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36 - 3
행사를 모두 마치고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사무실로 돌아온 수빈은 A&R 팀과 회의를 하는 동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근처 중국집에서 배달해온 짜장면과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뮤란의 스페셜 앨범에 들어갈 음악들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하였다.
- 홍보팀 김대리입니다. 회의 끝나는 대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보팀? 여기선 또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거야? 이거 영화 찍느라 기껏 줄여놨던 일들이 다시 또 많아지는 기분이 드는데.. 아무래도 조절 좀 해야겠어.'
수빈은 의문을 뒤로 한채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짜장면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 후루루룩
잠시 후 식사를 모두 마친 수빈은 메모지에 몇 가지 수정 및 보완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작성이 끝난 메모지를 정팀장에게 내밀며 말했다.
"팀장님. 어차피 고치려 들면 한도 끝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보내는 시기가 중요한 음반이니 이 정도만 손보시고 출시하시죠."
정팀장이 긴장한 얼굴로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더니 팀원들과 같이 읽어 보았다. 옆에 있던 조민석이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 정도 수정 작업은 오늘 하루 밤새우면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수빈이 서류 가방에서 그림 뭉치를 꺼내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타이밍이 중요한 음반이잖습니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적절한 선에서 타협한 겁니다. 그리고 이건 이번 스페셜 앨범 재킷에 들어갈 그림들이니 받으시고요."
조민석이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그림을 받아들자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에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겠습니다. 수정 작업이 무사히 끝났는지 확인하고 나면 제 할 일은 모두 끝납니다. 앨범 발매는 다른 부서와 잘 의논하셔서 진행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정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조만간 제가 영화 음악을 녹음할 일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때 A&R 팀이 쓰는 녹음실을 좀 이용했으면 하는데요. 아무래도 그쪽이 음질 면에서는 최상일 테니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수빈씨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맘 같아선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심정인데, 그 정도 부탁을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간은 필요 없습니다. 제 간이 더 싱싱해요. 아무튼 날짜가 정해지면 제가 미리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날 A&R 팀 전원이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책정된 예산이 별로 없어서 수고비도 못 드려요. 끽해야 제가 밥밖에 못 사드릴 거 같은데요."
정팀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은 우리 팀 전원이 수빈씨 덕분에 이미 충분히 벌었습니다. 그런 걱정 마시고 언제든지 연락 주시죠."
"감사합니다. 그 문제는 차후에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수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도까지 따라나온 A&R 팀 전원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수빈은 홍보부 김대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잠시 후 수빈은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전산실이라고 적혀 있는 방 앞에서 김대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수빈씨. 무사히 잘 찾아오셨네요."
"찾는 게 어렵지는 않더군요. 회사 내에 이런 곳도 있었네요. 근데.. 절 왜 여기까지 오라고 하신 겁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수빈은 김대리를 따라 전산실 안으로 들어갔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전산 장비들을 구경하며 안쪽 깊숙이 들어가니 사무실로 사용하는 공간이 나왔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마른 체격의 30대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씨. 인사하시죠. YK 전산실을 책임지고 있는 박정호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수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정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은 주변에서 의자를 끌고 와서 적당히 둘러앉았다. 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있을 텐데요.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빈의 말에 김대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일전에 수빈씨가 저에게 지시한 작업 사항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여기 있는 박팀장님이랑 같이 준비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만.. 오늘부로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시라고 한 겁니다."
김대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수빈은 속으로 의문을 가졌다.
'내가 전산실에 작업을 부탁한 게 있었던가? 뭐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경매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때 말씀하신 경매 건 말입니다. 회사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식이라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여기 계신 박팀장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수빈은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 심드렁하게 생각하였다.
'아니 뭐 이런 거까지 나에게 일일이 보고를 하는 거지?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진행을 하면 될 것을.. 안 그래도 바쁜데 말이야.'
그 순간 수빈은 김대리와 박팀장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주인이 가르쳐준 배변 장소에서 배변을 마치고 달려온 강아지의 눈빛이었다. 칭찬받기를 잔뜩 기대하고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맘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네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두 분이 고생하신 건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
수빈의 칭찬이 떨어지자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힘차게 하이 파이브를 하였다.
- 짝.
경매 시스템 설명을 듣고 시연까지 마친 후 수빈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쪼록 경매가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대리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경매 금액은 어떻게 할까요?"
"연말이기도 하니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주시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전산실에서 나온 수빈은 박실장의 방 쪽으로 걸어가면서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의 분위기가 예전에 세가 내에서 사람들이 날 떠받들 때랑 비슷한데.. 나의 착각이려나?'
잠시 후 박실장의 방에 도착한 수빈은 박실장과 마주 앉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하루가 참 길게 느껴집니다."
"그런가? 스케줄 소화하기가 많이 힘들었나 보지?"
"그런 것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하다고 해야 할까요."
수빈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빈의 설명이 끝나자 박실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보게. 수빈군. 요즘 회사에서 가장 권력자가 누군지 아는가?"
"당연히 사장님이시겠죠."
"김성만 사장이야 일 년에 한두 달 빼고는 미국에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나이도 이미 환갑이 넘었고, 건강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
"그럼 누가 최고 권력자입니까?"
"모른척하기는.. 바로 날세."
"박실장님이 최고 권력자시라고요?"
"당연하지, 김사장과 의기투합해서 YK를 설립한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지금처럼 내가 권력을 틀어쥔 적이 없었다네. 지금 YK에서는 내 말이 법이고 진리야."
"이야. 대단하시군요."
"뭔 소리야? 지금 내가 가진 권력의 원천은 수빈군 자넬세. 회사에서 수빈군과 가장 친한 사람이 나고, 수빈군에게 부탁을 하려면 반드시 날 통해야 한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수빈이 대답을 못하자 박실장이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오늘 YK 시가총액이 6천억이 넘었어. 일전에 떨어졌던걸 다 회복하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상승했다네. 한국에서 탑이라는 SN 시가총액이 7천억이니까 이제 거의 다 따라잡았지.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가 얼마 전 루머에 휩싸였을 때 YK 시총이 7백억이 넘게 떨어졌네. 회사에 소속된 일개 연예인 한 명의 루머, 그것도 마약이나 성추행 같은 치명적인 사건도 아니었지.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가 저지른 단순한 2주짜리 폭행 사건 루머 때문에 천억 가까이가 허공으로 날아갔다고."
박실장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수빈군. 자네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네. 평상시에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한 번씩 바보 같은 소리를 할 때가 왕왕 있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자네가 딱 그래."
"그렇군요."
"자네가 일에 치여서 제대로 판단을 못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권력자에게 잘 보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은 건 사람들의 속성 아닌가? 지금은 자네랑 친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권력이 되고 있는 시절이야. 사람들이 자네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칭찬을 갈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누리게나."
"잘 알겠습니다. 저도 얼핏 눈치채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에 일어난 변화다 보니 제가 확신이 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올 한해 우리 회사에서 돈 좀 벌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자네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진정한 권력이고 힘인 게지. 그럼 이제 우리도 자본주의의 핵심인 돈 이야기를 해볼까?"
"그러시죠. 화랑 백화점 주가가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22프로가 떨어졌네."
"확실히 그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적게 떨어졌군요. 그래도 계산하면.. 139억 6천만원을 벌었네요."
"그게 바로 계산이 되나? 하긴 자네니까.. 아무튼 적게 떨어졌다지만 엄청나지 않은가? 난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신지 한다네. 돈의 단위가 너무 크다 보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아. 단 이틀 만에 대치동 금마 아파트 열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고."
"거기 아파트가 비싼가 보죠?"
"얼마 전 내 친구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샀는데, 14억에 샀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뭐 우리가 아파트를 살려고 돈을 벌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군요."
"그렇지. 그리고 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네."
"어떤?"
"화랑 쪽에서 연락이 왔네. 합의를 보자고 하더군. 보상을 충분히 해줄 테니 합의를 하고 소를 취하해달라고 연락이 왔어. 주가 하락을 막아보겠다는 속셈이겠지."
그 순간 수빈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고, 머릿속으로 기민하게 계산을 하며 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제가 좋아하는 걸그룹이 누군지 아십니까?"
"일전에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트와이스입니다."
"맞아. 트와이스."
"기쁨도 두 배, 수익도 두 배. 설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가?"
"내일 공매도가 끝나면.. 돈을 빼지 마세요."
"응? 이유가 뭔가?"
"바로 공매수를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죠. 화랑에서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주가가 반드시 상승할 겁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돈을 벌 절호의 기회를 저쪽에서 던져줬으면 놓치지 말고 움켜잡아야죠."
- 쾅.
박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공매수! 그렇지.. 맞아. 그런 게 있었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주가가 하락할 거란 건 우리 쪽에서 충분히 예상이 가능해서 공매도를 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부탁도 안 했는데 저쪽에서 주가가 언제 올라갈지를 친절히 알려주네요."
"그렇지."
"제가 작전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새? 어떤 작전인가?"
"실장님께서는 내일 화랑과 만나서 합의를 해주세요. 어차피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 가능한 것도 아니고 하니.. 내일이 공매수 마감날이니까 주식장이 끝나기를 기다린 다음, 저녁 6시쯤에 뉴스가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말인가?"
"저랑 화랑이 합의를 했고 제가 소를 취하했다. 그리고 보상금으로 일전에 기자회견에서 밝혔던, 제가 디젤에 손해배상을 해준 1억 3천5백만원의 3배를 받기로 했다. 그 정도 액수면 저쪽에서 충분히 수용할 겁니다. 단! 그냥 그렇게 뉴스를 내보내면 제가 돈에 눈이 멀어 상대방과 합의해줬다는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안 하느니 못한 거죠."
"그럼 어떻게 내보내야 하겠나?"
"전액 기부를 해야죠. 3배면 4억 5백만원이네요. 그 전부를 불우이웃 돕기로 낸다고 하세요. 그리고 기부자의 이름은 저와 화랑 백화점 공동의 이름으로 하고요. 일거양득(一擧兩得). 제 이미지도 올라가고 화랑 백화점의 주가도 덩달아 올라갈 겁니다. 공매도 마감인 3일 후에는 주가가 충분히 올라가 있을 겁니다."
"좋아! 아주 좋아. 이거 아주 피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구먼. 내가 내일 직접 움직이도록 하지. 맡겨주게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 박실장님. 부탁드릴게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건가? 뭐든지 말만 하게나.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겠네."
"뭐 그렇게 거창한 부탁은 아니고요. 혹시 박실장님이 잘 아시는 노래방 도우미 분이 계십니까?
수빈의 말이 끝나자 박실장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