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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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박실장을 만나러 올라갔다. 박실장의 방에 들어가니 박실장이 초조한 얼굴로 방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왔는가. 맘이 진정이 안돼서 말이지."
박실장의 말에 수빈이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전문 투기꾼이 뭐 이 정도 일로 그러십니까. 사장 자리가 눈앞에 있다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시나 봐요?"
"농담 말게. 들어간 돈이 거의 4천억 가까이 되는데 안 떨릴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제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
"주식 시세를 확인 안 해보셨습니까?"
"어제 오후부터는 살 떨려서 차마 못 봤네. 내가 지켜본다고 주식 시세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액수가 많다 보니 어디 회사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 투자사에서 BJ. Ent.를 중심으로 적당히 알아서 분산 투자를 해놨겠지."
박실장이 수빈의 맞은편 의자에 착석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본다고 해봐야 BJ 그룹의 전체적인 추이만 살펴보는 거지. 그래서 그냥 마음을 비웠다네. 어제부터 이사회 소집하고 회의 준비하느라 바쁘기도 좀 바빴고.."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실장님은 이사회 구성원이 아니니까 직접 소집은 못하셨을 테고.. 누구 이름으로 이사회를 소집하는 겁니까? 미국에 계신 김사장님?"
"건강이 안 좋아서 손털겠다는 양반이 직접 하려고 하겠나? 나랑 같은 창립 멤버 중에 이사로 올라가 있는 놈 명의로 소집했지. 허준호라고 있어. 직책만 이사지, 회사 일은 관여 안 하고 날마다 골프나 치러 다니는 팔자 좋은 놈이 하나 있네."
"그럼 이사회는 언제 열립니까?"
"지금이 4시 좀 지났으니까 곧 열릴걸세. 5시부터 시작이야."
박실장의 말에 수빈이 살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요? 어제부터 준비하셨다면서요? 제가 주식거래는 잘 몰라도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잠깐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바로는 이사회를 열려면 일주일 전에 통보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원칙이야 그렇지. 하지만 이사 전원이 소집에 동의하면 절차 따위는 필요 없어. 바로 소집할 수 있다네."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이사 분들이 다들 동의한다고 하던가요?"
수빈의 질문에 박실장이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자기들이 동의 안 하면 어쩔 건데? YK 1대 주주로 올라설 내가 오더를 내리는데 '안됩니다'라고 거부할 간 큰 이사가 있을 거 같은가? 그랬다가는 바로 자기 목이 날아가는데? 이사 목숨은 원래 파리 목숨이야. 하루아침에 잘려도 찍소리도 못하는 자리가 그 자리라고."
"그럼 이사회 멤버들이 다들 오늘 참석하시는 겁니까?"
"나랑 친한 허준호 그놈만 오라고 해놨네. 의사록을 쓸려면 그래도 한 놈은 있어야 구색을 맞추지. 어차피 오늘 열리는 이사회는 주주총회를 소집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해. 주식회사에서는 주식 많은 사람이 장땡이야."
박실장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형식적이라고 해도 이사회에서 안건을 의결하려면 이사 과반수 출석과 출석 이사의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이사회 결의는 서면 결의나 대리 행사가 허용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 본인들이 직접 참석을 해서 의사 표시를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수빈은 말을 하던 도중 박실장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자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원칙에 불과하겠죠. 실제로는 다른 방법이 있겠군요."
"그런 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적용되던 거야.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회사로 직접 나오지 않고 전화나 화상으로 회의에 참석해도 상관없어. 그런 경우에도 직접 출석한 것으로 간주되지. 내가 이사들 보고 5시부터는 딴짓하지 말고 전화기나 핸드폰 꼭 붙들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미리 통보 해놨네."
"그렇군요."
"수빈군은 도대체 뭘 보고 공부한 건가?"
"인터넷으로 주식회사의 기본적인 개념만 좀 챙겨봤을 뿐입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은 잔뜩 사놨는데, 요 근래 도통 시간이 안나 서요."
"그런가? 앞으로 회사를 경영하려면 미리 공부 좀 해두게나. 공부해서 남주나."
박실장의 구박에 수빈이 고소를 짓고 있을 때, 박실장이 기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박실장이 흥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너무 웃었더니 배가 다 당기는군. 내가 수빈군에게 공부 좀 하라고 구박을 다 하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제발 좀 적당히 해라는 소리는 자주 들어봤었지만, 누가 저보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경우는 참 오랜만에 겪어 봅니다."
"이왕 공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수빈군은 대학에 진학할 생각 없나? 경영 쪽도 좋고, 영화 쪽도 좋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대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글쎄요."
"자네가 입학하겠다고 하면 어지간한 대학들은 다들 쌍수를 들어 반길걸세. 안되면 수빈군이 직접 시험을 봐도 될 걸고.. 그 머리로 공부하면 원하는 대학은 다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차피 올해는 이미 지났고.. 제가 내년에 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대학 진학 관련 이야기가 불편한지 수빈이 주제를 슬쩍 돌렸다.
"투자사에서는 언제쯤 연락이 옵니까?"
"주식장은 이미 끝났으니 지금 한참 정산 중일 거야. 곧 연락이 올걸세."
"이사회까지 소집하신 거 보니 김사장님 주식을 바로 넘겨받으시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오늘 YK 주가가 어떻게 됩니까?"
"자투리 떼고 10프로당 570억이야. 김사장이 550억에 넘기기로 했네."
"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깎아줍니까?"
"자네는 김사장을 잘 모르는군?"
"제가 언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어야지요. 영국 애들이야 김사장님이 직접 스카우트했다고 하니까 알 수도 있겠지만, 전 연습생 출신이라 오다가다 얼굴 몇 번 본 게 다입니다."
"김사장이 저 정도로 깎아준 건 엄청 깎아준 거야. 짠돌이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그렇군요."
그때 박실장의 핸드폰에서 문자 도착 알림이 울렸다.
- 띠리링.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물들었다. 박실장이 떨리는 손으로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박실장이 수전증이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손을 떨며, 염소처럼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수익률이.. 무려 29프로..라고 하는군."
수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암산을 하였다.
'원금 1,200억에 곱하기 3이였으니 3,600억을 투자했었지. 3,600억에 29프로의 수익이면 1,044억이군.'
수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수료 떼고 나면 천억 정도를 벌었겠군요. 깔끔한데요."
박실장은 수빈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핸드폰 액정만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수빈은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박실장을 불렀다.
"박실장님!"
수빈의 호출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박실장이 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신 차리시죠. 몇 시간 후면 시가총액 6천억짜리 회사 사장에 취임하실 분이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이것 참. 너무 큰 액수라 감당이 안 될 정도야. 그럼 나누면 어떻게 되는가? 이번에 투자한 원금이 자네가 700억이고 내가 500억이니까.."
수빈이 박실장의 말을 잘랐다.
"이번에는 제가 적게 먹는 걸로 하겠습니다. 제가 400억, 실장님이 600억으로 하시죠. 그래야 김사장님 주식 20프로를 인수하실 거 아닙니까? 20프로면 1,100억이니깐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래도 되겠는가?"
"네. 그래봐야 서로 반땅 하는 겁니다."
"이번에 내가 200억이나 더 많이 가져가는데도?"
"저번에는 제가 많이 가져갔으니까요. 실장님은 원금 500억에 오늘 수익금 600억을 합쳐서 1,100억이고요. 전 원금 700억에 수익금 400억을 가져가면 1,100억입니다. 정확하게 딱 반땅이죠."
"정말 그렇군."
"박실장님은 1,100억으로 김사장님 주식 20프로를 넘겨받으시고, 전 1,100억에서 550억으로 10프로를 넘겨받겠습니다. 남은 550억으로 10프로를 더 사고도 싶지만, 지금은 무리에요. 그 돈으로 영화사도 설립하고 건물도 사야 합니다. 새로운 영화 제작도 슬슬 시작해야 하고요."
수빈의 말이 끝나자 박실장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양손으로 마치 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문지르던 박실장이 심호흡을 몇 번 하였다.
"수빈군."
"네. 실장님."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고 있게나. 내가 작업을 다 끝내고 수빈군을 부르겠네. 그러면 이사회가 열리는 곳으로 오게나. 오늘 모든 걸 다 끝내야지."
"알겠습니다."
박실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박실장이 나가자 수빈은 느긋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서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박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준비가 끝났네.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사장실 알지? 사장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회의실로 오게나. 같이 마무리를 지으세.]
잠시 후 수빈은 사장실 옆에 붙어있는 회의실로 입장했다. 회의실 가운데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두꺼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옆에는 최고급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의자가 놓여 있는 자리들마다 스피커와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탁자 맨 상석에는 박실장이 후련한 얼굴로 수빈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쪽에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를 지은 농부처럼, 얼굴이 새까맣게 탄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양반이 날마다 골프나 치러 다닌다는 허준호 이사인가보군.'
박실장이 수빈을 손짓하여 자신의 옆에 앉게 하였다. 수빈이 자리에 착석하자 박실장이 마이크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자리에 있나?"
- 네. 사장님.
- 자리에 있습니다.
- 물론이죠. 사장님.
허이사도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도 있다네."
박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비서?"
그러자 스피커에서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사장님.
"녹음 잘 하고 있지."
- 네. 의사록 작업을 위해 녹음하고 있습니다.
"오케이."
박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로운 이사 선임을 위한 안건을 상정하겠네. 구질구질하게 설명할 필요 없겠지?"
- 네. 사장님.
- 필요 없습니다.
- 말씀만 하시죠.
"강수빈씨를 이사로 추대하는데 찬성하는 사람?"
- 김호영 찬성입니다.
- 박민규 찬성입니다.
- 정대호 찬성에 한 표 던집니다.
"허준호 찬성."
박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체 7인의 이사 중 4명이 참석해서 과반을 넘겼고, 4명이 찬성했으므로 찬성이 과반이 넘었네. 따라서 관례에 따라 지금 이 순간부터 강수빈씨는 이사로 추대되었네. 단, 법적으로는 주주총회를 통해야 하니까 본 이사회 의결 사항으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주총을 열겠네. 주총 소집 목적은 나 박동주의 대표이사 선임과 강수빈 이사의 선임이네. 그리고 회사 등기에 정식으로 올리도록 하겠네. 질문 있는 사람?"
- 없습니다. 사장님.
- 저도 질문 없습니다. 사장님.
- 저도 없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강이사님.
박실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아까 이야기를 잘 들었겠지만, 강이사는 YK 주식 지분 10프로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야. 그리고 강이사의 뜻이 곧 내 뜻이니까 다들 처신 잘 하게나. 괜히 나이 어리다고 까불다가는 집에서 손자나 보게 될 거야."
박실장이 수빈에게 말을 건넸다.
"한마디 하시게나. 강이사."
수빈이 빙그레 웃은 뒤 마이크에 대고 짧게 말했다.
"강수빈 이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수빈은 사장실에서 박사장과 허이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이사.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박사장님. 근데 바로 되는게 아닌가 보죠?"
"YK가 주식회사이지 않은가. 절차를 거쳐야지. 대표이사는 상근 임원중에 선출되는데 난 현재 이사 신분이 아니라서 주총을 통해야 하네. 그건 강이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런 건 다 요식 행위라네. 김사장이랑 나 그리고 강이사의 주식 합계가 50프로가 넘지. 그럼 다 끝난 거야. 그냥 이사회 의결 사항으로 주총 소집 공고를 내고 땅땅 두들기면 돼. 법적인 건 2 주 정도면 다 마무리될 걸세."
옆에 앉아 있던 허이사가 말을 보탰다.
"이사회던 주총이던 다 의미 없지. 주식 많은 놈이 대빵이니까. 근데 강이사에게 내가 궁금한 게 좀 있다네."
오늘 처음 만난 허이사의 말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든지 물어보시죠."
허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이사. 혹시 말이야. 불능인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