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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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8시. 아침 일찍부터 수빈은 [디스패치]로 마지막 공중파 음악 방송을 하기 위해 SBC 등촌동 공개홀로 출발하였다.
일요일 오전 11시 반. 수빈은 다른 BBG 멤버들과 함께 모든 리허설을 끝마치고 대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핸드폰을 열심히 조작하고 있는 수빈의 곁으로 마빈이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괜찮냐?"
"뭐가?"
"경빈이 말로는 엔카 방송이 나간 다음 날부터, 그러니까 불매 운동이 시작된 그날부터 종편에서 가끔씩 헛소리하는 인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데.."
"아. 그거.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음성 파일이 진짜인지 국과수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아직까지는 무고죄라고 볼 수 없다면서 실드를 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게 음성 파일이 진짜라는 반증이지. 만약 상대방이 가짜라고 판단했으면 실드 치는 인간들이 가끔씩 등장하겠냐? 매시간 떼거지로 나와서 날 잡아 죽이려고 들겠지. 안 그래? 그리고 상대방이 명색이 재벌 아니냐.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혹시나 말이다. 너 말대로 상대방이 재벌이잖아. 만약 국과수에서 결과를 조작하면.."
걱정 어린 마빈의 말에 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마빈. 상대방은 재벌이지 신은 아니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전지전능한 건 아니라고. 국과수 결과를 조작한다? 그런 건 전임이나 현직 대통령도 못하는 일이라고.."
"난 그래도 걱정이 되네. 저쪽에서 무슨 수법을 들고 나올지 몰라서.."
"고맙다. 친구. 걱정해줘서.. 다음 주 중이면 국과수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러면 모든 일은 깔끔하게 정리될 거다. 며칠만 더 기다리면 돼."
"후. 알겠다. 그런데.. 넌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냐? 너와 관련된 새로운 뉴스라도 나왔는지 검색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마빈의 물음에 수빈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책 좀 살려고. 정말 좋은 세상 아니냐? 핸드폰으로 몇 번만 두드리면 지식이 듬뿍 담긴 책들이 늦어도 하루 만에 집으로 배달된다고. 얼마나 멋진 세상이냐?"
"그러냐? 무슨 책을 보려고 그러는 건데?"
마빈이 고개를 기울여 수빈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책 제목들을 살펴보았다.
"[망하니까 주식이다], [주식주의자], [주식의 제왕], [주식과 채권의 노래], [군사, 주식을 하다].. 너 주식 투자하려고?"
"당장 투자를 한다기 보다 일단 제대로 공부부터 좀 해보려고."
"그래? 하긴 넌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지. 수빈아. 내가 뭐 하나 물어보려고 하는데.."
"뭘?"
"언젠가 연예계를 은퇴하게 되면.. 나도 공부를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네가 보기엔 난 어디 쪽이 적성이 맞는 거 같냐?"
"음악 쪽으로?"
"아니. 음악은 빼고."
"흠. 솔직하게?"
"그래. 솔직하게 말해 줘."
"적성을 떠나서 넌 무조건 경영(經營)을 배워야지. 언젠가는 할아버지로부터 전부는 아니더라도 회사 한두 개 정도는 물려받을 거 아니냐? 그때를 대비해서 공부를 해둬야지."
수빈의 말에 마빈이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수빈아. 네가 보기엔 나라는 사람이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냐? 여태껏 음악만 해왔는데도?"
"당연하지. 없다고 생각했다면 경영이 아니라 회계를 추천했겠지.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넌 그 사람이 돈 빼돌리는 게 있는지 뒤에서 잘 살펴보라고 말이야."
"어떤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거야?"
"일단 넌 성격이 차분하고 진중해. 이건 돈 주고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넌 머리가 좋은 편이라 지식 습득도 빠르고, 새로운 일에 적응도 금방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넌 밴드 리드를 해본 경험도 가지고 있잖아? 거기에다 엄청 잘생겼고 영어도 끝내주게 잘하지. 이 정도만 해도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최고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힘들 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친구를 두고 있지. 넌 무적의 조커를 품속에 가지고 있는 거라고."
수빈의 말에 마빈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은 후 마빈이 수빈의 어깨를 부드럽게 터치하며 말했다.
"너한테 듣는 몇 마디의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지 모르겠다. 나 혼자 몇 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고민한 게 다 부질없네. 네가 내 친구란 걸 깜빡하고 있었어. 고맙다. 수빈아."
"요 며칠 계속 얼굴이 안 좋더니 그걸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걱정 마라. 내가 보기엔 넌 경영자로서 충분히 잘 해 나갈 거다. 힘들 땐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알겠지? 친구."
"알았다. 친구."
그때 방송 스태프가 대기실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방송 10분 전입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한편 그 시각 YK 사옥.
박실장과 법무팀 조대리 그리고 홍보팀 김대리 세 명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박실장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다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지 초조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한 거야?"
박실장의 말에 법무팀 조대리가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정보료로 2장이 나갔습니다. 2장이면 특급보다 더 비싼 가격입니다. 믿고 기다려 보시죠."
"지금 몇 시지?"
"12시입니다."
"12시라. 지금쯤이면 연락이 와야 하는 시간인데.. 수빈군은 지금 어디 있지?"
박실장의 질문에 홍보팀 김대리가 대답했다.
"지금 SBC 인기가요 출연을 위해 등촌동 공개홀에서 대기 중일 겁니다. 인기가요가 12시 10분부터 방송이니까 곧 시작할 겁니다."
"방송이 언제 끝나나?"
"1시 20분에 방송이 끝납니다. 아마 1시 15분에서 17분 사이에 1위 곡을 발표할 겁니다."
"후. 타이밍이 들어맞았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요즘 종편에서 하는 짓이 심상치 않아. 어제 성배우의 파격적인 돌발 발언 이후로는 그쪽 대응이 아주 필사적으로 바뀌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거지. 오늘 아침부터는 종편 쪽에 로비를 죽기 살기로 하고 있다고 들었네. 저쪽에 시간을 더 주면 우리 쪽에 좋을게 하나도 없어. 이번 건으로 저쪽을 완전히 주저앉혀야만 한다고.."
"수빈씨가 방송에서 1위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자막으로 속보가 나가면 아주 안성맞춤일 텐데요.."
"그러면 딱인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법무팀 조대리가 끼어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확실한 정보니까 연락이 반드시 올 거.."
그때 조대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든 사람들의 입이 순식간에 닫히고 모든 눈이 조대리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숨 막힐듯한 긴장감 속에서 조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 정말입니까?"
[....]
"네? 뭐라고요? 아니.. 이봐요! 지금 나랑 장난칩니까?"
조대리의 음성이 커지고 얼굴이 찌푸려지자 회의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촥 가라앉았다. 박실장이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통화 중인 조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실팬가? 뭐라고 하는 건가?"
조대리가 핸드폰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막고서 대답했다.
"저쪽에서 돈을 더 달라고 합니다. 어떡할까요?"
"얼마를 더 달라고 하는 건가?"
"원래 1장인데 1장 더 달라고.."
박실장이 말을 잘랐다.
"내가 돈을 낼 테니 3장을 준다고 말하게. 그 대신! 잡소리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원본 파일을 보내라고 하게. 우리가 독점한다고 전해. 헛소리 계속하면 내가 결단코 그냥 두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알겠습니다. 실장님."
잠시 후 세 사람은 도착한 원본 파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박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잘 나왔군. 김대리. 지금 몇 시지?"
"12시 40분입니다."
"시간도 늦지 않았고.. 좋군. 김대리. 저번에 수빈군이 기자회견할 때 협조해준 곳 있지?"
"네. 3곳입니다. 방송국은 SBC, 신문사는 N 일보, 나머지 한 곳은 인터넷 뉴스사라 잘 모르실 겁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SBC 인기가요 방송 중에 SBC 뉴스 속보가 터지면 아주 짠 것처럼 맞아떨어지겠군. 생각만 해도 짜릿해.. SBC 쪽부터 파일을 보내게. 단, 시간은 수빈이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친절하게 자막으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게나. 나머지 두 군데는 SBC가 터뜨리고 나면 바로 내 보낼 수 있도록 시간 조절을 좀 하고.."
박실장의 말에 홍보부 김대리가 흥분한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맡겨 주시죠. 차질 없이 터뜨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법무팀 조대리가 끼어들었다.
"자막이나 뉴스를 내보낼 때 말입니다. 단어 하나를 반드시 넣어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래야 효과가 최고로 발휘될 겁니다."
"어떤 단어 말입니까?"
조대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주(逃走)."
한편 SBC 등촌동 공개홀에서 1위 후보 곡으로 디스패치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BBG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1위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모든 멤버들의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날라왔다.
- 1위 수상 소감은 반드시 수빈이 할 것. 내용은 알아서 하되 충분히 시간을 끌 것.
문자를 받은 멤버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마빈이 입을 열었다.
"뭐 우리가 신경 쓸게 없네. 어차피 마지막 방송이라 리더가 해야 되는 거 아냐. 수빈이 네가 알아서 해라."
문자를 보며 무슨 일인지 고민을 하고 있던 수빈이 대답했다.
"알았어. 내가 할게."
잠시 후 최종 1위 곡이 발표가 되었다. BBG의 디스패치가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수빈이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무대 가운데에 설치된 스탠딩 마이크 앞에 우뚝 섰다.
그 순간 일요일 오후를 맞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역과 터미널 등지에서 차 시간을 기다리며 TV를 통해 인기가요를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BBG의 디스패치가 이렇게 3주 연속 1위를 하게 된 건 모두 팬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최근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끝까지 저와 저희 멤버를 믿고 지지해주신 팬 여러분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때 SBC 인기가요 방송 화면 아래로 뉴스 속보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뉴스 속보 - BBG의 리더 수빈의 폭행 사건과 관련되어, 공개된 음성 파일을 통해 수빈을 음해하기 위해 무고 한걸로 의심받아 현재 검찰에서..]
"앞으로도 저희 BBG는 팬 여러분들을 위해서 보다 새롭고, 보다 거듭나는 모습으로, 디스패치라는 뜻처럼 팬 여러분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검찰에서 무고죄로 조사를 받던 모 백화점 사장 아들인 김 모 씨가, 미국으로 도주하기 위해 인천 공항을 통하여 출국을 시도하려다 출국 금지가 걸려있어서, 출국 심사대에서 거부당하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공항에서 상주하던 모 기자에게 사진이 찍혀서 현재..]
"감사합니다. 여러분."
수빈이 수상 소감을 끝마치고 트로피를 높이 드는 그 순간, N 일보 홈페이지와 인터넷 뉴스사의 홈페이지에 대문짝만 하게 사진 한 장이 실렸다.
한눈에 보아도 최고급으로 보이는 옷들을 덕지덕지 껴입고, 명품 캐리어를 질질 끌며,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인천 공항 출국 심사대를 등지고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사진과 함께 작성된 김호진의 도주 실패 기사가 순식간에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전국을 뒤덮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비겁하게 몰래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김호진에게 자의적으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동안 백화점 불매 운동이 번지는 걸 지켜보면서도 ‘혹시..’ 하며 주저하던 사람들도, ‘아직..’ 하며 관망하던 사람들도, ‘설마..’ 하며 보류하던 사람들도 일시에 단호한 태도로 등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불매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일시에 깨끗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서울 강북에 위치한 한남동의 한 저택. 남산 자락 아래에 위치한 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어.."
돈으로 떡칠한 듯 화려한 거실에서, 고희(古稀)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비단으로 지어진 한복을 입고 TV를 보고 있다가 신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옆에 서있던 중년의 남자가 노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한다면.."
노인이 말을 잘랐다.
"이미 틀렸어. 김비서. 이건 이길수가 없는 싸움이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고.. 호진이는 지금 어디 있나?"
"청담동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다 취해서 자고 있다고 합니다."
"병호는?"
"대전 백화점 사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병호에게 연락해서 전해. 싸우다 졌으면 백기 들고 목을 내밀어라고.. 그래야 상대방이 깔끔하게 목을 쳐줄 거 아닌가."
노인의 말에 남자가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회장님. 회장님의 아드님과 친손자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뭐? 깡패들을 보내서 저놈을 처 죽이기라도 할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알아서.."
노인이 다시 남자의 말을 잘랐다.
"그러다 걸리면? 이보게. 김비서. 그런 짓을 하다 걸리면 아마 그룹이 통째로 흔들릴 거야. 그리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법일세. 이길 때 잘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 때 잘 지는 것도 중요해.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법이라네. 빨리 전화하게. 병호가 홧김에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
중년의 남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비서. 아니 수호야. 병호랑 너랑 친한 거 나도 잘 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같이 놀았던 사촌지간이니 가슴이 아프겠지. 하지만.. 내가 여태껏 돌아가는 걸 쭉 지켜봤는데 이번 일의 배후에는 머리가 아주 돌아가는 군사가 한 명 있어. 일개 연예기획사와 젊은 연예인 한 놈 따위가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뒤에 있는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예사 놈이 아냐.. 지금은 바짝 엎드려야 해. 그놈이 누군지 알아내야 비로소 상대가 가능해지는 거야. 내말 이해하겠냐?"
중년의 남자가 노인의 말에 수긍했는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 노인이 혼잣말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로 치밀하게 작전을 짤 수 있는 모사(謀士)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군. 머리 쓰는 게 보통이 아냐."
그 시각 수빈은 잡혀 있는 행사를 소화하기 위해 분당으로 출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