이 끝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최대한 달려 봅시다."
수빈의 말에 조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님. 그럼 연주비는 어떡할까요? 이틀 치가 책정되어 있는데요."
"오늘 끝나더라도 이틀 치를 다 드리세요. 잘하면 잘한 만큼 보상이 있어야죠."
"알겠습니다. 이사님."
팀원들을 격려한 후 수빈은 부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 후 부스 안에서 열정적인 수빈의 목소리와 여러 악기들의 불협화음이 섞인 소리가 부스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거긴 말이 빨리 달립니다. 기타 리듬하고 지금 전혀 안 맞아요. 알레그로!
- 여긴 사물놀이 단독 구간이니까 잠시 쉽니다. 사물놀이 분들은 눈여겨 봐주세요.
- 여긴 칼싸움을 하기 위해 질주하는 장면이니까 보다 격정적으로 연주해 주세요. 비바체! 죽는 걸 알면서도 달려가고 있잖아요. 드럼 지금 뭐 합니까? 느낌이 안 삽니다.
- 드디어 칼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바이올린! 마르텔레라고 적어놨잖아요. 음을 망치질하듯 짧고 세게 연주하세요. 할 줄 모릅니까? 제가 알려드려요?
- 잠시 쉬고요. 제가 슬로모션으로 쓰러지기 시작하죠? 자. 피아니시모~
- 지금 드럼이 흥분했는지 중간에 조금씩 빨라집니다. 제 지휘를 잘 보세요. 다시 한번 가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의 정확한 지시와 지휘로 점점 연주자들의 텐션이 높아지고 있었다. 부스 밖으로 흘러나오는 악기들의 연주가 조금씩 어우러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하모니를 뽐내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의 연습이 끝나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당근을 투척했다.
"지금 아주 좋습니다. 이 상태로라면 바로 녹음을 해도 될 거 같은데요. 녹음이 만족스럽게 된다면.. 오늘 끝내도 상관없을 거 같습니다. 일당은 이틀 치를 다 드릴 테니까,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집중해 주세요. 내일 나오는 것보다 쉬는 게 더 좋으시죠?"
- 네! 좋습니다.
흥분한 연주자들의 우렁찬 대답에 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쉬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몇 번만 불태워 봅시다."
7시가 안되어 녹음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수빈은, 연주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나눴다.
"다들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같이 작업을 하고 싶네요."
연주자들이 다들 밝은 얼굴로 수빈과 악수를 하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 녹음 부스를 나섰다. 의도적인지 맨 마지막으로 남은 송경호가 수빈과 악수를 나누며 머뭇머뭇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이사님을 미처 몰라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지휘까지 훌륭하게 하시는 분이신 줄 제가 모르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강이사님. 다음번에도 꼭 불러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빈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실수를 하셨는지 전 들은 바 없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송경호씨 연주는 아주 맘에 듭니다. 잘하시던데요.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을 하도록 합시다."
송경호가 수빈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고 인사를 한 후 녹음 부스를 나갔다. 수빈은 나가는 송경호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분위기가 싸했던 게 저 사람 때문이었나 보군. 뭐 연주가 좋았으니까 별 상관없지.'
수빈은 머릿속에서 나쁜 기억을 바로 지워버리고 녹음 부스를 나섰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뒷정리 잘 해주시고 민석씨는 작업 끝내셔서 내일 저에게 바로 넘겨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럼 전 이만 가볼 테니 다들 퇴근하세요."
녹음실은 나온 수빈은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면서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지. 한 분을 더 모셔서 따로 녹음을 해야 끝이 나지.'
잠시 후 전화기 너머 나이가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일전에 연락드렸던 수빈이라고 합니다."
[네. 알아요. 안녕하세요.]
"작업 준비가 다 끝나서 전화드렸습니다. 내일 저녁에 시간이 되시면 녹음을 했으면 하는데요. 시간이 가능할까요?"
[시간은 가능할 거 같은데.. 그때 다른 분들은 아무도 없는 거죠? 제가 모르는 사람들하고 얼굴 마주치는 게 영 거북해서요.]
"그럼요. 말씀하신 대로 저 혼자 작업할 겁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가볼게요.]
"사람들이 다 퇴근을 해야 하니까, 밤 10시 정도가 어떨까 하는데요. 가능하시겠습니까?"
[10시까지 시간 맞춰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제가 그 시간에 회사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수빈씨.]
"네. 들어가세요."
수빈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관세청의 여왕이라..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하군. 아무튼 내일 밤 이번 영화 음악의 화룡점정을 찍어야지. 내일이면 길었던 작업들이 다 끝나겠군.'
잠시 후 수빈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밴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