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42 - 3
수빈은 홍보부 김대리를 만나러 회의실로 이동하는 도중, 급히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꺼내어 백성철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빈이냐? 지금 데리러 갈까?]
"아뇨. 형. 저 지금 회사로 다시 들어왔어요."
수빈의 말에 백성철 매니저가 살짝 화가 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너 또 택시 타고 온 거야? 나한테 연락을 하라니까. 내가 데리러 간다고 그랬잖아. 어떤 연예인이 너처럼 자주 택시를 타고 다니냐?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매니저 뒀다가 어디다 써먹으려고..]
잔소리가 길어질거 같아 수빈이 황급히 대답했다.
"미안해요. 형. 오늘은 제가 그럴만한 정신이 없었어요. 담부터는 꼭 연락드릴게요. 형.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말해봐. 나보고 먼저 퇴근하라는 소리는 빼고..]
"그런 거 아니에요. 형. 왜 생수 물통 있잖아요. 큰 거."
[20리터짜리? 사무실에서 쓰는 생수 물통 큰 거 말하는 거지?]
"네. 그거요. 그거 빈 걸로 3개만 좀 구해다 주세요. 저 집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가게요."
[그래. 알았다. 내가 구해서 책이랑 같이 차에다 실어 놓을 테니까 일마치고 다시 전화해. 제발 택시 좀 타고 다니지 마라.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할 일이 없어지잖아. 이러다 나 회사에서 잘리겠다.]
"에이. 누가 감히 형을 잘라요? 엄살이 많이 늘었는데요. 형. 어차피 그거 들고는 택시 타지도 못해요. 앞으로 택시 안 탈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그래. 꼭 다시 연락해라. 꼭이다.]
잠시 후 수빈은 회의실에서 홍보부 김대리와 단둘이 독대를 하고 있었다. 김대리가 정중한 태도로 열심히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이상 3가지 문제 때문에 강이사님을 뵙자고 연락드린 겁니다."
김대리의 말이 끝나자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큰 문제들은 아니군요. 처음 말씀하신 경매 건은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불우이웃에 기부를 해주시고, 구입해 주신 분과의 식사 건은 제가 담 주에 한번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매 금액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지정해주시면 제가 낙찰자분에게 직접 연락을 하겠습니다. 예상외로 낙찰 금액이 크다 보니 그쪽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좀 난처했었는데.. 강이사님께서 만나주신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밥 한 끼 하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요. 그 정도 금액을 쓰신 분이라면 같이 식사하면서, 제가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죠. 그리고 스페셜 앨범 때문에 일본에 가는 문제는 해바뀌고 가는 걸로 해주시죠. 연말이라 당분간은 시간 내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본에 있는 협력 업체에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근데.. 벌써 백만 장 가깝게 팔렸다고요?"
"네. 그쪽에서는 삼사일 내로 돌파할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만 장 돌파 기념으로 일본에 오셔서 사인회를 여는 게 어떨까라고 제의가 들어온 겁니다."
"스페셜 앨범이 생각보다 잘 팔리네요. 제 기억으로는 회의 때 오타쿠 층에서 구매를 좀 해주면 30만? 많으면 50만 장 정도 팔리지 않을까 예상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팔려나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본판 뮤란 싱글이 대박을 친 게 에리카 때문이었다면, 이번 스페셜 앨범이 빠른 시간 내에 백만을 찍게 된 건 다 지영이 때문입니다."
"리드 보컬인 지영이 때문이라고요?"
수빈의 질문에 김대리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일본 쪽 소식을 전혀 모르고 계시는군요."
"후. 요즘 내 코가 석자라..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스페셜 앨범에 신곡이 한 곡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그 곡이 실려있죠."
"네. 맞습니다. 제목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있어서, 실제 앨범에는 간단히 [구원(救援)]이라고 제목을 바꿔서 실은 곡이죠. 그 곡이 지금 일본에서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답니다. 노래 전반적인 분위기와 가사는 아주 다크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지영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묘하게 반전 매력으로 어우러져서 사람들을 빨아 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평입니다."
"지영이 목소리에 그런 묘한 마력이 있죠. 호소력 짙은 톤이라서 더 매력적으로 들릴 겁니다. 잘 됐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디젤사 CF 문제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회사를 하나 설립할 건데, 거기 첫 작품으로 CF를 찍을 생각입니다. 회사를 설립하려면 한주 정도는 더 있어야 돼요. 그쪽에는 제가 지금 열심히 콘티 작업 중이라고 둘러대시고, 앞으로 최소 2주 정도는 더 걸릴 거 같다고 말을 해놓으세요."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다른 사항은 더 없는 거죠?"
수빈의 질문에 김대리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강이사님. 이사님이 새로 세우시는 회사 말입니다."
"네. 영화사를 하나 세울 겁니다."
"거기에 사람은 안 필요하십니까?"
김대리의 말에 수빈이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회사를 옮기시게요? 좀 있으면 진급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굳이 YK를 퇴사까지 하시면서 직장을 옮기실 필요가 없을 텐데.."
수빈의 말에 김대리가 깜짝 놀라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저 말고요. 전 여기에서 계속 일해야죠."
"그럼?"
"제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혹시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취업이 가능할까 해서요."
김대리의 말에 수빈이 빙긋 웃었다.
"이제 보니 취업 청탁이로군요. 전공이 뭐 하는 친구죠?"
"영상 전문입니다. 대학도 그쪽으로 나왔고요. 자기 말로는 제법 잘 찍는다고 하는데.. 혹시 자리가 있으면 강이사님께서 면접이라도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 해서 부탁드립니다."
"그렇군요. 친척?"
수빈의 질문에 김대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저랑 친한 이모 아들입니다. 영화판에서 알바 형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는 거. 이모가 저보고 제발 취업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하셔서요."
"당장은 힘들 거 같네요. 일단 회사를 설립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그때 면접을 한번 보도록 하죠."
수빈의 말에 김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강이사님."
"앉으세요. 제가 면접을 보겠다는 거지, 뽑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시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이 높다는걸.."
"시간 내서 면접이라도 한번 봐주시는 게 어딥니까. 감사드립니다."
수빈은 김대리와 헤어지고 난 후 A&R 팀 사무실로 이동하던 도중 김해수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 수빈 동생 가고 나서 두 년이 회사로 찾아가는 문제로 대판 싸우길래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줬어. 아무도 안 찾아갈테니까 걱정 말고 열심히 일하렴. 다음에 한턱 쏴!
수빈은 문자를 읽으며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감격에 겨워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급히 김해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 최고급 소고기로 모시겠습니다. 누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주일 만에 변을 본 사람처럼 개운한 얼굴로,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빈은 A&R 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성호 혼자 남아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이성호가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오셨습니까? 강이사님."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스킨헤드에 험악한 인상의 이성호가, 산만한 덩치를 반으로 접으며 공손히 인사를 하자 수빈은 고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내가 조폭 두목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렇게 벌떡벌떡 안 일어나셔도 됩니다. 회사에서 이사 첨 봅니까? 여기 사무실 분들은 대체적으로 인사가 너무 과해요."
수빈의 말에 이성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은혜도 모르는 놈은 짐승이죠. 이사님 덕분에 다들 집에서 큰소리치면서 사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또 뭔가요?"
"이사님이 저작권 쪽에서 많이 양보를 해주신 덕분에, 앨범 작업에 참여했던 연주자 동생들도 제법 큰 돈을 만졌습니다. 얼마 전 스페셜 앨범도 대박 조짐이어서, 다들 잘하면 또 목돈을 쥘 수 있을 겁니다. 그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저에게 연락 와서 '형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직접 만나면 저에게 큰절을 합니다. 절 붙들고 엉엉 우는 놈까지도 있었습니다. 이게 다 누구 덕분입니까? 전적으로 강이사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밤길에 볼까 두려운 얼굴로 아부성 발언을 물 흐르듯 줄줄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성호를 보며, 수빈은 기묘한 부조화를 느끼며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간 수빈은 여자 허벅지 보다 훨씬 더 두꺼운 이성호의 팔뚝을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습니다. 너무 그러면 오히려 제가 더 불편해집니다."
잠시 후 자리에 착석한 수빈은 자신이 챙겨온 USB를 이성호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일 연습할 때 쓸 편집된 영화 영상이랑 악보가 들어가 있어요. 녹음실 안에서 연주자들이 영상을 보면서 연주할 수 있도록 미리 세팅 좀 해주시고, 악보도 사람 숫자에 맞춰서 복사 좀 해주세요."
두 손으로 공손히 USB를 받으며 이성호가 대답했다.
"걱정 마십쇼. 칼같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직 개봉 전인 영화라 외부에 유출되면 문제가 생기니까 잘 관리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그래요. 민석씨랑 팀장은 어디 가셨나 봐요?"
수빈의 질문에 이성호가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가를 실룩 실룩거렸다. 당장 사람 하나 산 채로 회를 칠 듯한 살벌한 미소를 머금고 이성호가 대답했다.
"민석이가 초사이언으로 변태해서 전자상가로 외근 나갔습니다."
뭔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은 수빈이 되물었다.
"네?"
"이번 녹음에 대비해서 장비를 점검하다가 맘에 안 드는 게 있다면서 전자상가에 알아보러 나갔습니다. 그놈이 갑자기 국내 최고의 음질을 구현하겠다고 큰 소리치더니, 온몸에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피어올랐습니다. 그러더니 초사이언으로 변해서 정팀장님을 잡아끌고 같이 외근 나갔습니다."
수빈은 미소를 띠고 살기등등(殺氣騰騰)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성호를 바라보면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수빈이 입을 열었다.
"...성호씨가 이제 보니 개그 감각이 아주 뛰어나시군요."
수빈의 칭찬에 이성호가 '헤'하고 멋쩍게 웃으며, 칭찬이 쑥스럽다는 듯 솥뚜껑 같은 손으로 텅 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자주는 안 하는데, 한번 할 때마다 다들 그렇게 칭찬을 해주더라고요."
수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렇겠지. 사실대로 말했다간 어떤 유혈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작아서 못 들은 이성호가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혼잣말입니다. 이거 민석씨 때문에라도 내일 기대가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볼일을 마친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성호가 따라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강이사님. 부탁드릴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민석이 말로는 석이 집들이할 때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 집을 새로 사서, 조만간 집들이를 할 생각인데.."
수빈이 이성호의 말을 잘랐다.
"불러만 주세요. 집들이 가는 게 뭐 힘들겠습니까."
이성호가 허리를 깊숙이 접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수빈은 백성철 매니저가 모는 밴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수기집결진을 들킬까 봐, 빈 물통을 집안까지 날라주겠다는 매니저를 간신히 만류하고선 혼자 집안으로 들어온 수빈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형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은데.. 집안에 여자라도 숨겨 놓은줄 오해하겠다. 이거 아무래도 나도 큰 집을 구해서 이사를 가야겠는걸."
책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20리터짜리 빈 물통에 물을 가득 받은 후 수빈은 수기집결진을 점검하였다. 그런 후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수빈은 일어나자마자 거실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