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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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YK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홍보팀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옥 3층에 위치한 홍보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10여 명 가까운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빈이 김시후 대리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홍보팀 직원들의 이목이 수빈에게 일제히 쏠렸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김대리가 벌떡 일어나 열심히 양손을 흔들었다.
수빈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대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대리님 자리가 여기군요."
"네. 그렇습니다. 자리가 비좁고 누추합니다. 다른 회의실이나 박실장님 방에서 뵙자고 했는데 굳이 오시겠다고 하셔서.."
"괜찮습니다. 홍보팀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서 제가 여기서 뵙자고 한 거니까요."
"자리를 뒤쪽으로 옮기시죠. 제 뒤에 있는 방이 팀장 사무실이니까요."
잠시 후 사무실 소파에 앉은 수빈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신 모양이네요?"
수빈의 질문에 김대리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한때 수빈씨가 회사 내부 소식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사실이군요. 올 초에 큰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홍보팀장 자리는 지금 공석입니다."
"큰일요?"
"대선(大選) 말입니다. 그때 홍보팀장이 후보자 캠프에 영입돼서 퇴사하셨습니다."
"아. 그럼 그분은 지금 청와대에?"
"아뇨. 그쪽 캠프 후보자가 당내 경선에서 져서 4년 후를 노리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팀장은 새로 안 뽑나요?"
"내년 2월 말 인사이동 때 새로 뽑힐 겁니다."
김대리가 쑥스러운 듯 넥타이를 매만지며 이어 말했다.
"아직 발표는 안 났지만, 아마 제가 승진해서 팀장 자리에 앉게 될 거 같습니다."
"호오. 그래요? 잘 됐군요. 이거 미리 축하드려야겠습니다."
"뭘요. 제가 승진을 하는 건 전부다 수빈씨와 박실장님 덕분인걸요. 사실 요즘 회사에서 박실장님 파워가 굉장하지 않습니까? 박실장님이 제가 수빈씨랑 손발이 비교적 잘 맞는다고 판단하셨는지 절 적극적으로 밀어주셨습니다."
"그랬나요?"
김대리가 허리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에 박실장님께 살짝 언질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김사장님은 은퇴하고, 김사장님 지분을 박실장님과 수빈씨가 나눠서 인수할 계획이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김사장님 라인들은 모두 내보내고 회사를 새롭게 재편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미 그분들은 나이도 다들 지긋하시고 은퇴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저 같은 젊은 피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할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김대리가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김시후 앞으로도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 하겠습니다. 박실장님과 수빈씨가 가시는 길에 부디 끝까지 동참시켜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대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덩달아 일어난 수빈은, 허리를 숙인 김대리를 붙잡으며 급히 말했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당황스럽네요. 일단 다시 앉으시죠."
수빈의 만류에 자리에 앉은 김대리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 들으신다고요? 농담이시죠? 박실장님도 수빈씨 눈치를 보면서 일을 진행한다는 걸 사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이야기를 수빈씨와 의논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김대리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현재 행정 파트 쪽으로는 홍보팀에 있는 저랑 법무팀 김대리, 재무회계팀 강과장, 전산실 박팀장 그리고 가수팀 관리 파트 쪽으로는 A&R 팀 정팀장과 팀원들 그리고 신인기획팀 조실장과 팀원들을 수빈씨 직속 라인으로 생각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배우들을 관리하는 라인이 빠지긴 했는데, 그쪽은 이미 박실장님이 꽉 잡고 계시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죠."
김대리가 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사실 지금 현재 상태에서도 이미 회사 주요 부서들에는 수빈씨와 박실장님의 직속 라인이 다 짜여 있는 걸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허참. 이거 당황스럽네요. 일단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나누도록 하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이런.. 제가 너무 앞서간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디젤사 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건 필요 없습니다. 김대리님이 나라면 어떡할까 고민을 하며 협상을 하셨다고 하니.. 간단하게 결론만 말해보시죠."
"네. 제가 파악한 수빈씨 성격으로는 공돈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한 만큼의 대가는 확실히 챙겨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빈은 말을 마친 김대리가 자신의 눈치를 보자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서 제가 정명석 홍보이사와 단판을 지었습니다. 디젤사에 부담이 될 수 있으니 계약금이나 출연료를 이전보다 더 올려서 받을 생각은 없다. 그 대신! 수빈씨가 출연한 CF로 인해 유의미한 매출 증가를 봤으면 거기에 알맞은 대가를 지불해라. 그게 정당한 비지니스라고 말했습니다."
"잘하셨네요."
수빈의 칭찬에 힘을 받았는지 김대리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6개월짜리 CF를 찍고 CF 방영 후 6개월간 매출이 증가했다면 증가한 매출액 중 10프로를 내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정이사가 별 고민 없이 동의하더군요. 어차피 자신들이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좋네요. 아주 좋습니다. 단 지금 김대리님이 하는 말씀 중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습니다. 그것까지 파악을 하고 협상을 하셨다면.. 제가 이번 계약에 관해서 김대리님에게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어디 한번 정답을 말해봐라는 듯 수빈이 김대리를 쳐다보자 김대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일 중요한 건 이전 CF 계약 때 수빈씨가 제대로 된 대가를 못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CF 계약에서 제일 중요한 건 기준으로 삼는 매출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6개월간 유의미한 액수의 매출액을 산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매출액은, 반드시 이전 CF를 찍기 전의 매출액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 짝짝짝.
수빈이 정답이라는 듯 힘차게 박수를 쳤다.
"이거 김대리님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나신데요.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공돈은 원치 않지만 해준 것만큼의 대가는 확실히 챙겨야죠. 오늘 몇 시에 미팅이 잡혀있죠?"
"1시 반에 잡혀 있습니다."
"전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전권을 드릴 테니 김대리님이 법무팀과 함께 가셔서 저 대신 계약을 체결하세요. 적당한 선에서 알아서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김대리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수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대리님. 좀 앉으세요. 자꾸 벌떡벌떡 일어나서 사람 놀라게 하지 마시고.."
잠시 후 수빈은 콘티북 경매 진행사항과 뮤란 스페셜 앨범 판매 현황 등 소소한 사항 등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후 홍보팀장 사무실에서 나왔다. 김대리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홍보실을 나선 수빈은 A&R 팀을 방문했다.
수빈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정팀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수빈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정중한 정팀장의 인사를 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정팀장까지 이러는 거 보니 주말 동안 틀림없이 뭔 일이 있었군.. 내가 뮤비에 신경 쓰는 동안 뭔 일이 터진 거지? 아무래도 빨리 박실장님을 만나봐야겠어.'
수빈은 의자에 앉으며 슬쩍 물어보았다.
"박실장님에게 이야기 좀 들으신게 있습니까?"
수빈의 질문에 정팀장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여기 온건 정팀장님에게 부탁드릴게 있어서 온 겁니다."
"말씀만 하시죠."
"제가 조만간 영화 음악을 녹음할 건데 그때 필요한 연주자들을 좀 섭외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정팀장님이 잘 아실거니까요."
"어떤 연주자들이 필요하십니까?"
"베이시스트 4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사물놀이팀 1팀이 필요합니다. 작업 일정은 이틀이고 연주비는 제가 섭섭지 않게 드린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최고의 팀으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일정이 정해지면 저에게 말씀해주시죠."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어디 가셨나 봐요? 두 분 다 안 보이시네요."
"아. 둘 다 오늘 쉽니다. 스페셜 앨범도 끝났고 해서, 급한 일들 처리하라고 오늘 하루 휴가를 줬습니다."
"급한 일요?"
"네. 지금쯤 아파트를 알아보러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며칠 전에 정산을 또 받았거든요. 수빈씨 덕분에 목돈이 생기다 보니, 둘 다 전세 빼고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가고 싶어 해서요. 그래서 제가 오늘 하루 휴가를 줬습니다."
"좋은 소식이군요. 팀장님은 이사 안 가십니까?"
"전 아무래도 애들이 나이가 있다 보니 학비로 쓸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자가라서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수빈씨 덕분에 저희 A&R 팀 전원이 하루하루 기분 좋게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회사 출근하는 게 즐겁다고 말합니다."
"별말씀을요."
정팀장이 수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건 수빈씨가 저희 팀에게 많은 걸 양보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앞으로도 A&R 팀 전원은 뼈가 부러질 각오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저희들을 믿고 맡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수행하겠습니다."
A&R 팀을 나온 수빈은 빠른 걸음으로 박실장의 방으로 향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양반이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에게 의논도 없이 주말 새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지?'
수빈이 박실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실장이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빈을 발견한 박실장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반갑게 입을 열었다.
"왔는가. 안 그래도 언제쯤 찾아 올려나 기다리고 있었네."
수빈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터졌길래 이렇게 급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겁니까? 이 정도면 회사 내에 벌써 소문이 다 돌았을 거 같은데요."
"저번 주에 자네랑 이야기를 한번 나누었지 않은가? 그 뒤에 내가 김사장에게 운을 한번 떼보려고 전화를 했었지. 주식을 넘길 생각이 있냐고 말이야. 그때 김사장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겠다고 대답을 했었네. 그런데 말이야."
박실장이 잠시 시간을 끌은 다음 말을 이었다.
"토요일에 급하게 전화가 왔었네.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군. 지분을 넘길 테니 최대한 빨리 인수해가라고 나보고 오히려 닦달을 하더군."
"김사장님이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돈이 모자란 분이 아니잖습니까?"
박실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강이 안 좋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안 좋은가 봐. 다 넘기고 모든 일에서 손 떼고 싶다는군. 가끔 한국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고 토로하더군."
"그렇게까지 안 좋은 상태입니까?"
"김사장 나이가 이미 환갑이 훌쩍 넘었어.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평균 수명이 증가해도 세월엔 장사 없는 거지. 예전 같았음 밤새 안녕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 아닌가? 이제 그만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더군."
"그렇다고 해도 지분 40프로를 인수하려면 최소 2천억이 필요합니다. 그럴만한 자금이 없지 않습니까?"
"일단 30프로만 인수하기로 했네. 그리고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기로 말을 맞췄어. 김사장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네."
"30프로라고 해도 천오백억이나 되는데요?"
"그렇지. 천오백억이지. 내가 20프로 자네가 10프로 인수해야지. 둘이 합치면 40프로로 최대 주주야. YK가 우리 손에 떨어지게 되는 거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수빈군은 회사 등기부등본에 이사로 등재될 거야."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 차 있는 박실장의 말에 수빈은 언뜻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BJ 그룹 주가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박실장이 옆에 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조금 전까지 열심히 주식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네."
수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박실장의 입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