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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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에게 지목을 받은 여기자가 물었다.
"조금 전 음성 파일이 진실이라면.. 이건 누가 보더라도 상대방 측에서 수빈씨를 노리고 모략을 꾸민 거 같은데요. 향후 대책이나 계획 같은 건 있으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수빈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만약 음성파일이 거짓이라면 제가 약속드린 것처럼 제가 동대구역에서 삼천 배를 올리고 연예계를 은퇴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들려드린 건 아무런 조작도 없는 파일이니까요. 그리고.. 이번 일을 꾸민 김호진씨를 무고죄로 이미 검찰에 고발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동시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 위해 법원에도 소장을 접수시켰습니다."
"손해배상은 어느 정도의 금액으로 청구하셨습니까?"
"100억입니다."
100억이라는 소리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자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수빈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자님. 그럼 아무 죄 없는 절 죽이려 들고 연예계에서 매장시키려고 드는 건 작고 가벼운 일입니까? 만약 저에게 음성 파일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기자님들이 저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시면서 열심히 기사를 작성해서 올리고 있겠죠. 그리고.. 오전에 들으신 것처럼 저 자신은 이미 모 업체에게 억대의 손해 배상을 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그런데 100억이 과하다?"
수빈은 눈에 힘을 주고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며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재벌집 아들 아닙니까? 집에 돈 많잖아요? 집구석에 돈이 썩어나갈 정도로 많아서 재벌 아닙니까? 그 많은 돈 어디에 씁니까? 죄 없는 사람을 음해하고 처 죽이려고 할 때만 쓰는 겁니까?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할 때 쓸 돈은 많고, 손해배상을 해야 할 때는 돈이 없다? 그런 더러운 논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수빈이 붉어진 눈시울로 울먹거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많다는 돈! 나도 한번! 거하게 한번 받아봅시다! 그래야 이 세상이 그나마 공평한 거 아닙니까? 안 그러면 저같이 힘없는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수빈은 눈에서 힘을 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100억이라는 금액은 법적으로 손실 계산과 타당성 검토를 한 상태에서 정한 금액입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신청하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똑똑하고 자애로우신 판사님들에게 욕먹습니다. 저희 쪽 변호사분 말로는 절대로 과한 금액이 아니고 충분히 받아낼 자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법원 판사님들의 현명하고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그런 명징한 판결을 기대할 뿐입니다. 제 답변은 이 정도로 마치고.. 다른 기자분에게 질문을 받겠습니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탓인지 기자들이 번개처럼 손을 들었다. 수빈은 검은색 점퍼에 파란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빨간색 넥타이를 맨 남자 기자를 지목하며 생각했다.
'옷 입는 게 특이한 기자분일세.'
지목을 받은 기자가 질문했다.
"N 일보 사회부 기자입니다. 수빈씨의 억울함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고죄에 해당한다는 것도 수긍이 되고, 이번 사태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이제는 충분히 납득이 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시는지.. 말씀해 보시죠."
"아까 처음에 단상에 서서 한 발언 중에.. 이번 일은 한 사람의 치밀한 자작극이며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노린 대규모 사기극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치밀한 자작극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노린 사기극이란 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빈은 마이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숫자를 또박또박 읊조리기 시작했다.
"구백 이십 이억 삼천 사백 오십만원 그리고 칠백 육십 이억 구천 삼백 사십 일만원. 둘 다 엄청난 거액의 돈입니다. 지금 제가 말한 거액의 돈이 어떤 돈인지 기자님은 짐작하시겠습니까?"
기자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이번 사태가 터진 건 저번 주 목요일 오후쯤입니다.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러니까 주말을 포함해서 총 5일 동안.. YK 시가총액이 700억 넘게 빠졌습니다. 목요일 4프로, 금요일 8프로, 오늘 현재 6프로가 또 빠졌죠. 5일 사이에 주가가 바닥을 치면서 날아간 돈이 70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지 재밌는 게.. 반대로 말이죠. 그 5일 동안 화랑 백화점 주식은 목요일 3프로, 금요일 4프로 그리고 오늘 또 3프로가 올랐죠. 시가총액이 900억이 넘게 상승했습니다. 두 개를 합치면 1,600억이 넘는 돈이 왔다 갔다 한 겁니다. 아무 죄도 없는 저를 폭행범이라고 고발하면서 말이죠. 기자님. 재밌지 않습니까?"
"...."
기자가 즉답을 하지 않자 수빈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호진씨가 저를 음해하는 바람에 아무 죄 없는 YK 주식 보유자들이 며칠 사이에 700억이 넘는 손실을 봤습니다. 그냥 눈뜨고 앉아서 당한 거죠. 반대로 화랑 백화점 주식 보유자들은 앉아서 900이 넘게 이득을 봤습니다. 이게 대규모 사기극이 아니라고요? 그럼 얼마가 되어야 대규모 사기극이라는 겁니까? 몇 조 정도는 되어야 합니까? 전 이번 사태가 평범한 연예인에 불과한 저 하나를 단순히 잡아 죽이기 위해 작업을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아직까지는 저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고 추축에 불과합니다만.. 결과는 검찰에서 자세하게 조사를 해봐야 알겠죠.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고 봅니다. 마지막 한 분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수빈의 마지막이라는 말에 기자들이 재빨리 손을 들었고, 수빈은 기자들 중에 검은색 외투에 하얀색 니트를 받쳐 입고 파란색 목도리를 감고 있는 여기자를 지목했다.
기자들이 손을 들고 수빈이 다른 기자를 지목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금일 마감시간을 20분 앞둔 주식시장에서 급변이 발생했다.
화랑 백화점 주식 매물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주가가 급전직하로 꺾인 것이다. 거의 묻지마 수준으로 쏟아지는 매물로 인해, 한번 아래로 꺾인 화랑 백화점 주가가 질풍처럼 하한가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5분도 안되어 하한가를 찍어버렸다. 5일간 야금야금 올라가 10프로 상승했던 주식이 단 5분 만에 30프로가 빠져버린 것이다.
한편 기자회견장에서 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녹음 파일 말고 수빈씨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까? 상대방 측에서 녹음 파일이 조작이니 뭐니 반박을 하고 나와서 시간을 질질 끄는 작전을 쓸 거 같은데요. 힘 있는 재벌들은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수빈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재벌 정도 되면 엄청난 수임료를 받는 변호사를 여러 명 내세워서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서 세인의 관심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작전을 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 알아두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는 증인이 너무 많습니다. 무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단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 그분들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검찰 쪽에서 그분들을 불러서 증언을 청취해보면 사실관계가 금방 다 규명될 겁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수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혹시 증언을 하시는 분들 중에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고죄는 죄 없는 사람에게 형사 책임을 씌우기 위해서 거짓으로 사건을 조작할 때 받는 벌입니다.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 무거운 범죄죠. 그리고 모해위증죄(謀害僞證罪)라고 있습니다. 이것도 무고죄랑 비슷합니다. 상대방에게 형사 책임을 지우기 위해 법정에서 거짓으로 위증했을 때 받는 죄입니다. 이번에 제가 재판을 받을 때, 증인으로 나온 분이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증언을 한다면 여기에 해당하게 될 겁니다."
수빈은 잠시 틈을 둔 다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인 위증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지만.. 모해위증죄는 그 죄가 더욱 무거워서 가중 처벌 대상입니다. 10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되죠. 벌금 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죄에 해당하면 오로지 감방에서 징역을 사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증인 여러분. 전 호구가 아닙니다. 그냥 유야무야 봐주면서 좋게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증언을 하실 때, 부디 잘 생각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감방에서 콩밥을 먹는 일은 부디 없었으면 합니다."
'이 정도로 겁을 줬으면 10명 중에 한두 명이라도 똑바로 증언을 하겠지. 같이 죽기는 싫을 테니.. 그럼 나머지 사람들이야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질 거고. 그런 썩어빠진 인간들 사이에 의리 같은 게 존재할 리도 없지. 작전대로 잘 끝난 거 같은데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렇다면.. 마무리는 역시 돈이지. 내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작전을 짠 건 다 대박을 터뜨리기 위함이잖아.'
수빈은 한숨을 깊게 쉬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아무 죄 없는 저도 피해를 봤지만.."
수빈이 침중한 표정으로 옷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로 인해 손해를 보신 YK 주식을 가지고 있는 주주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록 제 잘못은 아니지만.. 앞으로 보다 열심히 활동을 해서, 주가 상승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수빈이 카메라를 향하여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게 진정한 돌려 치기지. 대놓고 화랑 백화점 주식을 언급하는 건 하수의 술책. 또 다른 분란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 YK 주식을 언급하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대급부로 화랑 백화점 주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게 상책 중의 상책. 지금쯤 주가가 많이 떨어졌으려나..'
수빈은 허리를 펴고 안타까운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공인으로서 국민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수빈이 좀 전보다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첫째도 국민, 둘째도 국민..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밉보이면 끝인 거야.'
수빈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정중한 톤으로 말했다.
"이상으로서 오늘 저의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 기자분들은 잠시 후 저희 소속사에서 나눠드리는 참고 자료를 읽어봐 주시고 회사로 문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수빈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매니저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한편 그때, BBG 전용연습실에서 기자회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경빈이 넋이 살짝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닭살 돋았어. 저 형 좀 무서워.. 난 죽을 때까지 수빈이 형한테는 절대 안 덤벼야겠다."
옆에 있던 로빈이 경빈의 말을 받았다.
"야! 우리 중에 수빈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 진짜로 붙으면 다들 한방에 개구리처럼 바닥에 쭉 뻗을걸..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출국 준비나 하자. 기자회견 다 끝났으니 이쪽으로 오겠지."
"네. 형.."
그때 한쪽 구석에서 마빈이 까닭 모를 한숨을 깊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썩을 놈이.. 저런 걸 가지고 있었으며 나에게 미리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지. 이거 다시 물릴 수도 없고.. 어떡한다.."
한편 그 시각. 대전에 있는 화랑 백화점 사장실. 화려한 집기들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사장실에서 뭔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 우장창창. 쾅. 콰쾅.
사장실 한구석에 고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기름을 발라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긴 30대 후반의 남자가 굳은 얼굴로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평상시 가장 자신 있는 클럽이라는 6번 아이언을 들고 사장실 집기들 다 때려 부수고 있는 김병호 사장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후. 사장님. 이제 그만하시죠."
김병호가 호흡을 헐떡거리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헉헉. 나보고 그만하라고? 박실장. 지금 내가 그럴 기분으로 보여? 5분 만에 얼마가 빠졌다고 했지?"
"30프로니까 2,900억 정도 빠졌습니다."
"하! 어이가 없네. 3천억이라.. 아들 하나 잘못 둬서 5분 만에 3천억이 날아갔다는 거지? 호진이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죽전 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아주 죽여버릴 거야. 이 새끼가 일을 꾸미려면 끝까지 잘 마무리를 짓던가.. 오기만.."
그때 김병호의 핸드폰이 세차게 울었다. 박실장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김병호에게 건네주었다. 액정에 떠있는 발신자를 보며 김병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어 나에게 전화를 다 준 거지? 후우.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김병호가 핸드폰의 통화 스위치를 눌렀다.
"네. 회장님. 김병호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김병호의 얼굴이 점점 더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김병호가 분을 못 이겨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신중하게 판단하겠습니다."
[....]
"네. 네. 잘 알겠습니다. 회장님. 들어가시죠."
통화가 끝나자 김병호 사장이 핸드폰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다 죽여버릴 거야!"
김사장이 6번 아이언을 치켜들고 다시 집기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 우장창창! 쾅! 쾅!
그날 저녁 수빈은, BBG 멤버들과 함께 홍콩에서 열리는 NAMA 무대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났다. 2박 3일의 일정을 끝마치고 수빈이 다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김호진과 화랑 백화점은 넷상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었고, 화랑 백화점 주가는 끝을 모르는 무저갱으로 추락하듯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수빈이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인 목요일 오전 11시경.
사무실로 나간 수빈은 박실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가볍게 방문을 노크하며 수빈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이번 작전의 성과물을 확인할 수 있겠네. 아무쪼록 대박이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