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111화 (111/236)

# 111

36 - 1

새롭게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아침부터 수빈은 그동안 하던 작업들을 끝맺음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완성한 작업물들을 서류 가방에 챙겨 넣고,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전 11시경 박수종 감독을 만나기 위해 충무로에 있는 [벨 스튜디오]에 도착한 수빈은 박감독의 사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서 오게나. 수빈군. 요즘 정신없이 바빴지?"

"네. 좀 그렇네요.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이제 좀 여유가 있습니다."

"난 수빈군이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고 있었네. 시비도 사람을 봐가면서 걸어야지. 그쪽에서 멋모르고 가만히 있는 호랑이를 잘못 건드렸지. 내가 보기엔..."

박감독의 말이 길어질 거 같자 수빈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내일 찍을 [디스패치] 뮤직비디오의 콘티를 짜왔습니다.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수빈이 내미는 콘티를 주의 깊게 살펴본 박감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림 솜씨는 여전하군. 이게 두 가지 키스를 합친 거라고?"

"네. 미국에서 1970년대 중반에 활약한 하드락 밴드 [KISS],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인 [The Kiss], 그 두 가지를 보고 느낀 점을 합쳐서 제 나름대로 하나의 콘티로 표현해봤습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좋아. 줄거리 자체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표방하고 있지만 감각이 팍팍 튀는군. 이게 외국 시장을 노리고 찍는 뮤비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뮤비라 너무 내용이 어려우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심플하게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만들어봤습니다."

"난 나쁘지 않은데? 근데.. 이거 주요 배역이 두 개의 안으로 되어 있는데 이유가 뭔가?"

"내일 실제로 찍을 때 여자 주인공의 연기가 어느 정도 받혀줄지를 저도 아직 잘 몰라서요. 만약 연기력이 충분하다면 1안 그대로 갈 거고,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2안으로 역할 자체를 완전히 뒤바꿀 겁니다."

"알겠네. 그거야 감독인 자네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난 자네가 바라는 대로 영상만 잘 뽑으면 되겠지. 촬영에 필요한 것들은 어떻게 할 건가?"

"저희 쪽에서 코디와 분장을 맡겠습니다. 감독님은 소품, 조명, 동시 녹음 그리고 배경 쪽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음향이나 편집은 어차피 저랑 감독님이 촬영이 다 끝난 다음에 같이 작업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하지. 내일 저녁에 찍을 거라고 했지?"

"네. 내일 저녁 7시부터 양수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찍을 예정입니다."

"7시라.. 시간 맞춰 준비하도록 하지. 근데 말이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걸 자네 돈으로 찍겠다는 건가? 난 어제 잘못 들은 줄 알았어. 회사에서 경비를 지불하지 않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회사에서 경비를 대기로 했지만.. 일반적으로 뮤비에 책정되는 금액 정도로는 제가 원하는 퀄리티의 영상을 뽑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금을 좀 보태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에게는 일종의 예행연습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감독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어떤 부탁 말인가?"

"제가 이번 촬영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들을 넉넉하게 계산해서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니 감독님이 꾸릴 수 있는 최고의 베스트로 스태프를 꾸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수빈의 말에 박감독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인가? 수빈군 정도면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까탈스럽고 비싸게 구는지.. 특히 지금처럼 하루 만에 사람들을 부르려면 몇 배는 더 줘야 할 건데. 지불이 가능하겠나?"

걱정 어린 박감독의 말에 수빈이 환하게 웃었다.

"감독님. 제가 요즘 수입이 짭짤하다 못해 넘쳐흐릅니다. 새삼 다시 또 느끼지만, 이 세상에 만연한 자본주의란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건 아니더군요. 자금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진장으로 늘어나더군요. 그러니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베스트로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박감독이 무릎을 탁 치며 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군! 아주 좋아. 자금이 충분하다는데 내가 뭘 못하겠나. 이거 서둘러야겠군. 자네 눈이 좀 높은가? 어지간한 인간들은 성에 안 찰 테고.. 자네가 원하는 수준으로 맞추려면 빨리 연락을 돌려야겠어."

맘이 급해졌는지 박감독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발을 동동 구를 때 수빈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감독님. 전 감독님의 촬영 테크닉이나 감각들이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것보다 촬영에 임할 때 드러나는 감독님의 넘쳐흐르는 열정, 구도자적인 모습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 등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수빈이 던지는 아부성 가득한 발언에 박감독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경직되었다. 그리고 화광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수빈을 직시하며 말했다.

"드디어 지금인가?"

박감독의 말에 이해를 못한 수빈이 되물었다.

"네?"

"자네 성격상 좀 전의 발언은 절대로 그냥 한 게 아니지. 나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던진 거 아닌가? 그것도 자네가 직접 제작할 영화. 아니라고 부정하지 말게나. 이미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으니까.."

박감독의 말에 수빈은 감탄성을 터뜨렸다.

"허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바본 줄 아나? 자네처럼 다재다능하고 연출력이 뛰어난 사람이 다른 감독 밑에서 디렉팅을 지시받으며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노릇이지. 이번 뮤비도 그 일환 아닌가? 자신의 영화를 찍기 전에 하는 예행연습. 비싼 돈을 주고 최고의 스태프를 모아달라고 하는 것도 영화를 찍기 전 미리 사람들을 한번 알아보겠다는 속셈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수빈의 박감독의 날카로운 말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거 제가 여태껏 박감독님을 잘못 알고 있었군요. 이렇게 예리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예리하다고? 아냐. 그런 거랑 무관해. 영화는 나 박수종 일생의 꿈이자 목표이고 가슴에 맺힌 한(恨)이라네. 그러다 보니 수빈군에게서 본능적으로 느낀 거지. 예리하게 분석 따위를 해서 안게 아니라고.. 어떤 영화를 찍을 생각인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빠르긴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군."

수빈은 흥분한 박감독을 보며 슬며시 웃으면서,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저도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금이 넉넉해지다 보니 저절로 욕심이 나더군요. 저도 사람인지라.."

수빈은 각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제가 쓴 각본입니다. 촬영이 들어가는 시점은 지금 찍고 있는 영화의 해외 로케가 끝나는 6월 말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감독이 떨리는 손으로 각본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이게 자네가 쓴 각본이라는 거지? 이걸 자네가 감독하고 내가 촬영한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제가 감독을 하고 박감독님이 찍으실 겁니다. 제 머릿속에서 배역에 따른 캐스팅도 이미 다 끝났습니다만.. 내용이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라 보시기에 굉장히 진부하다고 느껴지실 겁니다."

"내용이 사랑 이야기라 진부하다고? 그게 뭐 어때서? 자네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찍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타이타닉이나 다 똑같이 진부한 사랑 이야기 아닌가."

수빈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보세요. 제가 각본을 쓰면서 3가지에 주안점을 두고 썼습니다. 첫째는 저렴한 제작비, 둘째는 영상과 음악의 앙상블, 마지막으로 철저한 대위법. 그 3가지를 염두에 두시고, 제가 따로 적어 놓은 주석을 같이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겁니다."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이고 대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박감독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박감독님. 전화부터 돌리세요. 대본은 나중에 보시고.."

박감독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런.. 큰일 날뻔 했군. 알겠네. 내가 내일 베스트로 불러 모아주지. 걱정 말게나."

수빈은 밴을 타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하면서 주식시세표를 잠시 살펴보았다.

'10프로 조금 넘게 빠졌네. 생각보다 얼마 안 빠졌어. 역시 저번에 물량을 한번 받아냈던 게 효과가 있나 본데.. 뭐 작으면 작은 대로 벌면 되겠지.'

수빈이 [디젤] 한국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을 때, 한남동에 있는 한 대저택에서는 연신 고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 쾅!

백화점 사장인 김병호가 시뻘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아버지! 전 그렇게 못합니다."

그 말에 한복을 입은 김강식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말했다.

"병호가 스스로 못 물러나겠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김비서. 내일 이사회를 긴급 소집하게나. 안건은 사장 교체 건이라네."

굳은 얼굴로 옆에 기립해 있던 김비서가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모습을 본 김병호가 악을 쓰다시피 하며 말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인 이 병호가 해결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이번 일은 제가 잘못해서 생긴 일도 아니잖습니까?"

김강식 회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루만지듯 말했다.

"병호야. 네 마음 아비인 내가 잘 안다. 자식 농사가 네 뜻대로 잘 되지 않지?"

회장의 위로에 김병호가 울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윽.. 네. 아버지."

"내가 너를 50년 가까이 키우면서 지금 너랑 똑~같은 심정이었다. 너도 이제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겠구나."

"...."

"어떡할 거냐? 너 스스로 물러나면 일본에 있는 백화점 사장 자리로 발령을 내어 주마. 아니면.. 그냥 넌 집에서 백수로 지내야 할 거다."

김회장의 말에 몸서리를 치던 김병호가 잠시 후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잠시 후 김병호가 떠나고 둘만 남자 김회장이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사 결과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자들이 일단 4명 정도로 압축되고 있는데, 저희 쪽 분석으로는 그중에 이 정도의 모사는 없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연예인질 한다는 젊은 놈에 관해서는 알아봤나? 천재로 소문난 놈이라며?"

"네. 나름 머리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고작 23입니다. 이 정도의 일을 꾸미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23이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무리긴 하지. 지금 사태는 사람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서 통찰력이 대단한 인물이 꾸민 일이야. 젊은 놈이 했다고 보기에는 수법이 너무 노련해. 이런 일을 한두 번 꾸민 게 아닌 거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우리 쪽에서 파악하지 못한 인물이 배후에 있는 게 아닐까요?"

"일단 계속 더 조사해 보게. 당장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백화점 주식이 얼마까지 떨어질 거라고?"

"분석팀 말로는 오늘 20프로 가까이 떨어질 거랍니다. 내일도 그 정도 선에서 하락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에 사장 교체 뉴스가 나가면, 주중을 거쳐 주말쯤 다시 반등을 할 거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흠. 일단 저쪽 당사자랑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게.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하고 소를 취하시키도록 만들어야겠지. 멀쩡한 손주 놈을 전과자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야 주가도 원상태로 회복될 테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회장이 소파의 손걸이를 톡톡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을 꾸민 놈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정말 궁금하군. 잡아서 아주 껍데기를 벗겨서 회를 쳐야만 내 속이 시원하겠어.."

한편 그 시각. 수빈은 어처구니가 없는 눈빛으로 건너편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인간 눈에는 내가 아주 호구로 보이나 보지? 요즘 어딜 가나 이런 인간들이 넘쳐나네..'

수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명함을 힐끗 쳐다보았다.

- 광고판촉부. 부장 조태영.

'이 인간을 어떻게 박살을 낼까..'

수빈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금테 안경을 쓰고 개기름이 흐르는 통통한 얼굴의 조부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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