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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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을 통해 저택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수빈의 앞을 막아서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 슈트 차림에 깍두기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깎고, 납작하게 뭉개진 귀에 리시버를 꼽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한 손을 치켜들며 수빈에게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잠시 몸수색 좀 하겠습니다."
대문 안쪽에 위치한 조그만 공터에서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의 말에 수빈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뒤쪽으로는 좌우로 높게 솟아 오른 벽이 있었고, 그 벽 사이로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십여 단의 계단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계단 위쪽을 바라보니 덩치가 장대한 4명의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험악한 표정의 남자들이 두 발을 넓게 벌리고 일렬로 도열해서 계단 아래의 수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쪽에는, 선이 가는 얼굴에 감청색 슈트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수빈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빈은 자신을 막아선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싫은데요."
수빈의 거절에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한편 그때 저택 안에서는 움직임이 있었다.
저택 거실과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는 별관에 위치한 한 방. 한쪽 벽면이 조그마한 모니터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원룸 형태의 넓은 방으로, 24시간 저택을 감시하는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경호실이었다. 그 방안으로 김강식 회장과 김비서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김회장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귀에는 리시버를 꼽고 한쪽 손에는 무전기를 든 30대 후반의 남자가 급히 다가왔다.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김회장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이쪽에 앉으시죠."
여러 대의 큼지막한 모니터가 나란히 올려져 있는 탁자 쪽을 쳐다보며 김회장이 미리 준비된 푹신한 재질의 최고급 가죽 의자에 착석했다. 의자에 앉은 김회장이 모니터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차실장. 저기 보이는 놈이 그놈인가?"
"네. 맞습니다. 조금 전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이 정문 안쪽 CCTV에 잡히는 화면입니다."
"잘 보이는군."
"얼마 전 장비들을 독일제 최신형으로 교체해서 화질이 좋습니다."
"혼자 온 건가?"
"네. 택시를 타고 혼자 온 걸로 보입니다. 주변에 다른 차도, 뒤따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법 배짱은 있는 놈 같군. 우리 애들은 제대로 뽑아온 거지?"
김회장의 질문에 차실장이라 불린 남자가, 마치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듯 빠르게 읊어댔다.
"네. 그룹 경호실에서 가장 강한 놈들로 차출해 왔습니다. 다들 격투기 국가대표 출신에 특수부대에서 복무한 경험도 있는 애들입니다. 싸움이라면 아주 이골이 난 놈들이죠. 특히 그중에 한 놈은 실전 격투로는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입니다. 손이 모질어서 멋모르고 덤볐다가 그놈 손에 병신이 된 채로 살아가는 인간들도 제법 됩니다."
김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했다.
"잘했어. 저놈이 권법을 제법 배웠다고 하니 버릇을 고치려면 이쪽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이따 일 다 끝나고 나면 애들한테 용돈도 좀 쥐여주고 회식도 제대로 시켜줘."
김회장의 치사에 차실장이 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애들한테는 미리 언질을 해뒀겠지?"
김회장의 질문에 의자 뒤쪽에 시립해 있던 김비서가 대답했다.
"네. 제가 아까 거칠게 다뤄라고 말해놨습니다. 특히 몸수색을 철저히 하라고 했습니다. 호진이 때처럼 쓸데없이 녹음 같은 걸 또 하면 곤란하니까요.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면 바로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고, 말을 잘 듣지 않고 반항하면 손을 좀 보라고 미리 언질을 해놨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지켜보자고. 저놈이 고양이 새낀지 아니면 호랑이 새낀지.."
그때 정문 앞 공터에서 수빈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 손 치우시죠."
"말을 따르시죠. 몸수색을 받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전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초대해 놓고 지금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치고 수빈이 오른손으로 어깨에 올려져 있는 남자의 손을 치우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수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여기가 네놈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동네 게임방 같은 덴 줄 아냐? 아직 나이도 어린놈이 말귀가 왜 이리 어두워?"
수빈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면서 다시 한번 남자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발랄한 어투로 말했다.
"손대지 마시라니까 또 그러시네. 이거 지금 홍문지연(鴻門之宴)인가요?"
"홍..뭐? 어린놈이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라."
수빈이 혀를 차며 반말로 대꾸했다.
"쯧. 무식한 널 데리고 내가 무슨 대화를 하겠냐. 회장에게 안내나 해봐라."
"어린놈의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좀 보게."
남자가 빠르게 손을 뻗어 수빈의 어깨를 움켜쥐려고 하였다. 그 순간 수빈은 몸을 살짝 틀며 남자의 손을 피하는 동시에 오른손 장저로 남자의 턱을 거세게 올려쳐버렸다.
- 딱.
순간적으로 남자의 윗니와 아랫니가 격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쿵.
마치 통나무처럼 앞쪽으로 그대로 쓰러진 남자의 얼굴이 땅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손대지 마라니까.. 아직 나이도 젊은 놈이 말귀가 어둡네."
수빈은 깍두기 스타일의 남자를 때려눕힌 뒤 계단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김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국가대표니 뭐니 자랑을 하더니 한 방이로군."
옆에 서있던 차실장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김회장이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몇 군데 부러져도 상관없으니 제압하라고 해."
차실장이 무전기를 입에 대고 성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 새끼! 조져버려~!"
수빈을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뿜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덩치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흥이 돋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까닥까닥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싸운다는 건 언제나 흥겨운 일이지. 그럼 시작해볼까. 가즈아~~!"
수빈이 덩치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자 제일 몸이 날렵한 남자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와 복싱 모션을 취하더니 빠르게 라이트 훅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수빈이 달려가며 피식 웃었다.
'펀치 속도가 느려 터졌군. 넌 에리카에게 많이 배워야겠다..'
수빈은 펀치를 피하기 위해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한발 안으로 들어가며 오른손 팔꿈치를 상대방의 명치에 틀어박았다. 연계 동작으로 접었던 팔꿈치를 편 수빈은 손을 뻗어 허리를 구부려서 구토를 하려는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덩치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날아오는 사람을 피하느라 중심이 흐트러진 덩치들 쪽으로 빠른 속도로 접근한 수빈은 주먹으로 가까운 남자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그런 후 팔을 가볍게 다시 당기며 사선으로 반 발짝 이동하여 장저로 다음 남자의 턱을 비틀어 올려쳤다. 그런 다음 몸을 강하게 회전하며 발끝으로 땅을 휩쓸어 마지막 남자를 공중으로 띄운 수빈은 손바닥을 활짝 핀 다음 남자의 복부에 경을 때려 박았다.
불과 2~3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곰같이 장대한 덩치들이 바닥에 드러누워서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특히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는 의식불명인지 엎어진 상태에서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비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김회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사람을 패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군."
창백한 얼굴의 차실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고수..중에 고수입니다. 그리고.. 많이 싸워본 솜씹니다."
"남은 애들로 잡을 수 있겠나?"
차실장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밖에 남은 한 명이 실전 격투기의 달인이긴 한데.. 그놈마저 무너지면 저택 안에 있는 애들 몇으로는 못 잡을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말을 들은 김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찰 쪽에 연락을 할까요? 그러면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김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었다.
"자네 미쳤나? 그랬다간 저놈과 평생 원수지간이 될 거야. 어떤 놈인지 테스트를 해보자는 거지,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자는 게 아니잖은가. 그럴 마음이었다면 애들 손에 총을 쥐여줘서 내보냈겠지."
김회장은 의자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자신 스스로에게 납득을 시키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저놈은 안전한 후방에서 서류나 들여다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음해할 계략이나 짜고 있는 모사형 인간이 아니야. 머리 쓰는 거나 손을 쓰는 게 전혀 거침이 없어. 피를 보는 일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단 말이지. 마치 피 터지는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군사 같은 놈이야. 한마디로 무서운 놈이라는 소리지. 적으로 돌리기엔 너무 위험해."
마음의 결정을 내린듯 김회장이 손잡이를 세게 내려쳤다. 그런 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차실장. 밖에 있는 놈까지 당하면 그냥 포기하고 얌전히 놔두게.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차실장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한편 수빈은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간 뒤, 계단 위에 서있는 잘생긴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위로 치켜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경호원이 아니라 집사입니다. 제가 직접 회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수빈은 감사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정권으로 남자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코 뼈가 주저앉고 코피가 터진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전 싸우기 싫습니다."
수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여기서 그나마 제대로 배운 게 너 하나야. 누굴 속이려고.."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이며 구부린 자세에서 수빈 쪽으로 잽싸게 튀어 왔다. 수빈은 빠르게 날아오는 남자의 오른쪽 주먹을 구경하는 동시에 남자의 왼손을 주목하고 있었다.
일순 관수(貫手)를 취한 왼손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눈동자를 향해 찔러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수빈은 중얼거렸다.
"허초에 섞인 살초라.. 하는 짓을 보니 넌 좀 혼나야겠다."
수빈은 목을 틀어 주먹을 피하면서 가볍게 왼쪽 팔을 뻗어 금나수로 남자의 왼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잡아당기는 힘을 못 이겨 남자가 딸려오자 수빈은 왼발로 남자의 왼 무릎을 힘차게 밟았다.
- 뻑.
팽팽하게 당겨진 두꺼운 고무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왼 무릎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아아악.."
남자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때, 수빈은 오른손으로 남자의 관수로 뻗은 손가락 2개를 움켜쥐고 역방향으로 세차게 꺾었다.
- 따딱.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터지며 남자가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어억. 어어억.."
거품을 물고 괴로워하는 남자에게 수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6개월 정도 침대에 누워서 잘 고민해봐라. 다시 날 찾아와서 복수를 해야 할지 말지.. 그 대신 다음에 날 또 만나게 되면 넌 평생 병신으로 지내야 할 거다."
수빈은 힘차게 진각을 밟으며 손바닥으로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잠시 후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남자를 뒤에 남겨두고 수빈은 저택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더 이상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없자 저택의 거실까지 편안히 걸어간 수빈은, 양쪽에 남자들을 세워두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편안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회장님. 수빈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올린 수빈은 몇 걸음 더 걸어가 회장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김회장이 입을 열었다.
"반갑네. 내 소개는 안 해도 되겠지? 근데 전화를 일찍 했다고 보고받았는데,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군."
수빈이 죄송하다는 듯 오른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오기전에 들릴 데가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어딜 말인가?"
"용산 쪽에 좀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일?"
꼬치꼬치 캐묻는 회장에게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많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꼭 들으셔야 하겠습니까?"
"많이 궁금하네. 듣고 싶네."
"알겠습니다. 용산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물건도 좀 구입하고 사용법도 배우느라 늦었습니다."
수빈의 말에 김비서가 김회장에게 재빠르게 일렀다.
"회장님. 전자상가를 다녀왔다는 걸 보니 호진이 때처럼 몰래 녹음이나 촬영 같은 걸 하려나 봅니다. 그래서 대문 앞에서 몸수색을 한사코 거부했던 거 같습니다."
김비서의 말에 김회장이 수빈을 다구쳤다.
"정말인가?"
그 말에 수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바봅니까? 녹음을 해야 할 때와 하면 안 될 때 정도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용산에는 왜 간 거지?"
김회장의 질문에 수빈은 쑥스러운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길쭉한 형태의 전자 장비 하나를 꺼내었다. 전자 장비를 탁자 위에 올리며 수빈이 입을 열었다.
"요즘 집안에 몰카나 도청기 같은 것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세상이에요. 아마 여기도 CCTV, 몰래카메라, 녹음기, 도청기 같은 것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요게 그런 전자 장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물건을 고르고 사용법까지 배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수빈의 말에 김회장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집에 오면서 자네가 그걸 왜 사오나?"
회장의 질문에 수빈이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 사람이 살면서 잘못도 저지르고 후회도 하면서 사는 게 보통 아니겠습니까?"
수빈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멋모르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죠. 그리고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는 건 어쩌면 실수라고 봐줄 수도 있을 겁니다."
말을 하는 도중 수빈의 기세가 점점 사나워지고 흉악해지기 시작했다. 살벌한 목소리로 수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잘못을 세 번이나 저지른다?"
거실의 공기가 수빈의 기세에 영향을 받아 점점 더 광포해지며 사람들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같은 잘못을 세 번이나 연속해서 저지르는 건 버러지보다 못한 겁니다. 그런 인간 입으로 들어가는 쌀이 아까워요."
마음속에 살심이 깃든 듯 수빈의 눈가가 점점 더 위로 치켜올라가며 눈가가 벌게지기 시작했다. 흉포하기 이를 데 없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알로 김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수빈이 진득한 목소리로 마치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런 인간들은 죽어도 싸죠. 당연히 쳐죽여야 마땅합니다."
거실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그때 수빈이 빠르게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전자 장비를 확 거머쥐었다. 그 순간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뒷걸음질을 쳤다.
수빈이 기세를 풀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그런 멍청한 인간이 내 눈앞에 나타나면 다 쳐죽일 각오로 사 왔습니다. 아무래도 그러려면 동영상이나 음성 녹음 같은 증거를 남기면 뒤처리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때 한번 사용해볼까 해서 사 왔습니다. 어떻게? 설명이 됐습니까?"
김회장이 잠시 동안 수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 침착한 목소리로 불렀다.
"김비서."
긴장으로 뻣뻣하게 서있던 김비서가 더듬거리며 황급히 대답했다.
"네.. 네. 회장님."
"내 방 금고에 가서 인감도장 좀 가져다주게나."
"네? 네. 알겠습니다."
김비서가 자리를 뜨자 김회장이 수빈을 보며 말했다.
"내가 각서를 쓰겠네. 두 번 다시 자네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내가 친필로 서약서를 써주지. 인감도장까지 찍어 주겠네. 그러니 이제 그만 화해하세나. 원래 사람은 늙을수록 죽기 싫어지는 법이야. 난 자네 손에 맞아 죽기 싫다네."
김회장의 말에 수빈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회장님과 싸우기 싫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고맙네. 내가 두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그러시죠?"
"내가 자네랑 화해를 거부하고 계속 싸우겠다고 했으면, 정말 이 자리에서 다 쳐죽일 생각이었나?"
김회장의 질문에 수빈이 살짝 고민을 하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뭐 굳이 못할 것도 없을 거 같긴 합니다만.. 제가 쓸데없는 물건을 쇼핑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수빈의 대답에 김회장이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후우. 알겠네. 마지막 질문이네. 자네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
"사람들은 보통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전 사람이 죽으면 환생을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자네는 윤회설을 믿나 보군. 알겠네."
"더 이상 물어볼게 없으시면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응? 왜? 각서를 받고 가야지."
"그런 종이 쪼가리가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회장님이 약속을 하셨으니 믿고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게나."
"회장님은 약속을 하셨지만, 회장님 자식 분들 중에 누군가 또 저에게 시비를 걸까 두렵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정말로 피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니 부디 회장님이 잘 좀 말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수빈의 말에 김회장이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보게. 수빈군.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나. 이 김강식이, 천하의 김강식이 꼬리를 말았는데 누가 감히 자네한테 덤빈다는 건가?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각서가 필요 없으면 이번에 작전을 펼치면서 손해 본 액수나 알려주게나. 장부 열람 청구하면서 자금이 제법 많이 깨졌을 거 아닌가? 내가 다 물어주겠네."
"어차피 푼돈입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빈은 의자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밖으로 걸어나가는 수빈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본심에서 우러난 말을 중얼거렸다.
"난 놈이로군. 내 손주였음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잡아야 하겠는데.."
이윽고 김비서가 도장을 들고 돌아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어디 갔습니까?"
"돌아갔어. 김비서. 지금 몇 신가?"
"8시 10분입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군. 자네 KBC 방송국에 아는 사람 있나?"
"네. 있습니다. 거기 사장이랑 저랑 형, 동생 하는 사이입니다. 대학 선배라서요."
"그런가? 그럼 거기 사장에게 전화를 좀 넣게. 아무래도 성의를 좀 보여야 할거 같으니까.."
그날 저녁 KBC 9시 뉴스에서는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뉴스가 한 꼭지 나왔다. 단정한 용모의 여성 앵커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오늘 저희 KBC 방송국으로 화랑 그룹의 명예 회장이신 김강식 회장이 거액의 성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얼마 전 아이돌 멤버인 수빈과 화랑 그룹 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요.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오늘부로 양자간에 정식으로 화해를 하고 돈독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전화위복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화랑 그룹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연말연시를 맞아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50억이라는 거액을 저희 방송국으로 기탁하셨습니다. 이러한 거액의 기부는......."
- 와장창창.
한 남자가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술병을 집어던졌다.
"개새끼.. 언젠가는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