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20화 (120/236)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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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식 회장은 거실에 놓여 있는 최고급 소파에 앉아서, 오른팔로 쿠션을 팡팡 내리치며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혼외자가 있다니. 그것도 2명씩이나.."

정면에 부동자세로 기립해 있는 김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오후부터 정체불명의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봐."

"알겠습니다. 어제 오후 4시부터 3개의 찌라시가 연속으로 터졌습니다. 처음에는 회장님의 젊었을 때 모습을 빼다 박은 혼외자 2명이 미국과 프랑스에 각각 살고 있다는 찌라시가 돌았습니다. 그다음으로는 그 둘이 손을 잡고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친자확인 소송을 벌이려 한다는 찌라시가 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둘이 조만간 한국으로 입국해서 회장님과 회장님 직계를 상대로 재산 분할 청구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는 찌라시가 돌았습니다."

비서의 설명을 다 들은 김회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애들은 뭐라고 하던가?"

잠시 주저하던 비서가 대답했다.

"어제저녁부터 계속해서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저보고 사실 여부를 빨리 확인해 달라고 닦달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실무근이라고 계속 답변을 해주고 있긴 하지만.."

"안 믿겠지."

"네."

"나라도 그럴 거야. 이 나라에서 감히 나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칠 세력이나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할 테니.. 당연히 믿을 리가 없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찌라시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거 같습니다."

김회장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건 그놈들이 작업한 게 분명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터뜨린 방식이랑 똑같이 3번에 나눠서 터뜨린 게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그건 증거 따위가 아냐. 그쪽에서 공포를 한 거지.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할까 봐 친절하게 알려준 거야. 우리 보고 엉뚱한데 찾지 말라고 말이지. 대단한 자신감이야. 감히 나를 상대로, 천하의 김강식을 상대로 겁도 안 나는 건가? 당최 뭘 믿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군."

말을 하다 김회장이 뭔가가 떠올랐는지 김비서에게 급히 물었다.

"근데 태호는? 태호는 오늘 들린 적 없나? 병호야 일본에 가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놈 성질에 나한테 따지겠다고 한남동으로 쳐들어와도 벌써 쳐들어왔을 건데.. 무슨 일 있는 건가?"

"그게.. 오늘 아침에 화랑 통신 쪽으로 회계장부 열람 신청이 접수되었답니다."

그 순간 깜짝 놀란 김회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가득한 검버섯이 홍버섯이 될 정도로 붉게 달아 오른 김회장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장부를 보여달라니! 소주주들 사이에서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었잖아. 갑자기 뭔 소리야?"

"소주주들이 아닙니다. 0.1프로 주식을 소유한 단 한 사람의 명의로 열람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로군. 혼자서 멋모르고 신청한 거 같은데 알아서 잘 설득시키고 거부하라고 해."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부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고 말하고 갔답니다."

"허어.."

"그리고 좀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만.. 화랑 항공과 화랑 백화점에도 회계장부 열람 신청이 들어왔답니다."

비서의 말에 김회장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한 명이 멋모르고 신청한 게 아니라 계획적이라는 거군. 이것들이.. 감히 나랑 한번 해보자 이거지."

"그리고 회장님."

"또 뭔가?"

"오전에 김명호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민정당 원내대표 말인가? 그 작자가 무슨 일로 연락을 했다고 하던가?"

"화랑 그룹에서 연예 기획사를 세울 계획이 있냐고 묻더군요."

"그런 계획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그 미어터지는 시장에 뭐 주워 먹을게 있다고 우리까지 끼어드나?"

"그런데 왜 아무 죄 없는 연예인을 무고하고 잘못했다고 손해배상까지 해놓고선 또 연예 기획사를 건드리냐고 물어보더군요. 우리 쪽에서 진출할 계획이 있으면 입장을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럴 계획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계획도 없는 진출을 도와줘? 그거야 빈말일게 뻔하잖아. 돈 좀 달라는 소리랑 다를 게 뭐가 있어?"

"저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비서의 말에 한참을 아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김회장이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날 합의할 때 박실장이라는 인간이 대표로 나왔다고 했지?"

"네. 우리 쪽 판단으로는 이번 사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인물입니다."

"나이가 몇이라고?"

"50대 중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서의 대답에 김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일 처리하는 수법이 그놈이 아냐. 만약 그랬다면 우리 쪽에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의사타진부터 해왔을 거야. 이렇게 전격적이고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과감한 일처리는 환갑을 코앞에 둔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올 법한 수작들이 아니야.. 이건 천둥벌거숭이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놈의 작품이야. 우리가 착각한 거지."

김회장의 말에 비서가 황급히 대꾸했다.

"설마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아닐 겁니다. 회장님. 그놈 나이가 이제 23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근처도 못 가본 놈입니다. 제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그렇지, 그 나이에 이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벌이겠습니까? 돈이 몇 백억씩 왔다 갔다 하고 까닥하다간 명줄이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립니다."

비서의 반문에 김회장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우리가 착각한 거야. 이놈 이거.. 아주 무서운 놈이야. 일처리가 주도면밀하고 빈틈이 없어. 그래. 맞아. 그놈이 주도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모든 게 딱딱 들어맞는군. 호진이가 일을 벌였을 때 녹음한 증거 테이프가 있으면서도 며칠간 침묵을 지키며 잠자코 있었던 게 이제야 이해가 돼. 가장 좋은 때를 위해서 참고 기다린 거지. 그 어린 나이에 참을성까지 갖추고 있다니.. 타고난 모사꾼이야."

김회장이 허리를 소파에 묻더니 한동안 물끄러미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호야."

"네. 회장님."

"얼마 전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졌으면 깨끗하게 목을 내밀어야 한다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김비서가 대답했다.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김회장이 비서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 이길건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야산에다 묻을까? 행여 그러다 발각되면? 전에도 말했지만 그랬다간 후유증으로 아마 그룹이 갈가리 찢어질 거다. 아니면 그룹의 총력을 기울여서 그놈이랑 계속 박 터지게 싸울까? 그러다 가처분 신청에서 져서 행여나 장부 열람이라도 당하면? 보나 마나 자식놈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검찰에 고발할 거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그놈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배수진을 치고 덤벼드는데 우리 쪽은 지켜야 할게 너무 많아."

"회장님. 그놈은 직업이 연예인입니다. 적당한 여자 하나를 구해서 성추행범으로 고소를 하던지 아니면 술이나 음식 같은데 마약을 타서 먹인 후 마약 사범으로 검찰에 찌르면.."

김회장이 다시 말을 잘랐다.

"미련 없이 연예계를 은퇴하겠지. 단 하루 만에 몇 개나 되는 회사의 열람 신청을 치고 들어오는 거 보면 가진 자금도 적지 않게 많은 놈이야. 깔끔하게 은퇴하고 나서 우리를 노리고 계속 공격해 올 거다. 그때는 죽기 살기로 끝까지 덤벼들 거야. 입장을 바꿔서 나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니까.. 그 상황까지 가게 되면 서로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사이가 될 거고 어느 쪽이 피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거다."

김회장이 말을 하는 동안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는지, 김비서를 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장사꾼이다. 이윤을 남겨 먹는 게 본질인 사람들이야. 이 싸움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남는 게 없어. 손자 놈이 당한 분풀이 좀 해주려고 연예인 하나 때려잡으려다 까닥 잘못하다간 계열사 몇 개가 동시에 흔들릴 수도 있어. 남는 건 하나 없고 위험부담은 넘쳐흐른다."

"...."

아무 대답을 못하는 비서를 보며 김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놈에게 연락해라. 내가 오늘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 어떤 놈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결정을 내려야겠다. 모사인지 군사인지 시험도 해볼 겸.. 내가 한번 직접 만나봐야겠어."

비서가 분통이 터지는지 입술을 악물고 난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한편 그 시각.

수빈은 성북구에 위치한 [대한 예술 종합대학교], 보통 줄여서 대예종이라 불리는 대학의 한 강의실에 앉아서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서감독이 소개해준 이소희 음대 교수의 허락하에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오디션을 보고 있던 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이교수가 나보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바이올리니스트가 4명 필요하면 굳이 학생들을 다 오디션 볼 필요 없이 자신이 추려주는 에이스 4명만 보면 충분할 거라고..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건가?'

수빈은 오디션에 참가한 4번째 연주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결과는 차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연주자가 강의실을 나가자 수빈은 서류를 정리하며 짜증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4명의 에이스? 에이스가 한겨울이라 다 얼어 죽었나? 한 놈은 비브라토를 개판으로 하고, 다른 놈은 건초염에 걸려서 운지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지. 또 다른 놈은 레가토와 데타셰 구별도 못하는 놈이었고, 그나마 좀 한다는 여자는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연주하는 게 취미인 거 같던데. 다들 가지가지 하는구나."

수빈은 서류를 챙겨들고 이소희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 교수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오디션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수빈이 주차장에 세워진 밴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박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수빈군. 지금 어딘가?]

"대예종에서 오디션 좀 보고 가는 길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좀 전에 김강식 회장이 오늘 자네를 보고 싶어 한다고 연락이 왔네.]

"저를 말입니까?"

[그래. 자네를 자신의 자택으로 초대했어. 사태가 급해지니까 그런 거 같은데.. 아마 이번 일이 자네 작품이란 걸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거 같아. 어떻게 할 건가?]

"재벌 회장님이 부르는데 당연히 가야죠. 이런 일은 질질 끌어봐야 손햅니다. 결판을 보자고 하면 빨리 보는 게 나아요. 잘못하면 회사 소속 다른 연예인들에게 피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가겠다고 저쪽에게 통보할까?]

"네. 그렇게 하시고, 저 혼자 찾아갈 테니까 주소나 문자로 찍어주세요."

수빈의 말에 박실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자네 혼자 간다고? 위험하지 않겠나? 나랑 같이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오히려 더 번거롭습니다. 제가 거기 가는 걸 실장님이 뻔히 아는데 절 해코지 못할 거니까 안심하세요. 이런 일은 원래 대장끼리 일대일로 결판내는 겁니다. 그리고 원군은 항상 밖에 있어야 하는 법이죠. 잘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걱정되는데.. 알겠네. 그럼 김회장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반드시 나에게 연락을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잠시 후 수빈은 대기하고 있던 밴에 올라타서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저 볼일이 있으니까 용산 쪽으로 좀 가주세요. 거기 저 내려주고 형은 오늘 일찍 들어가세요. 제가 저녁에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 무슨 일?"

"개인적인 겁니다.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웬만하면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어떠냐?"

"형. 저도 사생활이란 게 있잖아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알았다. 그럼 나중에 일 다 보고 집에 들어가면 꼭 연락해라."

"네. 알았어요."

수빈은 태운 밴이 부지런히 용산 쪽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택시를 타고 한남동 김강식 회장의 자택에 도착한 수빈은, 마치 성문처럼 거대한 검은색 솟을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가볍게 눌렀다. 이미 CCTV를 통해 파악을 했는지 삐 소리와 함께 철컹 소리가 들리며 안쪽에 위치한 누군가가 문을 잡아 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열린 문안으로 입장하며 수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랑이를 함부로 여우굴로 불러들이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여줘야지.'

그때 수빈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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