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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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예종에서 오디션을 끝마치고, 수빈은 박실장을 만나러 다시 YK로 돌아갔다. 박실장의 방에 도착하니 박실장과 법무팀 조대리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쌓아 놓고 열심히 검토를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수빈의 말에 박실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수빈군. 왔는가. 이거 SAT 영화 제작과 관련된 서류라네. 대기업이라 그런지 서류들이 아주 꼼꼼하게 잘 구비되어 있구먼. 촬영지 헌팅부터 배우와 스태프 캐스팅 및 계약, 비행 일정, 숙박 호텔 선정, 촬영 협조 관청. 관련 자금 지출 계획서 등 이거 제작비만 준비되면 바로 영화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야."
수빈이 의혹 어린 눈길로 물었다.
"그런 서류를 왜 실장님이 보고 계십니까? 설마.. 오늘 가셔서 얻어 오신 건가요?"
"맞네. 자네가 써준 관상명정 값이라면서 이태우 회장이 우리 쪽에 건네준 거라네."
수빈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실장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명정 값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지. 내가 보기에는 이건 돌아가신 정회장님의 뜻이야. 자신이 쓰러지면 영화가 엎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자네에게 넘기라고 유언을 남긴 모양이야."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던가요?"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하지. 내가 아까 말했잖은가. 관상명정 값이라면서 넘겨 준거라고.. 내가 갔을 때 BJ. Ent.에서 일하는 김성희가 와 있었어. 아마 그 친구가 회사에서 서류 일체를 미리 챙겨온 거 같더라고."
"그럼 우리 쪽에서는 그냥 이 서류를 받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지. 영화 각본 및 대본에 관한 권리 인수 대금을 지불하고 각서를 작성해서 그쪽에 건네줘야 한다네."
박실장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서요? 인수 대금이야 그렇다 치고 난데없이 웬 각섭니까?"
"향후 5년 이내에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각서를 써야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박실장님이 쓰고 오셨습니까?"
"내가? 내가 왜?"
황당한 표정으로 수빈이 물었다.
"그럼 누가 씁니까?"
"당연히 자네가 써야지. 정회장이 날 보고 이걸 넘겨주라고 했을 거 같은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지. 당연히 자네를 보고 넘겨준 거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각서를 써야지."
수빈은 법무팀 조대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각서가 법적 효력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각서를 쓰고 5년 내로 제작을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나요?"
조대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각서는 법적인 구속 효력이 없으니까요."
수빈이 박실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작성하라는 거죠?"
"자네 같은 친구는 각서를 쓰면 어떡하던 지키려고 할거 아닌가. 그래서 정회장이 받으라고 한 모양이야. 그럼 지금 당장에는 영화가 엎어지더라도, 차후에 자네가 반드시 제작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야. 정회장이 자네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거지. 전부 다 내 추측이긴 하지만.."
"후. 알겠습니다. 인수 대금은 어떡하셨습니까?"
"그 자리에서 내가 지불하고 왔네."
"저도 보태겠습니다. 얼마를 달라고 하던가요?"
"만 원."
수빈은 본인이 잘못 들었는지 되물었다.
"...네?"
"만 원이라고."
"..농담이겠죠?"
"진담이네. 그냥 넘겨주면 회계처리상 문제가 발생해서 얼마라도 판매 대금을 받아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이회장이 만 원만 달라고 하길래 그 자리에서 내가 지갑에서 꺼내서 주고 왔네."
수빈이 허탈해 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참.. 결국은 우리 손으로 영화를 제작하라고 정회장님이 그냥 공짜로 넘겨준 거네요."
그 말을 듣고 박실장이 말했다.
"맞아. 그냥 넘겨준 거야. 정회장이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자네 손에 맡긴 거지. 자네가 쓴 각서도 관속에 같이 넣을 거라고 하더군."
"이것 참.. 영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회장님이 귀신이 되어서 밤마다 절 찾아올 거 같은데요."
"잘하면 되지."
"박실장님. 본인 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나도 열심히 도울걸세. 뭐 그렇지만 잘못된다고 해도 귀신이 설마 나에게까지 찾아오겠어? 난 그냥 마음이 좀 편한 거뿐이지."
"후. 알겠습니다. 각서야 쓰면 되죠."
수빈은 조대리가 건네주는 A4 용지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짧게 몇 줄 적었다.
- 5년 이내에 반드시 영화를 찍겠습니다.
- 男兒一言重千金(남아일언중천금)
수빈은 각서를 조대리에게 건네주며 생각했다.
'어차피 나의 각오를 보여주는 거면 이 정도로도 족하지.'
조금 있다 조대리가 서류뭉치들을 챙겨서 떠나고 둘만 남자 박실장이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사무실에서 저녁이나 먹으면서 반주나 하자고. 날도 추운데 밖에 나가지 말고."
"그러시죠."
"대금은 내가 지불했으니 저녁은 자네가 사게나."
잠시 후 탁자에 깔려 있는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등을 쳐다보며 수빈이 한마디 했다.
"인수 대금의 몇 배는 되겠군요."
수빈의 농에 박실장이 웃으며 물었다.
"어떡할 건가?"
"뭘 말입니까?"
"영화 말일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지 않은가. 영화를 찍을 자금도 지금 충분한 상태고.. 찍으려면 지금이라도 바로 찍을 수 있네. 봉감독에게 부탁을 해도 되고 자네가 감독을 해도 되겠지."
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무립니다. BJ라는 회사가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거랑은 상황이 다르죠. 이런 상황에서는 봉감독도 안 찍으려고 할 겁니다. 저도 아직은 그럴만한 역량이 못되고요."
"그럼 언제쯤 찍을 생각인가?"
"일단 제가 감독으로서 제작 경험을 좀 가져야 합니다. 국내에서 입지도 좀 다져야 하고요. 아무리 제작비를 많이 들여도 신인 감독이 찍은 영화라고 배급사에서 비토를 놓으면 흥행에 참패할 겁니다. 제가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위치까지 도달을 한 다음에 찍을 생각입니다."
박실장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정회장이 반년 아니 한 달만 더 살았더라도 좋았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야."
수빈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제작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수빈군이 일전에 말한 동충하초는 조만간 회사로 배달이 될걸세. 일단 최상급으로 구해서 조금 보내달라고 부탁을 해놨네."
"감사합니다. 상태가 어떤지 일단 살펴보고 제가 대량으로 구매를 하든지 하겠습니다."
"그럼세. 더 필요하면 말하게. 내가 대량으로 주문을 넣을 테니.."
"주문하신 동충하초 약초 대금은 어떻게 할까요?"
박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팔보채랑 퉁 치세나."
"알겠습니다."
"오늘 오디션 본다고 한건 잘 끝났나?"
박실장의 말에 수빈은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대예종 학생들이 지금쯤 절 열나게 씹고 있을 겁니다."
"뭔 일 있었나?"
"제가 뒤끝이 좀 있지 않습니까? 거기 이교수에게 당한 게 있어서 저도 오늘 가서 성깔 좀 부리고 왔습니다."
"어떻게 했길래?"
"가보니 바이올린 전공 학생들이 30명이나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학생들에게 단체로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그걸 3번 연달아 연주를 시켰죠. 그러고 15명을 탈락 시켰습니다."
수빈의 말에 박실장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젓가락 두짝이 똑같아요~ 그걸로 15명을 잘랐다고?"
"네. 그때 현장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죠. 나름 뛰어난 연주자라고 자부하는 학생들이 납득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보통 때라면 제가 탈락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을 건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잘랐으니까요."
"제대로 엿을 먹인 거 같은데?"
"뭐 받은 대로 갚아줬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다음 남은 15명 보고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연주를 시켰죠. 그리고 다시 10명을 잘랐습니다."
"아주 잘 하는 짓이군. 지금쯤 학생들이 자네를 아주 잘근잘근 씹고 있겠구먼."
"처음에는 이교수도 학생들처럼 열이 받아서 절 잡아 쳐죽일 기세였었는데.. 나중에는 납득하더군요."
박실장이 의문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남은 5명이 에이스 중에 에이스였으니까요. 나중에는 저보고 어떤 방법으로 골랐냐고 물어보더군요."
"호오. 그래서 뭐라고 했나?"
"안 알켜준다고 했습니다."
"허어.."
"안 그래도 열심히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져서 짜증이 나 있는 판에, 이교수가 절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제가 화가 많이 나있는 상태였거던요."
"그래서?"
"나머지 5명은 다 합격시켜서 조만간 녹음을 할 때 부르기로 했습니다. 실력이 비슷비슷해서 한 명을 자르기가 애매해서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고른 건가?"
"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처음에 '똑같을까'를 연주할 때 바이올린을 잡는 자세, 활을 켜는 자세, 튜닝 상태, 음색 그리고 얼마나 레가토에 충실하게 연주하는가를 봤죠."
"..뭔 소린가?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을 해주게나."
마치 앙탈을 부리는듯한 박실장의 말에 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실장님. 영어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뭔지 아십니까?"
"play the violin? 뭐 보통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나?"
"맞습니다. 플레이를 쓰죠. 운동을 하다랑 똑같은 동사를 씁니다. 그 말은 결국 스포츠랑 악기를 연주하는 거랑 똑같다는 거죠. 즉, 폼생폼사라는 겁니다. 둘 다 올바르고 정확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폼이 안 좋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가 없어요. '똑같을까'가 비록 동요이기는 하지만 연주할 때 자세를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옵니다. 거기에 레가토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까지 살펴보면 쭉정이들은 금방 다 걸러낼 수 있습니다."
"레가토가 뭔가?"
"연주를 할 때 음과 음 사이를 끊지 말고 원활하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똑같을까' 노래를 부를 때 무! 엇! 이!처럼 딱딱 끊어서 부르지 않고 무~우 어~엇 이~ 이렇게 음을 연결해서 부르잖아요. 그게 레가톱니다."
수빈은 술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실장님.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말입니다. 현존하는 악기 중에서 음을 지속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악기에요. 다른 악기에 비해서 여러 음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악기인데, 그걸 제대로 못하면 바이올린을 켤 줄 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그렇군. 그럼 나머지 10명은 무슨 기준으로 탈락 시킨 건가?"
"'학교종'은 대표적인 스타카토 형태의 노래죠.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학! 교! 종! 이 땡! 땡! 땡! 이렇게 딱딱 끊어서 부르잖아요. 그 느낌을 얼마나 잘 살리나를 봤죠. 그리고 '똑같을까'는 3/4박자고, '학교종'은 4/4박자 노래입니다. 박자 감각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확인해 봤죠."
"두 노래가 그런 차이가 있는 거였군. 그걸로 에이스를 골라 뽑은 모양이구먼."
"물론 제가 자른 학생들 중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자세로 독특한 음색을 내며 연주를 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솔리스트를 해야 맞는 거죠. 제가 원하는 건 합주자라서 불가피하게 잘랐습니다."
"그럼 언제 녹음을 할 건가?"
"제일 구하기 힘든 클래식 쪽 연주자들을 싼값에 구했으니 한고비 넘겼죠. 나머지는 비교적 구하기 쉬워서 아마도 다음 주 중이면 녹음이 다 끝날 거 같습니다."
"수빈군이 참 고생이 많아."
"뭐 영화가 잘되면 저도 인센티브로 돈 좀 만질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야죠."
"사람들이 많이 볼 거 같은가?"
"느낌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개봉을 해봐야 알겠죠."
"그렇겠지. 그럼 대박을 기원하며 한잔하세나."
수빈은 박실장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밴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KBC 방송국의 박지연 피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수빈씨. 그때 말한 조건을 수용하겠어요.]
"감사합니다. 박피디님."
[그 대신 수빈씨가 3번 출연해주셔야 해요. 프로와 상관없이요.]
"알겠습니다. 어떤 프로라도 박피디님이 부르면 달려가겠습니다. 설사 갯벌이라도 쫓아가서 제가 마구 뒹굴도록 하겠습니다."
[설마 수빈씨를 그런 프로에 부르겠어요? 그러기에는 수빈씨가 너무 아깝죠. 프로가 정해지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전화를 끊고 수빈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성형과 관련된 편집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샛별이가 활동하는데 걸리는 게 없겠군. 그렇다면 뮤비를 출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다음 날 토요일 아침부터 수빈은 [벨 스튜디오]로 나가 하루 온종일 [디스패치] 뮤비의 마무리 작업을 하였다. 그런 후 일요일 아침 BBG의 디스패치 뮤비가 YK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전격적으로 올라갔다.
월요일 오전 수빈은 홍보팀 김대리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