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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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다른 행동을 취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한 탓에, 앉은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수빈은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아리따운 세 여인이 회의실에 한데 모여서, 접시가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가루가 되도록 말다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해수 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억울하죠."
눈에서 독기를 풀풀 흘리며 최아림이 목청을 드높이자, 김해수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덩달아 큰 소리로 대꾸했다.
"억울? 네가 왜 억울한데? 수빈이 널 거기까지 억지로 끌고 갔니? 아니잖아. 네 차를 같이 타고 네 손으로 운전해서 간 거라면서. 그리고, 둘이서 스킨십을 나누다 네가 거부하니까 수빈이 바로 그만뒀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김해수가 수빈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강제로 계속한 것도 아니고,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니? 그럼 지금이라도 똑바로 말해봐."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안 되죠. 해수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때 차 안의 분위기나 수빈 저 인간이 말하는 걸 직접 못 들어봐서 그런 거예요."
최아림이 김해수의 말에 강하게 반박을 하자, 김샛별이 뿔이 잔뜩 났는지 눈에 화톳불을 밝히고서 잽싸게 끼어들었다.
"참 웃기네요. 자기가 숙맥이라 일어난 일을 왜 수빈 오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죠? 수빈 오빠랑 데이트하면서 뽀뽀하고, 키스하고. 스킨십하고.. 재미란 재미는 다 봐놓고선 왜 이제 와서 오빠 욕을 해요? 나이가 낼모레 서른이라는 분이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샛별의 발언에 아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서른? 야. 내가 무슨 낼모레 서른이니? 나 이제 스물둘이야."
아림의 말에 샛별이 콧방귀를 끼며 대거리를 했다.
"그런가요? 제 눈에는 우리 동네 아줌마랑 비슷하게 보여서 실수했네요. 전 이제 겨우 열아홉이라서요."
"어린 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너 말조심 안 할래?"
수빈은 세 여인들이 사납게 치고받는 걸 대책 없이 멀뚱멀뚱 지켜보다가 좀 전의 상황이 언뜻 떠올랐다.
최아림이 수빈을 보고 쌍욕을 터뜨리자, 김해수가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며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고 했었다. 그때 때마침, 수빈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김샛별이 회의실로 급히 뛰어들어왔다.
수빈은 세 여인 앞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그 당시의 사연을 가감 없이 털어 놓기 시작했다. 김해수는 수빈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끔씩 최아림에게 사실 확인을 하였다.
이윽고 모든 사정을 다 설명한 수빈은 최아림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아림이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수빈에게 계속 화를 내자, 김해수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문제니? 내가 보기엔 수빈이가 실수를 하긴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너에게 그런 욕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20대 초반의 피 끓는 젊은 남자가 데이트 도중에 그런 상황까지 갔으면, 당연히 진도를 더 뽑고 싶어 하는 게 정상 아니니? 그 상태에서 남자가 가만있음 그게 더 자존심 상하고 이상한 거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샛별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남자가 고자가 아니라면 그게 정상인 거죠. 그리고 본인이 싫다고 해서 오빠가 바로 중지했다잖아요. 그럼 아무 문제없는 거 아닌가요? 제 발로 만나서 데이트 잘만 하고선, 관계가 틀어졌다고 이제 와서 수빈 오빠에게 욕을 해대다니.. 전형적인 개념 없고 몰상식한 나쁜 여자 스타일 같은데요."
두 사람의 대화에 화가 치밀은 최아림이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나쁜 여자라니! 둘 다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본인들이 당사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 아닌가요?"
그때부터 시작된 말다툼이 어느덧 30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수빈은 참다 참다 도저히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서, 긴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내공을 운용했다. 그리고 힘차게 두 손을 부딪쳤다.
- 빠~악.
회의실을 뒤흔드는 거센 박수 소리에 세 여자가 깜짝 놀라며 수빈을 쳐다보았다. 수빈은 지쳤다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들 하시죠. 해수 누님이랑 샛별이가 절 옹호해주시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림이가 잘못한 건 없어요. 전적으로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아림이를 만날 때의 저랑, 지금 보시는 저랑은 많이 다릅니다. 성격도,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전혀 다른 인간이에요."
수빈은 아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림아. 네가 귀국해서 SN이랑 계약했다는 걸 난 미처 몰랐어. 그리고 해수 누님이 오늘 소개해주겠다는 사람이 너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난 오늘 여기 안 왔을거다. 널 불편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앞으로도 서로 대면하지 않도록 내가 주의를 할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날 일은 내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를 할게."
아림은 당당한 태도로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가면서, 자신에게 정중하게 다시 한번 사과를 하는 수빈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아림은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해수 언니가 한 말처럼 강제도 아니었고,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샛별이 말처럼 제 발로 걸어나가서 데이트를 즐긴 것도 사실이고, 제가 숙맥인 것도 맞아요. 당시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수빈씨의 사과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 같아요."
아림의 말에 수빈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아림아. 정말 고마워. 그럼 이제 밀린 일 얘기를 좀 해볼까요. 먼저 해수 누님?"
잠시 후, 아림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경악에 찬 눈빛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수빈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해수와 연말 연예대상의 MC로서 진행에 관련된 문제들을 능숙하게 풀어가고, 샛별과 CF 및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수빈을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림은, 마침내 이해하기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자 아림이 수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되겠죠?"
"그럼. 당연하지."
아림이 질문을 한다고 운을 떼자, 수빈이 살짝 긴장한 듯 회의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물을 들이켰다.
"내 젖가슴에 특징이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요?"
- 풉. 콜록. 콜록.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물을 뿜은 수빈이 사레에 걸린 듯 한참을 콜록거렸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샛별이 질투에 찬 눈빛으로 아림을 매섭게 째려보며 말했다.
"숙맥은 개뿔. 외국 투어한답시고 돌아다니면서, 완전 날라리가 다 되어서 돌아왔나 봐요."
아림은 시비조로 내뱉는 샛별을 가볍게 무시하고선 수빈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입장이 난처해진 수빈이 아림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야?"
수빈의 질문에 아림이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딴소리 마시고 일단 대답부터 해보세요."
수빈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밤, 남산 도서관 아래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잠시 후 낮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수빈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왼쪽이 살짝 함몰이야."
수빈의 대답에 아림의 눈빛이 이채를 발하며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한 듯 아림이 콧소리를 살짝 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흐응.. 그때 만났던 오빠랑,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오빠랑 동일인물인 건 확실하네요. 근데 분위기나 말하는 거나 너무 많이 변했네요. 오빠. 수빈 오빠. 내일 오후에 뭐 하세요?"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목소리가 돌변한 아림의 질문에, 수빈이 적응을 못하고 쓴웃음을 짓자 샛별이 재빨리 견제구를 날렸다.
"어머. 소새끼니 개새끼니 하면서 막말을 퍼붓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갑자기 웬 오빠 타령?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양심도 없으신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아림은 평온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샛별의 말을 가볍게 뭉개버렸다.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19세 어린이는 닥치고 가만히 있어. 수빈 오빠. 내일 오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거듭되는 아림의 질문에 수빈이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부터 이틀간은 회사에서 영화 음악 녹음 작업이 있어서, 아마 하루 종일 녹음실에서 살 거 같은데.."
수빈의 말에 아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영화 음악? 오빠도 녹음에 직접 참가하나요?"
"그럼. 내가 영화 음악 감독이니까 당연히 참가해야지."
수빈의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아림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급히 물었다.
"오빠가 영화 음악 감독이라고요? 월광과 비창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정말로?"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이 비창이고, 14번이 월광이잖아."
아림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빈을 향해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구나. 오빠가 음악 감독이구나. 오빠. 그럼 나 내일 오빠 녹음할 때 구경하러 가도 괜찮겠죠? 저도 명색이 피아니스트니까 혹시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도끼눈을 뜨고 귀를 쫑긋 기울여,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샛별이 급히 끼어들었다.
"저도요. 저도 내일 오빠 회사로 구경 갈게요. 방학이라 시간 많아요."
그동안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김해수가 한마디 던졌다.
"샛별이 넌 내일 오후에 정교수님에게 연기 수업받기로 약속되어 있지 않아?"
김해수의 말에 불현듯 내일의 약속이 떠오른 듯, 샛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러자 아림이 턱을 치켜들며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처럼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애들은 열심히 공부해야지. 공부에는 다 때가 있는 법 아니겠니? 어린 나이에 안 하면 언제 또 하겠어. 열심히 공부하렴."
샛별을 놀리는 듯한 아림의 발언에 김해수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다 적당히 좀 하지?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들이키지 말고.. 자꾸 그렇게 싸우면, 나도 수빈이랑 연애 한번 하자고 뛰어드는 수가 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뾰쪽한 목소리로 동시에 말했다.
- 언니! 수빈 오빠랑 나이 차이가 얼만지 아세요?
- 해수 언니! 언니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수빈은 '내 나이가 어때서?'라면서 두 사람과 투닥거리고 있는 김해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수 누님. 저녁은 다음에 하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내일 녹음 때문에 가봐야 할거 같아서요."
잠시 후 수빈은 쇼생크 탈출에 성공한 '앤디'처럼 감격스러운 얼굴로 SN 사옥 정문 쪽으로 걸어 나와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게 처 들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회사 밖으로 나온 수빈은 택시를 집어타고 YK 사옥으로 향했다.
YK 사옥에 도착한 수빈은 내일 녹음을 준비하기 위해 A&R 팀 녹음실로 이동하던 도중 홍보부 김대리의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