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34 - 3
토요일 오전 11시경.
수빈은 박실장의 방에서 단둘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실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올인할 생각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나?"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죠.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수빈의 단호한 태도에 박실장은 깊은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올려진 노란색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후. 알겠네.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해주겠네."
수빈은 박실장의 방을 나와서 BBG 전용연습실로 내려갔다. 멤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다 같이 연습실 바닥에둘러 앉았다. 수빈이 멤버들을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뮤뱅에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 명색이 내가 리더인데.."
수빈의 말을 끊고 경빈이 말했다.
"형!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우리가 여태껏 형 덕을 얼마나 봤는데요. 우리 5명이 똘똘 뭉쳐서 무대 하나는 끝내주게 마치고 내려왔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케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 무대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된다. 넌 좀 어떠냐? 지금 난리도 아니던데. 네가 아무런 해명도 안 하고 있다고 다들 널.."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케빈을 보며 수빈이 밝게 웃었다.
"걱정 마라. 내가 누구냐. 담 주면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될 거다."
그때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마빈이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이냐? 내가 듣기론 수빈이 네 돈으로 디젤에 1억이 넘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마빈의 말에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여간 이 바닥 소문은 어쩜 이렇게 빨리 퍼지는지.. 회의 때 분명히 비밀이라고 말했는데도 벌써 다 퍼졌으니. 후우. 이러니 내가 멤버들하고도 속 편하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게지.'
"돈 걱정은 마라. 그 정도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다들 알잖아? 올해 내가 대박 난 거.. 그리고 그 돈 다 돌려받을 거다."
수빈의 말에 마빈이 격앙된 목소리로 거칠게 소리쳤다.
"무슨 수로? 네가 무슨 수로 그 돈을 다시 돌려받을 건데?"
"지금은 자세히 말 못하고.. 아무튼 다 돌려받을 거니까 걱정 마라. 담 주면 모든게 다 잘 풀릴 거다."
수빈의 말에 마빈이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걸 본 수빈은 마빈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빈아. 어이. 친구. 걱정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누구에게 당할 사람으로 보여? 아닌 거 알잖아. 그러니 넌 차분히 지켜보고 있으면 된다."
수빈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멤버들과 눈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나 걱정하지 말고 평상시처럼 지내면 돼. 오늘 음중이랑 내일 인기가요도 같이 못 갈거 같으니까 부탁 좀 하자. 내가 다음 주에 한턱 쏘마."
경빈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재빠르게 대답했다.
"쇠고기요?"
"그래. 인마. 아예 소를 한 마리 잡아 줄 테니 이번 주만 고생 좀 해줘라. 부탁한다."
그날 저녁 수빈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잘 진행되고 있군. 내가 아주 천하의 몹쓸 놈으로 되어 있네. 다들 날 만나면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기센데.. 흠.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제대로 불을 질러줘야겠지."
수빈은 팬카페로 접속하며 생각했다.
'낮에 홍보부 김대리가 부탁했지. 이왕이면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어투로 적어주길 바란다고. 그래야 저쪽을 찾아내기 쉽다고.. 뭐라 적을까.'
수빈은 팬카페에 들어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수빈입니다. 지금 저에 대한 많은 오해와 음해들이 인터넷상에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절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만에 하나! 경찰 조사 결과 제가 정말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결론이 나온다면, 전 서울을 떠나서 부모님의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동대구역 앞에서 할복을 하겠습니다. 아니 할복은 너무 극단적이고 지금 쇼하냐고 비난하실 테니 사죄의 뜻으로 삼천 배를 올리겠습니다. 그런 후 연예계를 은퇴하겠습니다. 음. 술을 한잔했더니 글이 좀 어지럽네요. 아무쪼록 비통한 저의 심정을 부디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팬 여러분. 전 정말로 억울합니다. 모든 건 경찰 조사에서 밝혀질 테니 절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수빈은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았다.
'뭐 이 정도면 불을 제대로 지피겠는데.. 아주 활활 타오르겠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빈은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걸어갔다.
그날 밤.
그동안 수빈이 인터뷰를 전혀 응해주지 않아 소재가 고갈되어 힘겨워 하던 수많은 기자들이, 수빈이 팬카페에 올린 글을 옳다구나 하며 기사로 옮겨 쓰기 시작했다.
할복, 은퇴 같은 극단적인 단어에 자살이라는 과장된 단어까지 섞어가며 무수한 기사들이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여 밤사이 넷상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평온해야 할 일요일 아침이 자극적인 수빈의 기사로 뒤 덥혀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젊은 놈이 욱해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거고 아직 경찰 조사 결과도 안 나왔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옹호파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특히 공인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징계파로 나뉘어서 넷상에서 대격돌이 벌어질 정도였다.
일요일 아침 10시경 사무실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은 뉴스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수빈의 예민한 감각에 매니저가 자꾸 뒤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형. 그만 쳐다봐요. 그러다 사고 나겠다."
"어. 어. 그래. 알았다. 조심하마."
수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형. 난 자살 같은 건 절대 안 해요. 제 꿈중에 하나가 몸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하는 거라는 걸 형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 성격 뻔히 아시면서 그러시네."
"그러게 말이야. 기자들이 오버해서는.. 나는 걱정을 안 하는데. 후. 아침 7시부터 마누라가 큰일 났다고, 너 빨리 데리러 가라고, 자고 있는데 얼마나 등짝을 두들겨 패는지.. 아마 멍이 들었을거다."
"아하. 그래서 아침 일찍 전화하셨구나."
"내가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줘도 내 말은 절대 안 믿어. 마누라가 잠도 못 자게 하도 괴롭혀서.. 그래서 내가 전화로 너 목소리 들려주고 다시 잤다는 거 아니냐."
"형수도 참.. 내일이면 다 끝날 거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 빨리 다 잘 정리되고 평상시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매니저가 다시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각. 뉴스를 보며 괴로워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남자가 번뇌에 찬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놈 성격상 할복이나 자살 따위는 말도 안 되는 거고.. 은퇴라.. 후. 정말로 은퇴를 할지도 모르지. 뭐가 부족해서 연예계에 계속 몸담고 있겠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지.."
잠시 후 뭔가를 굳게 결심한 남자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로 출근한 수빈은 박실장의 방으로 올라갔다. 비상사태를 맞이해서 법무팀 조대리가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나와 있었다.
"이거 저 때문에 주말에 쉬시지도 못하시고..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연예 기획사가 관공서도 아니고.. 일요일이 따로 어디 있습니까."
"박실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침부터 꼭 만나야될 사람이 있다고 30분 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러시군요. 홍보팀 김대리님은?"
"출근한 걸로 아는데.. 아마 자기 사무실에서 댓글 수집 작업이나 내일 내보낼 뉴스 작업을 하고 있나 봅니다."
"그렇군요. 그럼 둘이서 의논을 해보죠. 제일 먼저.. 출국 금지 신청건 말입니다. 그건 무고죄로 고소하면서 바로 넣어야 하지 않겠어요? 재벌들이 자신들이 불리해 지면 보통 해외로 도피를 하거나 아니면 병원에 입원을 하잖아요?"
"일반적으로 그렇죠."
"이놈은 나이가 젊어서 입원은 힘들 거고.. 해외로 유학 간다는 핑계로 도망갈 우려가 있을 거 같은데요. 내일 제가 기자회견을 가지기 직전에 무고죄로 고소를 하시면서 동시에 출국금지 신청도 같이 해주셨으면 하는데.. 절차가 어렵나요?"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양식 하나만 쓰면 되니까요. 문제는 법무부에서 인정을 해주느냐가 관건인데.. 내일 기자회견에서 발표를 하면 정말로 수빈씨의 무죄가 확실해지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절 믿으세요."
"만약 내일 수빈씨가 무죄라는 게 명백하게 증명된다면, 상대방의 무고가 확실해지니까 법무부에서 받아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문제는 저쪽에서 어떻게 손을 쓰느냐는 건데.. 상대가 재벌이라 저도 뭐라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결과는 두고 보면 알겠죠. 그럼 상대방의 출국금지를 같이 넣어주시고.. 재판에 필요한 서류들을.."
그때 방문이 확 열리면서 홍보팀 김대리 뛰어들어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잡았습니다!"
한 손에 종이를 들고 흔들며 흥분하여 큰 소리로 외치는 김대리를 보고 수빈이 말하였다.
"뭘 잡았단 말입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앉으셔서 차분하게 말씀해 주세요."
김대리가 소파에 앉자마자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놈을 잡았습니다. 댓글들을 계속해서 살펴보다가 그놈이 작성한 거로 보이는 댓글을 발견했습니다."
수빈은 김대리가 내미는 종이를 집어 들고 읽어보았다.
"개돼지 보다 못한 딴따라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덤벼들어. 천한 놈이 주제를 모르고 설치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은퇴? 웃기고 있네. 그냥 자살해라. 그럼 혹시 또 아냐. 용서하고 고소를 취하해 줄지. 크크크라.. 확실히 냄새가 나긴 하네요."
"그렇죠? 글이 올라온 시간을 볼 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 시간에 술기운으로 올린 거 같습니다. 어젯밤에 수빈씨가 자극적으로 글을 쓴 게 제대로 먹힌 거 같습니다."
그때 법무팀 조대리가 김대리에게 물었다.
"김대리님. 저도 충분히 의심이 갑니다.. 근데 이게 그쪽에서 작성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아. 그쪽 포털 사이트에 제가 아는 친구가 있어서요.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의 인적 사항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보안사항이라 아무것도 알려 줄 수 없다고 해서 이름만 간신히 주워 들었습니다. 통화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자기 초등학교 동창 중에 김호진이라고 있는데 그놈이 갑자기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더군요. 이거 작성자 이름이 김호진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댓글 내용으로 보나 작성자의 이름으로 보나.. 그쪽에서 올린 게 거의 확실합니다."
김대리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재판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의 부도덕성을 증명해주는 증거자료로 아주 훌륭하군요. 이거.. 한건 제대로 올리신 김대리님에게 제가 술 한 잔 거하게 사드려야겠는데요."
그때 법무팀 조대리가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이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습니다."
김대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왜요?"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이라고 해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은 증거는 법증에서 사용할 수가 없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지금 김대리님이 아무리 흘러들었다고 해도 불법적으로 작성자의 이름을 알아냈기 때문에.."
그때 수빈이 환하게 웃으며 조대리의 말을 잘랐다.
"조대리님. 이건 증거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요. 지금 조대리님이 경황이 없다 보니 생각을 잘 못하고 계신 거예요. "
수빈의 말에 조대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빈씨 말은.. 제가 지금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럼 이게 그 사람이 작성한 댓글이란 걸 우리가 어떻게 증명하죠?"
수빈은 조대리의 질문에 다시 한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대리님. 독과수 이론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런 건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간단하게 뒤집을 수 있어요. 조대리님은 내일 아침 일찍 관할 경찰서에 가셔서 저에 대한 악성 댓글러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해 주세요. 숫자가 너무 많으면 일거리가 많다고 경찰이 짜증을 낼 거고.. 너무 적으면 오히려 의심을 할 수도 있으니까.. 열명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수빈의 말에 조대리가 아직까지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아침에 악성 댓글러 열명 정도를 고발해라고요? 갑자기요?"
"네. 김대리님이 나머지 9명을 적당히 뽑아 줄 겁니다. 거기에 지금 댓글러를 같이 끼워 넣으세요. 그러면 경찰이 열 명의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조사해서 우리에게 알려줄 겁니다. 합의를 할 건지 재판에 넘길 건지 결정하라고 말입니다. 그럼 그 자료를 재판 때 증거로 사용하면 됩니다. 경찰이 직접 조사해서 알려준 인적 사항을 보고 알았다고, 그래서 증거로 내민다는데 독과수니 뭐니 누가 감히 태클을 걸겠습니까."
김대리가 손뼉을 쳤다.
- 짝짝짝.
"멋집니다. 그렇게 처리하면 독감이니 독사과니.. 아무 문제가 없겠군요. 제가 이따가 김대리님에게 나머지 9명의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조대리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런 방법이.. 있군요.. 그런 간단한.."
수빈이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말했다.
"자자. 조대리님 정신 차리시고.. 계속 회의를 진행하죠."
하루 종일 회의를 한 수빈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무렵. 청평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초호화 별장의 거실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셔봐라."
"네."
두 사람 중 나이가 어린 젊은 청년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술잔을 집어 든 다음 고개를 젖히며 원샷으로 술을 마셨다.
"맛이 어떠냐?"
"좋군요. 어디 건 가요? 사슴 머리 같은 상표가 눈에 익긴 한데.. 잘 모르겠네요."
"달모어 62라고 하는 술이다. 킹스맨이라는 영화에 나왔다고 하던데.. 난 그 영화를 안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아. 그래서 눈에 익군요."
"얼마짜리 술 같으냐?"
"글쎄요. 한 병에 100만 원 정도?"
"2억이다."
"이야. 엄청나게 비싼 술이군요."
"넌 평생 그런 술을 마실 수 있을 거다."
"뭐 꼭 찾아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요. 친구랑 삼겹살집에서 마시는 소주도 충분히 맛있습니다."
"그러냐? 뭐 젊은 나이에는 그것도 좋겠지.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보거라. 날 찾아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게 아니냐."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어떤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약에 너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넌 나에게 무얼 해줄 거냐?"
"그때 저에게 부탁하신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호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네. 옥스퍼드, 하버드, 스탠퍼드.. 어떤 대학이든 원하시는 데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럼.. 어떤 부탁인지 한번 들어볼까?"
한편 그 시각 수빈은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난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죽을래! 왜 전화를 안 받니?]
"죄송해요. 누님. 상황이 안 좋아서.. 회사 전화 말고는 다 피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내 전화를 안 받아?]
"죄송해요. 해수 누님.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후. 그래. 알았다. 넌 지금 어때? 정말로.. 은퇴할 거야?]
"아닙니다. 제가 왜 은퇴를 합니까?"
[그럼 그 글은 뭐니?]
"그거야 제가 폭행을 저질렀으면 은퇴를 한다고 말한 거죠. 전 절대로 그런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내일 SAT 대본 리딩이 있잖습니까. 그때 샛별이도 참석할 건데.. 최대한 예쁘게 하고 나오라고 좀 전해주세요. 내일 방송국 사람들과 기자들이 아마 떼거지로 모여들 겁니다.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지. 설마.. 그 말 전하려고 전화한 거니?]
"아뇨. 누님께 따로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해봐.]
"샛별이가 내일 주목을 많이 받을 겁니다. 그럼 광고를 찍자는 제의가 많이 밀려들어 올 거예요."
[그렇겠지.]
"아무것도 못 찍게 누님이 막아주세요. 조만간 제가 광고를 하나 찍을 겁니다. 그때 샛별이랑 같이 찍으면서 아주 제대로 띄워 줄 테니까.. 그거 찍고 몸값을 최대한 올린 다음에 다른 광고들을 찍으라고 전해주세요. 그게 샛별이에게 좋을 겁니다."
[호옹. 벌써부터 챙긴다 이거지? 내가 그날 오디션장에서 알아봤어.]
"그런 게 아니라 이번 영화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어설프게 이미지 소모되는 것보다 제가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게.."
김해수가 수빈의 말을 잘랐다.
[그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으니까 그만 말하고.. 너나 잘 관리해.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넌 알아서 잘하니까.. 내일 대본 리딩 끝나고 나한테 다시 전화해. 알았지?]
"네. 누님. 알겠습니다."
[혹시.. 내가 도와줄만한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지금 말해. 수빈 동생이라면 내가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마음이 있어. 그러니까..]
수빈이 김해수의 말을 잘랐다.
"누님. 다 큰 남자 아닙니까.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응. 역시.. 수빈 동생은 매력이 넘치는 남자야. 알았어. 전화해.]
"네. 들어가세요. 누님."
수빈은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쉬었다.
"후. 이제 어려운 숙제는 다 해냈군. 준비도 다 끝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 남은 건 내일 저쪽과 결착을 짓는 것만 남았군."
수빈은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깔끔하게 목을 쳐줘야겠지.."
컴퓨터 앞에 앉은 수빈은 팬카페에 들어가 간명하게 단 한 줄의 글만을 올렸다.
- 내일 오후 2시 반 기자회견을 하겠습니다.
수빈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방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수빈은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갔다. 분장실로 찾아간 수빈은 변검녀라 불리는 김팀장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아침 일찍 나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날이 날인지라.. 오늘은 특별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말에 변검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빈씨. 아무 걱정 마세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요."
잠시 후 꽃단장을 마친 수빈이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더블 재킷을 입고 하얀색 와이셔츠에 감청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수빈이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는 밴에 올라탔다.
"이야. 이렇게 해놓으니 잘생긴 영국 신사 같은데.."
"오늘 기자회견이 있다고 코디를 이렇게 해주시네요. 점잖아 보이면서도 섹시한 콘셉트라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멋져 보인다. 어디 법률 회사 다니는 변호사 같기도 하고.. 증권맨 같기도 한데.. 묘하게 얼굴이랑 머리가 또 약간씩 튀는 게.."
"형. 빨리 출발이나 해요."
수빈은 매니저를 재촉하여 금일 대본 리딩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BJ. Ent. 사옥으로 출발하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아침 풍경을 보며 수빈은 생각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로군. 오늘을 기점으로 나 스스로 또 한 번의 도약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