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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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호 감독을 만나고 온 그날 밤 수빈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빈군?]
"네. 장감독님. 저 수빈입니다."
[수빈군. 밖에 눈 온 거 보이나? 드디어 눈이 오고 있다네.]
"네. 저도 봤습니다. 이제야 그때 감독님이랑 의논했던 장면들을 찍을 수 있겠네요."
[기상청 예보를 확인해 보니까 내일 밤까지는 계속 내린다고 하더군. 어떤가? 지금 사람들에게 급하게 연락을 돌려서 내일 촬영을 할 생각인데.. 내일 시간이 되겠나?]
"그럼요.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죠. 시간을 알려주시면 가겠습니다."
[그럼 수빈군은 내일 오전 10시까지 양수리로 와주게나. 스태프들한테 말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수빈은 전화를 끊고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이제 [달빛 속의 호위무사] 촬영이 거의 마무리되겠는걸. 그러면 이제 자잘한 장면들이랑 편집 작업만 남은 건가. 이런 속도면 내년 봄에 개봉이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다음 날 아침 양수리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은 노트북을 앞에 두고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 딴 따다 딴 따다다~ 따라라 따~다다다다~
운전 중이던 매니저가 뒤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수빈아. 지금 뭐 하냐?"
"SAT에 들어갈 영화 음악 편곡하고 있어요."
"그래?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리듬인데.."
"브라스 밴드들이 행진할 때 자주 부는 곡이라서 들어봤을 거예요."
"아냐. 그런 데서 들은 곡이 아냐. 분명 귀에 익은 곡인데."
"워낙 유명한 곡이라서 여기저기서 들어보셨겠죠. 다 와 가나요?"
"그래. 금방 도착할 거다. 근데 오늘날이 많이 춥네. 촬영하면서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다."
"네. 조심할게요."
수빈은 양수리 촬영장에 도착해서 장진석 감독과 정도홍 무술감독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수빈군. 자네가 말한 대로 제작을 해왔네. 한번 보게나."
수빈은 정도홍 감독이 건네주는 월아산을 받아 들었다. 검은색 광택이 나는 자루에 한쪽에는 날이 시퍼런 초승달처럼 생긴 칼날이 붙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사각 형태의 칼날이 붙어 있었다. 수빈은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월아산을 한 손에 들고 빙빙 휘둘렀다.
"잘 만들었네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그럼 오늘 찍을 콘티를 한번 검토해 볼까요?"
수빈의 말에 장감독이 콘티북을 건네주며 대답했다.
"그때 자네가 말한 것처럼 눈을 맞으면서 월아산을 수련하는 장면을 집어넣고, 마지막 추격신도 눈밭에서 달리는 걸로 완전히 바꿨네."
"잘하셨습니다. 월아산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눈이라는 매개체로 일관되게 묶어주는 게 관객들이 이해하기에 훨씬 편할 겁니다. 색채도 단순한 녹색에서 벗어나 훨씬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담을 수도 있고요."
수빈은 빠르게 콘티북을 훑어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장감독님이 의욕이 너무 과한데..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장감독님. 콘티를 좀 바꿔야 될 거 같습니다."
"아니 왜? 내가 보기에 잘빠졌는데?"
"감독님의 불타는 예술 혼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찍으면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받기 십상입니다. 차라리 잔인한 장면들은 전체를 다 보여주지 말고 설원에 피를 뿌리는 형식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러는 게 나을 걸로 생각하나?"
"네. 감독님. 나중에 편집할 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절 믿으시고 콘티를 좀 수정하시죠. 괜히 무리하다가 청불 받으면 흥행에 도움이 안 됩니다. 다른 연기자들이 다칠 위험도 있고요."
"흠. 열심히 짠 건데.. 알겠네. 자네 말을 듣도록 하지."
수빈은 아쉬워하는 장감독을 달랬다.
"절 믿으세요. 감독님. 흥행에 성공해서 다 같이 대박 쳐야죠. 그리고 월아산을 수련하는 장면을 찍을 때 제가 웃통을 벗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님이 절 위해서 제작진과 대판 싸우셨다는데 저도 성의를 보여드려야죠.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만족하시죠?"
"나야 좋지만 괜찮겠나? 정회장님이 행여나 화를 내시지 않을까?"
"그건 예전 이야기죠. 상의 탈의하고 CF도 찍었는데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잠시 후 수빈은 웃통을 벗고 카메라 앞에서 양손으로 월아산을 천천히 휘돌렸다. 월아산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월아산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팔랑개비처럼 매섭게 돌아가는 월아산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위잉~ 위잉~
수빈이 한발을 앞으로 뻗고 무릎을 숙이면서 월아산을 낮은 궤도로 슬쩍 돌리자, 바닥에 깔려있던 하얀 눈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흩날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얀 눈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 월아산을 따라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빈의 벗은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김들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얀 눈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무협지나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이 입을 쩍 벌리고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묘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감독이 정감독에게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술 고수라는 사람들은 저런 게 다 가능한 거야? 자네도 저럴 수 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게나. 난 불가능해. 수빈군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인 거 같아."
"그래? 아무튼 멋진 광경이군. CG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야.."
"CG 따위로 저런 리얼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거 같은가? 장감독이 운이 좋아. 수빈군이 이번 영화에 출연한 건 로또에 당첨된 거랑 똑같은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고개를 끄덕이던 장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커트! 좋았어. 파카! 빨리빨리! 수빈군 감기 걸릴라.
오후 3시경 추격신까지 촬영을 모두 마친 수빈은 장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빈군. 오늘 고생 많았어. 내가 조만간 거하게 한턱 내지."
"뭘요. 감독님이 고생하셨죠. 언제쯤 편집 들어가실 겁니까?"
"열흘 정도면 스튜디오 촬영이 다 끝날 거야. 그때부터 편집을 할 건데.. 올수 있겠나?"
"제가 연말이라 바빠서 매일은 못 나가더라도 며칠에 한 번씩은 들르겠습니다. 그리고 약속드린 대로 오늘 찍은 장면을 편집할 때에는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작품 하나 제대로 만들어봐야죠."
"그러게나. 나도 요 근래 들은 소문들이 있어서 기대가 크다네. 내가 다시 연락하겠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수빈은 밴 안에서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안 늦었겠죠?"
"그럼. 엔카가 6시부터 방송이니까 시간 충분해. 리허설은 못했지만 어차피 디스패치 무대 자체는 저번 주랑 똑같잖아. 가서 간단히 동선만 체크하면 별문제 없을 거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여기서 상암동까지 1시간 반이면 도착하니까 4시 반 아무리 늦어도 5시면 도착할 거다. 추운 밖에서 장시간 떨어서 힘들 텐데 걱정 말고 눈이나 좀 붙여."
"네. 운전 조심하세요."
"그래. 아! 그리고 아까 네가 편곡 중이라는 노래 어디서 들어봤는지 기억해냈다."
"그래요? 어디서 들어보셨어요?"
"MBS에서 권투 시합 중계할 때 나오는 시그널 음악이야. 요즘은 권투가 인기가 없다 보니까 통 중계를 안 해서 바로 기억이 안 떠올랐는데.. 어릴 때 많이 들어봤어."
"그런가요? 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눈 좀 붙여라."
"네.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시간이 흘러 5시가 조금 못돼서 상암동 BJ E&M Center에 도착한 수빈은 BBG 대기실로 찾아갔다.
- 형. 영화 잘 찍고 오셨어요.
- 수빈이 왔냐. 고생 많았다.
- 형님. 날 추운데 수고하셨습니다.
- 수빈아. 이리 와서 몸 좀 녹여라.
반갑게 맞이하는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수빈은 물었다.
"무대 변동 사항이나 내가 특별히 알아야 할 주의사항 같은 게 있냐?"
수빈의 질문에 경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특별히 바뀐 건 없는데 잠시 후에 협찬이 도착한데요. 그거 꼭 입고 나가야 한다고 들었어요."
"협찬이면 설마.. 디젤?"
"네. 디젤 맞아요."
"제법 세게 불렀는데도 디젤이랑 계약에 성공한 모양이네. 회사 사람들이 마냥 놀고먹고 있는 건 아닌가 봐. 새로 온 매니저는 어디 갔어?"
"지금 코디랑 같이 협찬 옷 가지러 갔어요."
"그래? 그럼 뭐 다른 건 문제없겠네. 오늘 우리 팀이 몇 번째 무대야?"
"11번째요. 이번 주 1위가 우리잖아요. 엔카가 6시에 시작하니까 7시 10분쯤 우리 무대하고, 20분쯤 1위 곡 발표하고, 수상한 다음에 30분에 방송 끝. 타임 테이블이 그렇게 짜인 걸로 알고 있어요."
경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빈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 짝. 짝. 짝.
수빈은 멤버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다들 연말이고 신곡 때문에 바쁜 거 잘 알아. 디스패치가 다음 주에 한 번만 더 1위 하면 3주 연속 1위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잖아. 그럼 이제 음악 순위 방송에 안 나와도 돼. 그러니까 다들 한주만 더 힘내자. 다음 주만 지나면 스케줄이 좀 한가해질 거야."
수빈의 말에 로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보세요. 너나 힘내세요. 우리야 스케줄 충분히 소화 가능하고 별로 힘든 것도 없어. 다들 네가 쓰러질까 봐 걱정이다."
"난 아직 젊잖아."
수빈의 젊다는 말에 경빈이 반박했다.
"형. 나랑 성빈이는 형보다 더 젊어요. 그리고 멤버들 중에 형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요? 그러니 우리 걱정 말고 형 건강이나 잘 챙기세요."
수빈이 웃으며 대답하려고 할 때 갑자기 대기실 문이 확 열리며 스태프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 BBG 멤버들! 첫 번째로 무대에 올라가야 되니까 빨리 준비해 주세요. 순서 변경됐습니다.
멤버들끼리 어리둥절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때 곧이어 백인철 매니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기실로 들어왔다.
"수빈아."
"어. 성철이형. 무슨 일이에요?"
"수빈아. 넌 첫 무대만 하고 바로 나랑 같이 사무실로 출발하자. 1위 수상할 때에는 빠져도 된다. 방송국이랑 이야기됐어."
"그럼 형이 무대 순서를 바꾼 거예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순서를 바꾸냐. 좀 전에 회사에서 박실장이 직접 엔카 담당 피디하고 통화해서 바꾼 거라고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형. 허둥지둥 대지만 말고 차분히 설명을 좀 해줘요. 설마..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한 건가요?"
수빈의 말에 매니저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후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도록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회사에 너 앞으로 된 출석요구서가 날라왔어."
"출석요구서요?"
"그래. 강남 경찰서에서 수빈이 너 앞으로 보낸 출석요구서가 날라왔다고.. 지금 회사가 발칵 다 뒤집혔다."
"무슨 일로 나보고 경찰서로 오라고 하는 거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원래는 지금 바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디젤하고 계약한 게 있어서 라이브 무대는 소화를 해야만 한다고 그러네. 급한 대로 무대 순서를 처음으로 바꿨으니까 그거 끝나는 데로 바로 나랑 같이 회사로 들어가자."
"알겠어요."
"혹시 기자가 달라붙을지도 모르니까 누구하고도 말 섞지 말고.. 알았지?"
"네. 형."
잠시 후 수빈은 디젤에서 협찬한 의상을 입고 라이브 무대를 끝낸 다음 밴을 타고 회사로 급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