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41 - 1
수빈은 자신의 정면에 앉아 있는, 개성이 강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박감독의 조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카 분. 여기 포트폴리오에는 작성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지 않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박감독의 조카가 머뭇머뭇하더니 대답했다.
"오소라.. 요."
"박감독님이랑 성이 다르시네요?"
이런 자리가 영 어색한지 계속해서 쭈뼛거리는 오소라를 대신해서 옆에 있던 박감독이 급히 나서서 대답했다.
"큰 누님 딸일세."
"아. 그러시군요. 오소라씨?"
잘생긴 수빈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오소라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네."
"작성하신 포트폴리오가 아주 맘에 듭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작성한 게 맞으시죠?"
"네. 전부다 제가 직접 했어요."
"그럼 이 자리에서 저에게 설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군요?"
"물론이죠."
"그럼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하나하나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소라씨."
수빈의 정중한 부탁에 오소라의 눈빛이 갑자기 총기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은, 신명을 내며 포트폴리오에 적혀 있는 내용들을 하나씩 조목조목 집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오소라를 바라보며, 속으로 크게 감탄을 하고 있었다.
'돈에 대한 감각이 정말 남다르군. 촉이 아주 뛰어나.. 이것 참. 보유한 황금으로 산을 쌓는다는 중원상단의 상단주였던 금적산(金積山)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드는걸.'
수빈은 자신이 열심히 듣고 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허리를 살짝 구부리며 오소라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번 손을 대면 아무리 못해도 최소 네 배의 결과를 거둔다고 해서 사과(四果)요. 투자금의 아홉 배를 뽑을 때까지는 끝없이 수익을 갈구한다고 해서 구갈(九渴)이라. 사과구갈(四果九渴) 금적산의 재림(再臨)을 보는 기분이야..'
수빈은 전생의 기억을 얼핏 떠올리며 한참 동안 오소라의 설명을 경청하였다. 설명이 다 끝나자 수빈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오소라씨가 직접 작성한 이 포트폴리오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분석도 예리하고, 차후 활용 계획 방안도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 건.. 접근 방식이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창의적이라는 겁니다."
얼핏 들으면 아부라고 생각할 정도의 엄청난 칭찬에, 오소라의 얼굴이 사무실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활짝 피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어요. 왜 그런지 혹시 아십니까?"
질문을 던진 후 수빈은 어디 한번 대답을 해보라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소라를 쳐다보았다. 오소라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싸구려라는 점이에요."
"싸구려라.. 그게 무슨 뜻이죠?"
"이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데 들어간 모든 정보는 제가 인터넷에서 얻은 거예요.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짜 정보를 열심히 모아서 거기에다가 제 생각을 집어넣어 작성한 거죠. 제가 별로 여유가 없다 보니, 실질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들은 전혀 반영하지 못했어요. 그게 많이 아쉬워요."
오소라의 막힘없는 대답에 수빈이 살포시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을 좀 투자해서 포트폴리오를 보완해야겠죠."
"그러려면 얼마 정도의 자금이 소요될 거 같습니까?"
오소라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50만원 정도? 넉넉잡아 80만원?"
"그렇군요. 그럼 제가 100만원 정도를 투자하면 오소라씨가 말한 고급 정보를 얻어서 포트폴리오를 수정 보완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서류를 보완만 하면 끝입니까? 그러고 나면 모든 일이 다 끝나는 겁니까?"
수빈이 질문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오소라가 즉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자, 수빈이 슬쩍 입을 열었다.
"검증.."
그러자 오소라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 맞아요. 현장에 나가서 매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건물 상태나 주변 거리도 확인해봐야 해요. 유동인구도 알아봐야 하고 역이나 정류장까지의 시간도 직접 재 봐야겠죠. 그리고 관련 서류들도 꼼꼼히 체크해봐야 하고요. 거기에.."
수빈은 손을 들어 흥분한 오소라의 말을 잘랐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세세한 부분들은 오소라씨가 알아서 하시면 되는 거죠. 인터넷에서 얻은 싸구려 정보든 돈을 주고 구한 고급 정보든, 제일 중요한 건 사실 검증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일을 꾸미는 건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검증을 통한 취사선택 작업을 거쳐야만이 비로소 실제로 사용 가능한 정보로 탈바꿈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빈은 말을 하며 핸드폰의 메모장을 열어서 오소라에게 내밀었다.
"여기 오소라씨의 계좌 번호를 찍어주세요."
"제 계좌 번호요?"
"네. 제가 오소라씨 계좌로 일정 금액을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작업을 해서 포트폴리오를 한번 완성시켜 보시죠. 그래서 만약 오소라씨가 추천한 대로 제가 계약을 하게 되면, 오소라씨에게 작업 수수료로 1억을 지불하겠습니다."
난데없는 '억'소리에 오소라와 옆에 앉아 있던 박감독이 벙찐 얼굴로 수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수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혹시 공인 중개사 공부 때문에 작업을 할 시간이 없으신가요?"
오소라가 외마디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아뇨!"
그리고선 수빈의 핸드폰을 잽싸게 낚아채서 계좌번호를 빠르게 입력하기 시작했다. 오소라가 입력이 끝난 핸드폰을 수빈에게 다시 돌려주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시간 많아요. 아~주 많아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수빈은 핸드폰으로 잠시 뭔가를 입력하였다. 그런 후 오소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 오소라씨는 이쪽으로는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센스도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현장 경험이 좀 부족해 보여요."
수빈의 말에 오소라가 약간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럴 만한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딘가에 투자할 만한 돈이 수중에 있은 적도 없었고요."
"경험은 하다 보면 늘게 되어 있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투자금은 제가 냅니다. 최종 결정도 전적으로 제가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제가 집니다. 오소라씨는 본인이 잘하는 일만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수빈의 말에 오소라가 열정이 가득한 눈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 띵똥.
그때 오소라의 핸드폰으로 알림 문자가 날라왔다. 오소라가 확인을 해보더니 깜짝 놀랐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지금 제 계좌로 천만원이 들어왔는데요. 박동주씨가 보냈다는데.. 백만원을 보내려다 실수로 잘못 들어온 거 같은데요?"
"제가 은행 업무를 볼 시간이 안돼서 다른 분에게 부탁드렸습니다. 바로 들어간 게 맞습니다."
수빈의 대답에 오소라가 확인을 하고 싶은지 다시 되물었다.
"천만원을요? 백만원이 아니라요?"
"네. 천만원요. 활동비로 쓰시라고 드린 겁니다. 그걸로 현장을 확인하고 고급 정보도 사고 밥도 맛난 거 사드시고 하세요. 차가 있으면 기름도 가득 넣으시고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도 사서 쓰세요. 돈에 구애받지 말고 힘내셔서 작업하시라고 조금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오소라가 감동을 했는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소라씨. 이번 일은 안타깝지만 시간을 길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번 주에 영화사를 설립할 계획이기 때문에.. 5일을 드리겠습니다. 5일 후 오소라씨가 생각할 때 모든 게 완벽히 구비된 포트폴리오를 봤으면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오소라가 의욕이 충만하다 못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가능해요. 지금 바로 시작하겠어요."
오소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움직이려다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수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나온 학교나 과거 경력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런 건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살펴보는 건데, 이미 오소라씨는 자신의 능력을 저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궁금해할 이유가 없죠."
"그럼 제가 하고 다니는 꼴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없습니다."
"왜 그런 거죠? 사람들은 절 보면 다들 눈살을 찌푸리고 피하던데요."
"전 오소라씨의 개성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수빈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소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소라씨. 오소라씨가 지금 하고 있는 복장이나 남들이 볼 때 과하다고 생각되는 피어싱 같은 건 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스스로 알아서 바꿀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말이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정말로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걸 다 희생합니다. 복장 같은 건 아주 사소한, 정말로 사소한 거죠.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답니다."
수빈은 진정(眞情) 어린 눈빛으로 오소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소라씨. 전 오소라씨의 능력을 믿습니다. 5일 후 다시 만날 때를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빈의 말이 끝나자 오소라가 아무 대답 없이 눈가가 벌게져서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악물고 회의실을 나섰다. 오소라가 떠나자 수빈이 박감독에게 물었다.
"오소라씨에게 잘 나가는 오빠나 남동생이 있습니까?"
"있네. 오빠 되는 놈이 하나 있는데, 재학 중에 행시를 패스하고 내년 봄부터 과천에 있는 중앙 공무원교육원에서 연수를 받기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 나도 얼마 전에 누나에게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는 거야. 강감독은 어떻게 알았나?"
"뻔하지 않습니까? 오소라씨가 저러고 다니는 건 일종의 발버둥 같은 겁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의사 표현을 하고 있는 거죠. 제발 날 좀 봐달라. 나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 처절한 마음으로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누님이 너무 그놈만 감싸고도는 경향이 있긴 하지. 아들에 행시까지 패스를 했으니.. 소라는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고만고만했고 얼굴이 썩 이쁜 것도 아니고.."
박감독의 말에 수빈이 혀를 찼다.
"쯧.. 그래봐야 공무원에 월급쟁이죠. 이 나라는 뭔가가 잘못되어 있어요. 행시를 합격한 머리 좋은 인재보다는 오소라씨 같이 한 분야에 특출난 능력을 지닌 인재를 구하기가 천 배, 만 배는 더 어려운 법입니다."
"비록 내 조카기는 하지만.. 소라가 정말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가?"
박실장의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던지는 질문에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켜보시죠. 어떻게 될지."
오늘 이 순간이었다. 장차 수빈과 함께 한국 영화 산업에 뛰어들어서 국내 영화 배급을 한 손에 틀어쥐고, 영화인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오소라 공주라고 부르게 되는, 한국 영화계의 거물이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잠시 후 수빈은 포트폴리오를 옆으로 제쳐두고서, 자신의 영화사 설립에 필요한 서류와 [벨 스튜디오] 인수에 관련된 서류들을 차분히 검토하며 박감독과 토의를 해나갔다.
수빈은 박감독과 함께 근처 중국집에서 점심을 배달시켜 먹으며 마라톤 회의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도중 박실장의 급한 연락을 받았다.
오후 3시경, 수빈은 황급히 박감독과의 미팅을 끝내고서 YK 사옥으로 급히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