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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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뉴스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보며, 뇌리 한쪽 구석에 굳게 봉인해 놨던 올해 4월 5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2017년 4월 5일
화창한 봄날 아침 인기 아이돌 그룹 BBG는 KBC 여의도 별관에서 [뮤직뱅크]의 사전 녹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BBG가 사전 녹화를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최근 발표한 싱글 [급작스러운 러브 모드]가 인기몰이 중이어서 행사 스케줄이 급격히 늘어나 스케줄이 빡빡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생방송 중에 혹시 있을지 모를 BBG의 리더인 수빈의 방송 사고를 우려한 제작진의 궁여지책에 가까웠다.
몇 번의 NG 끝에 무사히 사전 녹화를 마친 BBG는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무대를 내려왔다. 대기실로 이동 중이던 BBG 멤버들은, 다음 사전 녹화를 위해 준비 중이던 2년 차 걸그룹 [슈가걸스]의 멤버 중에 한 명인 미정과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BBG의 다른 멤버들이 미정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나가는 반면, 수빈은 복도에 멈춰 서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미정에게 말을 건넸다.
"미정이 너 오늘 생일이라며? 생일 축하한다."
"오빠. 감사해요. 근데, 제가 생일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미정의 물음에 수빈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처럼 예쁜 애 생일은 당연히 기억해줘야 진정한 남자의 매너지. 미정이는 오늘 생파 계획 있니?"
"생일 파티요? 오늘 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만나서 하기로 약속은 되어 있어요."
미정의 말에 수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몇 시에 어디에서 하냐? 오빠도 가서 미정이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데."
수빈의 말에 미정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여고를 나와서 파티에 전부 여자애들만 올 건데요?"
수빈은 오히려 더 잘 됐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 생일 축하하는데 남녀가 무슨 상관이야."
잠시 미적미적 거리던 미정은 수빈의 따가운 눈총에 결국 입을 열었다.
"홍대 앞 [보스]라는 클럽에서 방을 하나 잡기로 했어요. 9시쯤 만날 거예요."
"그래? 알았다. 오빠가 9시까지 우리 미정이 생일 축하해주러 가마. 그때 보자."
"..네. 오빠."
미정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을 불며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는 수빈의 등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아. 재수 없게 발정 난 양아치 새끼랑 생파하게 생겼네. 친구들 모인 곳에서 사고라도 치면 골치 아픈데. 뭐 그래도 얼굴 하나는 끝내주게 잘생겼으니까 친구들이 더 좋아할 수도 있으려나.."
미정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하고선 마음을 비우고 몸을 돌려 슈가걸스의 대기실로 걸어갔다.
그날 밤 행사를 모두 마친 수빈은 백성철 매니저가 모는 밴을 타고 자신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수빈아. 밤에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푹 좀 쉬어. 내일도 스케줄이 빡빡해."
매니저의 당부에 수빈이 짜증을 내었다.
"거참.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요. 내가 앱니까? 하여간 말은 졸라 많아."
"그래. 알았다. 더 이상 잔소리 안 할 테니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아침에 시간 맞춰 와서 깨우기나 해요. 매니저는 그런 거나 잘하면 되니까.. 내말 알아듣겠어요?"
수빈의 말에 백성철 매니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수빈은 숙소로 들어가는 척을 하며 아파트 입구에서 매니저가 모는 밴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빈은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후 아파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택시를 잡아타고 홍대로 나온 수빈은, 오전에 미정이 알려준 보스라는 클럽 안으로 입장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미정의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는 널찍한 룸 안으로 들어간 수빈은, 십여 명 가까운 여자애들이 단체로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야. 오늘 물이 끝내주는데. 하나 제대로 건져서 재미 좀 봐야겠어.'
"오빠. 왔어요?"
수빈은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드는 미정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안녕. 친구들이 많이 왔네. 미정이가 인기가 많은가 봐."
"그럼요. 이제 아셨어요?"
"그래. 이제 알았다. 내가 생일 선물 사 올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어. 그 대신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
"어머. 고마워요. 오빠."
잠시 후 자리에 착석한 수빈은 룸 안에 있는 여자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러던 와중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조용히 앉아 있는 여자애를 발견했다. 삼단 같은 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앉아 있는 여자애의 콧날은 유달리 날카로워 만지면 손이 베일 듯하다.
'이쁜데.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니 연예인은 아닌 거 같고.. 뭐 하는 년이지?'
수빈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정을 툭툭 치며 물었다,
"야. 미정아."
"왜요?"
수빈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쪽에 말없이 새침하게 앉아 있는 년은 뭐 하는 년이냐?"
"오빠. 년이 뭐야. 년이.. 말 좀 곱게 해."
"아. 미안."
수빈이 가리키는 쪽을 힐끗 쳐다본 미정이 대답했다.
"쟤 몰라? 작년에 무슨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뉴스에도 막 나오고 그런 되게 유명한 앤데. 피아노 치는 애야."
"피아노를 친다고? 너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야?"
"아냐. 그런 친구는 아니고, 얼마 전에 알게 돼서 친해진 애야. 우리 앨범 녹음할 때 피디님이 피아노 반주 좀 해달라고 녹음실로 초청했었어. 원래 그런 자리에 쉽게 부를 수 있는 애가 아닌데, 피디님이랑 친척이어서 와준 모양이더라고. 그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그래? 이름이 뭐야?"
수빈의 질문에 미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오빠. 지금 쟤한테 작업 걸려고 그러는 거지? 그러지 마. 쟨 그냥 일반인이야. 나같이 발랑까진 날라리가 아니라고. 순진하고 착한 애야. 여태껏 남자란 모르고 평생 피아노만 끼고 살은 애란 말이야."
미정의 말에 수빈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성질을 부렸다.
"야. 이년아. 내가 뭐 쟤를 잡아먹기라도 하냐? 그냥 인사나 하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려고 그러는 거지. 이름이나 빨리 알려줘봐."
잠시 후 수빈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여자애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안녕. 최아림. 미정이 친구라며? 난 수빈이라고 해."
최아림이라고 불린 여자애가 악간은 긴장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수빈은 봄날의 눈부신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피아노가 전공이라며? 혹시 나 알아? 나도 음악을 하고 있는데.."
"네. 알아요. BBG의 리더시잖아요."
"날 아는구나? 그럼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최아림은 잠시 대답을 주저하더니 수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광채가 나는 듯한 수빈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최아림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네.. 저도.. 좋아요.."
그날이 수빈과 최아림의 첫 번째 만남이 있던 날이었다.
-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과 양장피가 실린 카트를 밀며 들어온 웨이터의 말에 수빈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날 밤 정해진 스케줄을 모두 끝마친 수빈은 매니저가 모는 밴을 타고 숙소 앞에 도착했다. 갑자기 내리는 겨울비로 박실장에게서 받은 동충하초가 행여나 젖을세라, 수빈은 조심스럽게 동충하초가 담긴 보따리를 품에 안고서 비를 피해 아파트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수빈이 막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발을 한발 디뎠을 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수빈씨. 저 SBC 방송국의 서수만 피디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일전에 말씀드린 SBC 연예대상 MC 있잖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같이 진행하실 여성 MC가 결정돼서 급하게 연락드렸습니다. 이제 열흘도 채 안 남아서 두 분이 빨리 만나셔서 의논을 해보셔야 할거 같은데요.]
"누구로 결정되었나요?"
[영화배우 김해수씨 아시죠? 김해수씨에게 제가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요? 의외네요. 김해수 선배가 용케 승낙을 하셨네요."
[이번 연예대상은 품격을 좀 높여보려고 제가 백방으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힘들게 허락을 받아냈어요.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양쪽 매니저를 통해서 두 분의 스케줄을 알아봤습니다. 두 분 다 모레 그러니까 수요일 오후에 시간이 비시더라고요.]
"그런가요?"
[네. 수요일 오후 1시쯤 수빈씨가 SN으로 가셔서 만나시면 될 거 같은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두 분 매니저들에게 그렇게 통보해 놓겠습니다. 두 분이서 만나셔서 오프닝 무대를 어떻게 꾸미실 건지 구상을 잘 좀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빈은 전화를 끊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연예대상 오프닝 무대로 뭘 해야 좋으려나. 너무 격식을 차리면 참석자들이 예능인들이라 오히려 싫어할 건데.. 해수 누나랑 의논을 해봐야겠군."
수빈은 한시라도 빨리 네팔의 청정지역인 히말라야산맥 4,500 고지에서 채취했다는 동충하초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에 몸을 부지런히 놀렸다. 부엌에서 십여 개의 사기그릇과 물통을 들고 나온 수빈은, 그릇과 물통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동충하초가 담겨있는 보따리를 열었다.
수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따리 안을 바라보았다.
'기(氣)가 충만하군. 아주 좋아. 약재상에서 파는 약초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야. 이 정도면 영약(靈藥)까지는 몰라도 상약(上藥)은 충분히 되겠어. 제대로만 뽑아 내면 굳이 전방 철책 근무를 지원 안 해도 되겠는데..'
수빈은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려 집중하면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동충하초를 골라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준에 미달하는 약초들은 바로바로 솎아내면서 그릇 당 10개 정도를 담았다. 그런 후 물통을 들고 그릇에 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부었다.
수빈은 거실 한가운데 물만 담겨있는 그릇을 놓고 그 주위를 동충하초가 담겨 있는 그릇들을 세 겹의 둥근 띠 형태로 놓기 시작했다. 방위를 정확하게 계산하며 수기결집진(水氣結集陳)을 완성해 나가는 수빈의 이마에는 긴장으로 인해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 후 수기집결진이 다 완성되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수빈은 팔괘 형태의 진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제대로 쳤군. 기를 제대로 뽑으려면 하루는 넘게 묵혀야겠지. 수요일 아침 운기토납을 하기 전에 복용하면 될 거야. 내 예상대로라면 대주천을 1년 내에 달성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지 그날 먹어보면 알겠지."
수빈은 뿌듯한 얼굴로 샤워를 하러 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수빈은 TV를 켰다. 11시 나이트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잠시 후 뉴스에서 최아림의 입국 소식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이미 봉인이 풀린 탓인지 기억을 수월하게 떠올리며 수빈은 자연스럽게 상념에 또 빠져들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지.'
수빈은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