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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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박감독이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오자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감독님."
그 순간 박감독이 갑자기 수빈을 확 끌어안았다.
"나 좀 살려주게. 수빈군 아니 수빈감독. 절대 날 버리면 안 돼."
박감독의 포옹에 깜짝 놀란 수빈이 박감독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편하게 강감독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것 좀 풀어주세요. 박감독님."
박감독이 포옹을 풀자 수빈이 물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뭔 소리입니까? 그리고 눈은 또 왜 그래요?"
"눈? 아. 어제 잠을 못 잤더니.. 좀 충혈됐나 봐."
"오늘 촬영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신 겁니까?"
"아니. 자네가 준 각본 때문에 설레서 잠을 못 잤어. 어서 빨리 찍고 싶어서 내가 미칠 지경이라고. 자네가 말한 대위법이 무슨 뜻인지 각본을 보고 알았네. 어쩜 그렇게 철저하게 계산을 한건가? 첨부터 끝까지.. 강감독. 이건 반드시 내가 찍어야 되는 영화야.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화 필름이 쉴 새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박감독을 안심시켰다.
"제 돈으로, 제가 감독으로 찍을 첫 번째 영화입니다. 제가 자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박감독님 못 건드립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촬영 들어가려면 아직 6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아냐. 촬영 장소도 헌팅 해야 되고, 콘티도 짜야 되고, 스튜디오도 섭외해야 되고, 소품도 제작해야 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6개월은 금방 흘러간다고."
수빈은 열정으로 가득 찬 눈빛의 박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연말이라 제가 지금 너무 바쁩니다. 연초가 되면 제가 감독님 사무실로 갈 테니 그때 회의를 한번 하시죠. 그리고 그때쯤이면 제가 여유 자금이 생길 테니까, 저랑 정식으로 계약을 하신 다음에 영화 촬영 준비를 시작하시죠. 그럼 되지 않겠습니까?"
수빈의 말에 박감독의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며 다시 수빈을 와락 끌어안았다.
"강감독님. 감사합니다. 이 박수종이가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있게 되다니.. 이건 다 강감독님 덕분입니다. 지금 가슴이 터져버릴 거 같아요."
'이 양반이 갑자기 웬 존대야?'
"말은 다시 낮추시고요. 제가 불편해서 안됩니다. 그리고 이것 좀 푸세요,"
잠시 후 촬영장 한쪽 편에 마련되어 있는 대기실로 수빈을 끌고 간 박감독이 입을 열었다.
"강감독. 여기 앉아 계시면 제가 각 분야의 책임 스태프들을 데려와서 인사를 시키겠습니다. 시간이 급박해서 몇 명 빠지긴 했지만, 제가 아는 베스트로 꾸려서 왔으니까 잘 살펴보시고 맘에 드는 친구가 있으면 영화 제작에도 참가 시키면 될 겁니다."
수빈이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은 낮추시라니까요."
"아닙니다. 제가 '님'자는 빼겠지만.. 이 정도 공대(恭待)가 맞는 겁니다. 자신이 찍는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에게 반말로 찍찍 이야기하는 촬영 감독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원래 현장에서 감독의 권위가 제대로 서야 사고 없이 돌아가는 겁니다. 배에서 선장이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하는 항해사 보셨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근데 지금 한창 촬영 준비 중이던데, 제가 현장에 안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수빈의 말에 박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감독은 지금 나오는 게 아닙니다. 7시가 약속 시간이면 7시 조금 못돼서 슬쩍 나오는 겁니다. 밑에 스태프들이 일을 잘했는지 살펴보고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수정 지시만 내려도 충분합니다. 콘티가 없다면 같이 작업을 하면서 일일이 지시를 해야겠지만, 콘티가 이미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같이 일하는 팀원들을 믿고, 그들에게 맡겨 놓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감독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박감독이 잠시 짬을 두고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강감독이 처음이라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걸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감독에게 필요한 미덕은 풍부한 상상력, 정확한 디렉팅 그리고 현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입니다. 겸손함과 부지런함은 영화감독의 미덕이 아니에요. 뒤에서 싸가지가 없니 피도 눈물도 없니 하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더라도, 영화를 사고 없이 잘 찍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감독이 해야 할 일입니다."
대화를 마치고 박감독이 책임 스태프를 데리러 나가자, 수빈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들어 A&R 팀 정팀장에게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아까 드림픽처스에서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어.'
- 오늘 사무실로 못 들어갈 거 같습니다. 수정 사항은 내일 오전에 확인했으면 합니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팀장에게서 즉시 답변이 날라왔다.
- 알겠습니다. 오전 9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9시라.. 이 양반들이 빨리 음반을 출시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나 본데.'
- 9시에 맞춰서 갈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로 답변이 도착했다.
- 알겠습니다. 수빈씨.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빈이 문자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자 대기실문이 열리며 박감독이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은빛 광택이 도는 상자 세 개를 옆구리에 끼고, 줄이 달린 은테 안경을 쓴, 30대 후반에 마른 몸매의 남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깐깐하고 꼼꼼한 성격의 남자로 보였다.
박감독이 수빈에게 다가와 목례를 올리며 정중한 톤으로 말했다.
"강감독. 소품팀 팀장인 이성호 팀장을 데려왔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소품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이 친구가 탑입니다. 믿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이성호 팀장이라는 남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중년의 박감독이 나이가 한참 어린 수빈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수빈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이번 뮤비의 감독을 맡고 있는 강수빈이라고 합니다."
수빈의 손을 잡으며 이성호 팀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네. 네. 강수빈씨? 강감독? 아무튼.. 처음 뵙겠습니다. 소품팀을 담당하고 있는 이성호라고 합니다."
수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품에 관해서는 국내 탑이시라고요? 이거 기대가 아주 큽니다."
수빈의 말에 이팀장이 살짝 짜증이 서린 어투로 답했다.
"아. 뭐. 제가 좀 잘 나가긴 하죠. 근데 돈이 많은가 봐요? 사실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안 올려고 했는데.. 박감독님이 급하다면서 따불을 부르시길래 왔습니다."
수빈은 시비조로 느껴지는 이팀장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들고 오신 게 오늘 촬영의 핵심 소품들인 총 인가 봅니다? 먼저 뮤비에서 제일 중요한 여주인공이 쓸 총부터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수빈의 말에 이팀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러시죠."
이팀장이 들고 온 세 개의 은색 상자 중 하나를 자신 있게 열었다. 상자 안에는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네모난 형태의 총이 한 자루 담겨 있었다. 이팀장이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 촬영때 여주인공이 쓸 총입니다. 이 총은.."
수빈이 이팀장의 말을 잘랐다.
"글록 세븐틴이군요."
이팀장이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어떤 총인지 아십니까?"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 선배가 사용한 총 아닙니까. 제이슨 본이 쓰는 총이기도 하고요.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총이죠."
수빈의 자신 어린 대답에 이팀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 총이 왜 글록 17이라 부르는지 혹시 아십니까?"
"통설 아니면 정설?"
"...둘 다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통설로는, 탄창에 총알이 17발 들어간다고 해서 글록 17이라고 부른다고 많이들 알고 있을 겁니다. 아저씨에서 원빈이 탄창을 갈아낀 뒤 자동차의 방탄유리를 뚫기 위해 발사한 총알 개수가 16발이었죠. 그리고 유명한 대사를 날리죠. '아직 한발 남았다.' 그리고 한발을 더 쏘죠. 그래서 총 17발이 들어간다고 해서 글록 17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생각들 하지만.."
수빈은 잠시 이팀장을 쳐다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는 제작사에서 여러 번의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총 17번의 특허를 신청한 끝에 양산형이 제작되었다고 해서 글록 17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죠. 탄창의 총알 개수랑은 전혀 무관한 이름이죠. 근데.. 이팀장님?"
"네?"
"박감독님이 이팀장님을 워낙 좋게 말씀하셔서 제가 기대가 많이 큽니다만.. 이걸 여주인공의 총이라고 내미시는 거면 제가 많이 실망스러운데요."
수빈의 냉정한 말에 이팀장이 순간 말을 더듬었다.
"왜.. 왜요?"
"이 사각형 총신의 총이 정말로 여주인공이 들고 있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들고 있으면 화면에 아름답게 보일 거 같아서 추천하시는 건가요? 이팀장님 안목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면.."
당황한 표정의 이팀장이 다급히 수빈의 말을 잘랐다.
"잠시만요."
이팀장이 황급히 들고 있던 박스를 닫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다른 은색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는 작고 조그마한 사이즈의 검은색 권총이 한 자루 담겨 있었다.
"호오. 월터 PPK라.."
"이것도 아시는군요?"
"세상에 007이 쓰는 총을 모르는 영화 관계자가 어디 있습니까? 뭐 이 정도면 시각적으로도 귀엽고 아담하니까 여주인공이 쓰기에 무난할 거 같긴 하네요. 그럼 남자 악당들이 쓸 총을 볼 수 있을까요?"
수빈의 말에 이팀장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팀장이 마지막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며 기대가 잔뜩 담긴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아시겠습니까?"
"해클러 앤 코어사의 P30이네요. 상당히 잘 만들었는데요. 보아하니 이팀장님이 영화 [존 윅]을 감명 깊게 보셨나 봐요? 이 총을 들고 올 줄은 예상 못했는데요."
수빈의 대답에 이팀장이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잠시 후 조심스럽게 존칭을 사용하며 물었다.
"강감독님. 감독님께서는 혹시.. 밀덕이십니까?"
이팀장의 감독님이라는 존칭에 피식 웃으며 수빈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액션 영화에 출연할 계획이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총들의 총기제원표를 한번 훑어본 정도죠. 밀덕까지는 아니에요."
그때 대기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매니저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김샛별이 걸어 들어왔다. 베이지색코트를 걸치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김샛별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하여간 얼굴이 깡패야..'
잠시 후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난 뒤 수빈이 이팀장에게 말했다.
"이팀장님. 여기 샛별이에게 월터 PPK를 줘보세요."
이팀장이 샛별의 미모에 반했는지 몽롱한 눈빛으로 샛별에게 총을 건넸다.
"샛별아. 오늘 촬영할 때 네가 사용할 총이야. 이팀장님이 직접 골라줬으니까 한번 포즈를 취해봐."
샛별이 이팀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건네고선 코트를 벗었다. 코트 안에는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 미니 원피스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총을 쥐고 능숙하게 자세를 잡더니 여기저기를 겨냥하며 포즈를 취하였다.
"이야. 자세가 제대로 나오는데. 연습 많이 했나 보다?"
"그럼요. 오빠 아니 강감독님. 오늘 촬영을 위해서 이틀 동안 해수 언니에게 연기지도를 열심히 받았어요. 아. 맞다. 해수 언니 말로는 여주인공이 꼭 해야 하는 포즈가 있데요."
"어떤 포즈?"
샛별이 배시시 웃더니 조심스럽게 원피스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끝부분에 레이스가 달린 밴드 스타킹이 보였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는 총을 집어넣을 수 있는 총집이 매여 있었다.
방안의 남자들이 침을 꿀떡 삼킬 때 샛별이 능숙하게 총을 총집에 집어넣고 다시 원피스를 내렸다. 그런 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대기실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던 샛별이 갑자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 후 재빠르게 한쪽 무릎을 세우더니 빠르게 원피스를 걷어 올려 허벅지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샛별이 양손으로 총을 움켜잡고 정면으로 자세를 취한 후 입으로 소리를 냈다.
- 빵야. 빵야.
샛별이 입으로 총소리를 내자 방안의 남자들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열렬히 박수를 쳤다. 남자들의 박수소리에 샛별이 환하게 웃으며 답례를 보낼 때 이팀장이 소리쳤다.
"잠시만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이팀장이 다시 소리쳤다.
"샛별양.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팀장이 대기실 문을 열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헐떡이며 돌아온 이팀장의 손에는 검은색 광택이 감도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박스가 들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샛별에게 박스를 내밀며 말했다.
"이걸.. 이걸 사용해 주세요."
샛별이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자 차가운 은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은장으로 번쩍이는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총이 놓여 있었다.
"음. 월터 PPK/S로군요."
수빈의 감탄 어린 소리에 이팀장이 부러질 듯 거세게 고개를 돌려 수빈을 바라보았다.
"역시.. 강감독님은 알아보시는군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죠.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에서 여자 주인공이 사용하는 총 아닙니까. 이팀장님의 애장품인가 봐요?"
"그 총이 맞습니다. 제가 정말로 아끼는 스페셜 1호 [은색돌이]입니다. 이 총이 샛별양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습니다."
샛별이 조심스럽게 총을 집어 들고 자세를 취했다. 검은 머리, 검은 원피스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은색 총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빛났다.
이윽고 샛별은 분장을 하러 떠났고, 이팀장은 소품을 점검하기 위해 현장으로 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박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거 이거.. 이팀장이 강감독에게 푹 빠진 거 같습니다. 그 친구가 좀 매니악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소품 쪽으로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그런가요? 저보다는 샛별이에게 푹 빠진 거 같은데요?"
"뭐 그거야 남자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감독님. 잠시만 기다리시죠. 다른 책임 스태프를 데려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대기실 안으로 박감독이 머리가 허옇게 센 초로의 남자를 데려왔다.
"인사하시죠. 조명을 책임지고 있는 최진후 조명 감독입니다."
수빈이 의자에서 일어나 조명 감독에게 악수를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