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99화 (99/236)

#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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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감독이 수빈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수빈씨. 오디션이 있었던 날 정회장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대화를 좀 나눴었죠. 그때 수빈씨가 영화의 주체에 관련돼서 나에게 한말 기억합니까?"

"당연히 기억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영화란 감독의 것이며 감독의 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술 작품 일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종 편집 권한을 감독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드렸죠. 영화에서 그만큼 편집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그 뒤에 편집에 관련돼서 한말도 기억합니까?"

"[편집이란 감독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촬영한 모든 영상들을 적절히 조합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따른 결과물들을 직접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결국 좋은 편집이란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지난(至難)한 과정이다.]라고 말한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빈의 말에 봉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기억하는군요. 그러면서 이번 영화에서 수빈씨를 편집에 반드시 참여시켜야 하는 이유도 피력하셨죠? 그래야 1,200만을 넘길 수 있을 거라면서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개봉이 되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투입할 수 있는 인력에는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결국 돈과 직결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만약 제가 편집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면, 동일 시간 대비 몇 배의 효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뛰어난 최종 편집본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렸죠."

수빈의 말에 봉감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수빈씨. 난 수빈씨가 한 말을 그때도 믿지 않았고, 솔직히 지금도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봉감독의 말에 수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제가 감독님 입장이라도 믿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봉감독이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때 차 안에서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수빈씨를 천천히 테스트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만.. 오늘 박감독과 통화하면서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요."

수빈도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기고 허리를 숙이면서 물었다.

"어떻게 바뀌셨다는 겁니까?"

"박감독이 지금은 비록 지금 CF나 찍고 있지만.. 한때는 본인이 영화감독이었다는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친구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프라이드가 강한지 제가 박감독님과 직접 작업을 같이 하면서 충분히 알 수 있겠더군요. 박감독님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좀 들었고요. 입봉작이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봉감독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수빈씨가 잘못 알고 있어요. 물론 박감독의 첫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감독을 관두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어요?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생하고 기다렸는데 한번 덜컥했다고 관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쉬면서 차기작을 기획하고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보통이죠."

"그럼 왜?"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도 나중에야 알았죠. 그 당시 첫 애가 희귀병을 앓아서 굉장히 위험했다고 하더군요. 고치려면 치료비가 엄청 많이 드는 병이라고만 들었어요. 실력은 있지만 아직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화감독이, 그것도 입봉작이 참패한 영화감독이 모아둔 돈이 있을 리가 만무하죠. 결국 돈이 급해서,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을 포기하고 그쪽으로 진출했던 겁니다."

"아.."

"그 자존심 강한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를 절대 할리가 없죠. 나도 어렵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타깝네요."

"그런 친구가.. 오늘 나랑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하더군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수빈씨가 편집을 자신보다 열 배는 더 잘한다."

"이런.. 그건 너무 오버하신 거 같은데요."

"그 말을 들으면서 수빈씨가 젊으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한말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박감독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기회가 된다면, 수빈씨가 감독으로 찍는 영화에 자신이 촬영감독으로 꼭 참여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천재인 감독이 찍는 영화는 어떤 건지, 과연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뷰파인더 너머로 무얼 담고 싶어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더군요."

"흠.."

"그 자긍심 높은 친구가 영화감독으로서 수빈씨를 자기보다 훨씬 윗줄에 둔 겁니다. 그런 소리는 나한테도 한 번을 안 했던 친군데 말이죠. 그래서 그때 깨달았죠. 내가 지금 뭘 착각하고 있구나. 단지 수빈씨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편견을 가지고 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감독님. 지금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닙니까? 그냥 박감독님이 립 서비스로.."

봉감독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스필버그가 자신의 첫 작품인 [The Last Gun]을 연출한 게 14살때라고 하죠? 그리고 [Night Gallery] 그러니까 한국 제목이 심야의 화랑이었던가요. 그걸 연출할 때가 지금 수빈씨랑 비슷한 나이였을 겁니다. 그 유명한 [조스]도 스필버그가 이십 대 때 만든 영화죠. 수빈씨?"

"네. 감독님."

"오늘 수빈씨와 영화에 관련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보자고 한 겁니다. 그리고 수빈씨가 박감독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판단이 나 스스로 들면.. 수빈씨를 정식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단순히 편집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도 수빈씨의 도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박감독의 말에 수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그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감독님. 말 좀 편하게 놓으시죠. 제가 너무너무 불편합니다."

"흠.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그냥 편하게 반말로 수빈아라고 불러주세요."

"좋습니다. 그럼 수빈씨도 사석에서는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세요. 성강호 형한테 형이라 부른다면서요? 그럼 나도 형이 맞는 거죠. 감독 소리는 촬영장에서만 하면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음식을 주문했다.

주문을 다 받고 종업원이 나가자 봉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편하게 말을 놓도록 하자고. 수빈이가 보기에 감독으로서 나의 취약점이 뭐라고 생각하냐?"

"흠. 솔직하게요?"

"그래. 솔직한 너의 평가를 받고 싶다."

"제 생각에 형님은 감독으로서 영상을 만드는 재주가 아주 뛰어납니다. 어렸을 때 만화를 그려서 콘티까지도 직접 그리시죠. 그리고 연극영화과를 나오지 않고 사회학과를 나오셨기 때문에 철학적인 면에서도 깊이가 있습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으시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 영화감독으로서 아주 좋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빈의 말에 봉감독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굳이 칭찬을 먼저 깔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에게 듣고 싶은 건 그런 칭찬들이 아니라 냉정한 평가니까."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형님은 천재적으로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귀는 그저 그런.. 그냥 평범한 수준이에요. 영화 음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감독님은 그냥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형님의 영화에서는 음악들이 특이하지도 않고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찍은 영화 중에 음악적으로 주목을 받고 칭찬받은 작품이 몇 개나 됩니까? [마더]의 댄스? 감독님의 작품 중에서 일반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특별히 기억하고 떠올리는 영화 음악이 있습니까?"

수빈의 직설적인 말에 봉감독이 신음성을 흘렸다.

"으음."

수빈이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영화를 보통 종합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영화 음악도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형님처럼 음악적인 면에서 자신이 없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모든 걸 대사로만 처리하려고 듭니다. 왜냐고요? 그건 형님 스스로도 자신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아무런 대사 없이 아주 심플한 음악 하나로 설명할 수 있고 그러는 게 훨씬 더 임팩트가 있는 장면들에서도 배우들이 구구절절 대사를 치고 있습니다. 특히 액션신에서는 그 정도가 심합니다."

"내가 영화를 찍을 때마다 음악 감독을 매번 따로 두고 있는데도?"

"아무리 음악 감독이 있어도 결국 선택은 형님이 하시는 거죠. 본인 영화에 본인 마음에 안 드는 음악을 선택해서 사용하십니까?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음악을 고르실 거 아닙니까. 솔직히 지금까지는 형님의 영화 음악들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거의 매번 다른 영화음악가들과 작업하면서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했다느니 감독님의 음악적 요구나 연출이 날카롭고 뛰어나다느니.."

수빈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봉감독을 직시했다.

"제가 볼 때에는 그건 다 개소리입니다. 형님의 명성에 힘입은 립 서비스에 불과한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형님은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나 천재적인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평범 그 자체에요."

"그럼 어떡해야 하지?"

"안토니오 가우디를 아십니까?"

"스페인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은 가우디?"

"네. 잘 아시는군요. 그 가우디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뭔지 아시나요?"

"음.."

"색채 감각이 젬병이라는 겁니다. 전 세계에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건축가이지만 색채 감각은 일반인에 불과한 수준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가우디가 만든 구엘 공원은 천재적인 색채감각으로 유명합니다. 거의 환상적인 수준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짐작 가십니까?"

"흐음.."

"간단하죠. 색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천재적인 색채 감각을 지닌 다른 건축가에게 전적으로 맡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건축학도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가우디가 그 천재를 만났을 때 환희에 가득 차 몸을 부들부들 떨었을 겁니다. 만약 저라면 그랬을 거 같으니까요. 정보교류가 힘든 그 시대에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천재적인 인재를 발견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면 지금 수빈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형님. 이번 영화에서 영화 음악에 관련된 모든 걸 포기하시죠. 그리고 저에게 전권을 주세요. 그럼 형님께 평생 잊지 못할 또 다른 천국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수빈의 자신 있는 말에 봉감독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걸 지켜보며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한 말만 믿고 영화 음악에 대한 모든 걸 포기한다? 무리지.. 단순히 말로만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수빈은 식탁을 톡톡 두드려 생각에 잠긴 봉감독을 깨웠다. 그런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차 안에서 하셨던 말 그래도 테스트를 한번 해보시죠. 이번 영화의 액션신 중에서 한 파트를 제가 한번 짜보겠습니다. 콘티랑 음악까지요. 그걸 보고 평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콘티에 음악이라.. 좋아. 어느 신을 짜고 싶지?"

"형님께서 직접 고르시죠."

"그럼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부탁하지. 일본에서 찍기로 되어 있는 액션신이 있지? 그 부분을 한번 짜와봐. 그걸 보고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고. 시간은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다음 주 월요일에 대본 리딩이 잡혀있는데 그때까지 가능하겠어? 너무 촉박한가?"

봉감독의 말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다 짤 수 있습니다. 콘티야 세세하게 모든 장면을 다 그리지 않아도 감독님이 알아보실 거니까 개념만 정확하게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악이야 지금 바로 떠오르는 게 있으니 약간의 편곡만 하면 될 거고요."

"정말..로 그게 가능해?"

"네. 가능합니다. 일단 여기 일하시는 분에게 스케치북이랑 연필을 부탁해야겠네요."

"아. 그건 내차에 항상 실려있으니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될 거야."

잠시 후 종업원이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져다 주자 수빈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새 차려진 음식을 깨작거리던 봉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신을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고?"

"네.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손질은 해야겠지만요."

"어떤 음악을 떠올렸는데?"

"형님. 많이 궁금하신가 봐요?"

"내가 궁금해서 지금 음식이 안 넘어간다."

"제가 떠올린 음악은 [French National Defile March]입니다. 그 장면에서는 딱이죠."

수빈의 말에 봉감독이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장면에서 그 음악을 쓴다고? 넌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봉감독의 말에 수빈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했죠?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형님에게는 음악적인 재능이 없다는 겁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수빈은 다시 콘티를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수빈이 짜고 있는 콘티와 음악에 맞춰 봉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영상이,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화팬들을 매혹시킬 명장면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가 학수고대하던 겨울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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