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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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후라고 불린 조명 감독이 수빈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반갑네. 강감독. 박감독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최감독의 말에 수빈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래요? 박감독님이 제 욕을 많이 하신 모양이네요?"
"그럼 내가 여기까지 안 왔겠지. 박감독이 하도 칭찬을 해서 말이지. 박감독이 어떤 사람인데.. 잘만 풀렸으면 자기나 봉감독이나 같은 레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하도 칭찬을 해대니 궁금해서 도저히 안 올 수가 없었네."
박감독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최감독님. 제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전 그런 말 한적 없습니다."
"꼭 들어야 아나? 난 박감독이 어린 나이에 영화판에서 주전자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부터 봐온 사람이야. 그 정도로 오래 봤으면 안 들어도 아는 게 있는 법이지."
"그러셨군요. 박감독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천재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세상에 천재가 어디 한둘인가? 나정도 나이가 되면, 살면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제법 많이 겪어보게 된다네. 그랬는데 그다음 말이 가관이더군."
"뭐라고 하셨길래?"
"강감독 밑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그러더군. 그래서 요즘 말로 깜놀했지. 상대방이 천재라서 감탄하는 거랑 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야. 천재 밑에서 일하면 피곤하고 짜증 난다고 부러 피하는 사람들도 많다네. 그런데 박감독은 강감독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단 말이지. 그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승복이 담겨 있는 건데..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렇지. 이제 갓 스물 넘은 친구를 천하의 박감독이 존경한다?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졌지. 그래서 와봤네."
"잘 오셨습니다. 제가 과연 그 정도 능력이나 됨됨이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최감독이 악수한 손을 풀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강감독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어떤 겁니까?"
"강감독은 조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말 그대로 빛을 비춰주는 거 아닙니까?"
"내가 질문을 잘 못했군. 다시 묻지. 조명에 대한 강감독의 철학이 뭔지 궁금하네."
수빈은 최감독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였다.
"사실 조명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만.. 제가 그림을 좀 그립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는 게 있더군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명암이 혼재합니다. 즉 빛이 있으면 당연히 어둠이 있는 법이죠. 최감독님. 혹시 요리하는 걸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지 않아. 할 줄도 모르고.."
"요리를 잘 한다. 즉,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재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때 철칙이 있죠. 단 재료는 단맛을 살려서, 쓴 재료는 쓴맛을 살려서 조리해야 하는 법입니다. 본연의 맛을 억지로 거스르면 절대로 좋은 음식을 만들 수가 없죠. 조명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밝아야 되는 곳은 제대로 밝게, 어두워야 하는 곳은 제대로 어둡게 해주는 게 조명의 가장 기본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답변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하네. 적어도 강감독이 어설프게 [전설의 고향]처럼은 안 찍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기는군."
"네? 전설의 고향요?"
"얼마 전에 모 촬영장에 갔었는데.. 여배우가 촬영하는 내내 자신의 얼굴을 환하게 보이도록 조명을 때려달라고 요구하더군. 감독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고.. 다 찍고 나중에 영상을 확인해 보니 여배우의 허연 얼굴만이 공중에 둥둥 떠다녔어.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같이 말이지. 그딴 게 감독이랍시고 나에게 지시를 하더군."
최감독의 짜증 섞인 말에 수빈은 고소를 지었다.
"최감독님. 적어도 전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시를 내리면 나름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그게 최감독님의 뜻과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빈의 말에 최감독이 옷을 추스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야 강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강감독. 오늘 잘 부탁합니다."
"네. 최감독님. 같이 멋진 작품 하나 만들어 보시죠."
최감독이 방을 나가자 수빈이 입을 열었다.
"훌륭한 분이시군요."
"한국 영화판에서 조명판 좀 제대로 들 줄 안다는 사람들은 다 저분 밑에서 욕먹으면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영화 찍을 때 꼭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이 되는군요. 이제 소개해줄 다른 분은 없나요?"
"원래는 한 분 더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안 오겠다고 하시더군요."
"왜요? 바쁜 일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돈이 모자라서?"
"돈이야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보다.. 강감독 이름을 듣더니 안 온다고 하시더군요. 뮤비 촬영이면 자기가 가봐야 별 도움이 안 되니 돈이나 아끼라고.. 그 정도 짧은 분량이면 강감독 혼자서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대신 정식으로 영화를 찍게 되면 감독이 모든 분량을 일일이 직접 다 챙길 수 없을 테니, 그때 자신을 불러달라고 말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이시죠?"
"박형석 음향 감독님이라고.. 이 바닥에 전설적인 분이 있습니다."
"아. 그분은 저도 아는 분입니다. 나중에 영화를 찍게 되면, 그분은 제가 직접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이윽고 박감독이 현장을 둘러보겠다고 방을 나가고, 수빈 혼자 방안에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잠시 후 방안으로 건장한 체격의 3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까 보았던 샛별의 매니저라고 생각되는 남자였다.
'제법 단련을 한 몸인데.. 경호원이나 특수 부대 쪽에서 일했던 남자인가?'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김샛별 배우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조상용이라고 합니다. 외람되자만 감독님께 부탁을 드릴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이 있다는 매니저의 말에 집히는 것이 있어서 수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니저님. 무슨 말을 하시고 싶은지 알겠습니다. 제가 좀 소문이 안 좋게 나기는 했지만.. 미성년자인 샛별에게 집적거릴 정도로 개념이 없는 놈은 아닙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수빈의 말에 매니저가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들은 지시랑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무슨 말입니까?"
"제가 회사에서 듣기로는, [여배우에게 있어서 수빈씨와의 스캔들은 빛나는 훈장과도 같은 거다. 그러니 둘이서 알콩달콩 하더라고 방해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하시던데요."
벙찐 얼굴의 수빈이 되물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가요?"
"김해수 대배우께서.."
"이 누님이.. 후. 그럼 무슨 부탁을 하시러 오신 건가요?"
"지금 회사에서 샛별양과 관련된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아. 안 그래도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샛별이 정도의 외모면 인터넷이 뒤집혀도 벌써 뒤집혔어야 하는데.. 의외로 조용하더라고요. 회사에서 막고 있었군요?"
"네. 제대로 찍은 작품 하나 없이 사람들에게 외모로만 언급되면 앞으로의 활동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해서 막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저에게 무슨 부탁을?"
"샛별양이 일전에 KBC에서 유니언이라는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게 방송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성형 전 얼굴이 공중파를 제대로 타는 거니까.."
"네. 그래서 편집을 해달라고 담당 피디에게 회사에서 요청을 했는데, 담당 피디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답니다."
"그렇겠죠. 아무리 SN이라고 하더라도 박피디 그분 성격상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죠."
"그래서 말입니다. 김해수 배우께서 감독님께 부탁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낼 거라고 말입니다."
"저도 당장은 뾰쪽한 방법이 없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박피디를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바깥이 시끌벅적해졌다.
'밖이 시끄러운 거 보니 멤버들이 도착한 모양인데.. 나도 이제 슬슬 나가봐야겠군.'
수빈은 방 밖으로 나가서 멤버들과 반갑게 인사를 한 뒤, 멤버들을 데리고 변검녀가 기다리고 있는 분장실로 이동했다. 분장실에 도착한 멤버들이, 분장을 받고 있는 김샛별을 발견하고선 난리가 났다.
- 선녀다. 선녀.
- 사람이 아니무니다.
- 직접 보니 더 예쁜데.
- 이거 실화냐?
- 같이 사진 좀 찍자고 해봐.
멤버들의 호들갑에 부끄러움을 느낀 수빈이 소리 질렀다.
"닥쳐! 이것들아. 고딩이다. 고딩.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수빈은 변검녀에게 자신이 바라는 분장을 부탁하고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수빈은 자신도 분장을 끝마치고 감독 겸 배우로서 촬영에 임했다. 샛별과 BBG 멤버들에게 직접 연기를 디렉팅 하며, 스태프들과는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해가며 뮤비 촬영을 해나갔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가까워질 까지 촬영을 강행한 수빈은, 스태프들을 십분 활용하여 무사히 뮤비 촬영을 끝마치고선 박감독과 함께 [벨 스튜디오]로 이동하였다.
다음날 아침까지 눈 한번 붙이지 않은 채 쉬지 않고 편집을 하던 수빈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박감독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아침부터 회의가 잡혀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될 거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제가 생각했던 전체적인 그림은 편집이 잘 끝났으니까, 박감독님께서는 편집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특수 효과와 자막 위주로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다 끝나면 제가 직접 음악을 입히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작업하는데 이삼일 정도는 걸릴 겁니다.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수빈의 질문에 박감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강감독. 원래 그게 정상인 겁니다. 이렇게 빨리 편집하는 강감독이 괴물인 거죠. 오늘 보니 전에 보다 손이 더 빨라진 거 같은데요?"
"별말씀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뮤비 촬영에 들어간 일체의 경비는 계산서를 뽑아서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수빈을 박감독이 불렀다.
"아. 강감독."
"네?"
"혹시.. 샛별이를 저희 영화에 캐스팅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죠. 왜요? 샛별이가 맘에 안 드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얼굴에 그 몸매면.. 그것만으로도 관객이 100만은 더 들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영상을 아름답게 뽑는 건 국내 그 누구에게도 안 뒤집니다."
"다행이네요. 박감독님 맘에 든다니.."
"맘에 들다 마다요. 그 정도 외모면 어릴 때부터 주위에서 항상 떠받들어줘서 성격이 개판이기 십상인데.. 샛별이는 그런 면이 없어서 더 좋더군요. 영화에서 뮤즈 역할입니까? 아니면 환자?"
수빈은 박감독의 질문에 속으로 그럴만한 사연이 있지요라고 뇌까리면서 대답했다.
"환자 역할로 캐스팅할 겁니다."
"호오. 그렇군요. 그럼 뮤즈 역할을 연기할 배우로 점찍어 놓은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대가 크네요. 이거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맘이 급하다 보니 궁금해서 자꾸 물어보게 되네요. 그만 가보시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하는 박감독의 말에, 수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박감독님. 여유를 가지세요. 찍으려면 아직 6개월은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만 가볼 테니 편집이 끝나면 연락 주세요."
이때까지만 해도, 가볍게 손을 흔드는 박감독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편집실을 나가는 수빈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 대파란이 조만간 일어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 밖으로 나온 수빈은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가서 밴에 올라탔다. YK 사옥으로 이동하는 밴 안에서 수빈은 어제 검색을 하다 중단한 초모랑마에 대해서 다시 검색을 해보았다.
'사람이 살수 없는 초모랑마에서 대체 뭐가 나오길래 검색이 되는 거지?'
호기심을 가지고 검색을 하던 수빈은 한 단어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야차쿰바?"
수빈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설마 초모랑마 근처에서 야차쿰바를 채취한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수빈은 황당한 눈빛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