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97화 (97/236)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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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빛살 속에서, 귀여운 토끼 머리띠를 한 남자의 긴 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휘날리며 찰랑거리고 있었다. 머리띠를 한 탓에 훤히 드러난 이마가 깨끗하고,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져 느낌이 산뜻하다.

흑요석처럼 깨끗하고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 속에는 쑥스러움이 언뜻언뜻 묻어 나오고 있었고, 우뚝 선 콧날 아래 자리 잡은 단순호치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넓은 어깨 위에 걸쳐진 햄튼 스타일의 옅은 베이지색 재킷, 탄탄한 가슴팍에 달라붙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흰색 면 재질의 티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세련된 스타일의 상체와 달리 길쭉한 다리에는 스트레이트 핏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발에는 금방이라도 벌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닐듯한 캐주얼 느낌의 슈즈를 신었다.

오른손에는 하얀색 안개꽃 한 다발을, 왼손에는 붉은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조그마한 선물상자를 든 멋들어진 차림의 남자가 슬로우가 걸린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클로즈업 되어 보이는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살짝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는 남자의 현재 심경을 반영하듯 가끔씩 어색함과 민망함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잘생겼다.."

김성미는 방금 전 학원에서 귀가한 고1 딸과 같이 TV를 보며 저녁을 먹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누구 오빤데.. 긴 머리하니까 더 멋있다."

딸의 대답에 김성미가 물었다.

"수희야. 이거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니?"

"몰라. 나도 첨 보는데.."

그때 화면이 바뀌며 호화롭게 꾸며진 수영장 옆의 비치 배드를 비췄다. 선글라스를 쓰고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 고혹적인 자세로 누워 있었다.

"저 여자는.. 최애진이네. 남자가 지금 고백하러 가는 건가?"

"아냐. 내가 보기엔 둘이 애인 사인데 오빠가 생일 선물 같은 걸 주려나봐."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며 남자가 여자 앞에 서서 머쓱한 표정으로 들고 온 꽃과 선물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러자 여성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라? 여자가 짜증 내는 거 같은데.. 남자가 약속시간에 늦었나?"

"둘이 싸워서 오빠가 화해를 청하는 거 같기도 하고.. 대화가 안 들리니까 나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때 여성이 배드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를 수영장 쪽으로 확 밀쳐버렸다. 깜짝 놀란 김성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고 수희는 숟가락으로 식탁을 세게 내려쳤다.

"저년이 미쳤나?"

"저게 돌았나! 우리 오빠한테 뭔 짓이야?"

잠시 후 남자가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양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쓸어올렸다. 토끼 머리띠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렸고 남자의 눈 속에는 짜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남자가 두 팔로 수영장 바깥의 바닥을 짚더니 마치 점프하듯 튀어 올랐다. 신발은 물속에 빠뜨렸는지 맨발로 물 밖으로 나온 남자가 허리를 펴며 우뚝 일어섰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선물을 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지. 복을 차네 저년이.."

"짜증나. 지가 뭔데.."

그때 남자가 고개를 흔들어 물에 젖은 머리를 틀면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져 버리고 면 티까지 벗어서 한 손에 들자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근육질의 상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어머머머.."

"엄마야. 어떡해.."

카메라 앵글이 바뀌어 남자의 벗은 등이 잡히고 배드에 있던 여성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 순간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튼튼한 광배근과 탄탄한 척추기립근이 마치 성을 내듯 부풀어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녀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힘이 장난 아니겠다.."

"오빠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찰나간 말없이 상대방을 째려 본 두 사람은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면 티로 자신의 몸과 청바지를 주섬주섬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성이 배드 옆에 놓여 있던 비치백에서 수건을 꺼내어 건네주며 뭐라고 말을 하였고, 그 순간 잔잔하게 깔리던 BGM의 템포가 빨라지며 볼륨이 커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건네준 수건을 든 남자가 성난 얼굴로 여성에게 뭐라 쏘아 붓이더니 수건을 수영장으로 던져버렸다. 심지어 바닥에 있던 재킷과 들고 있던 면 티까지 모조리 수영장 쪽으로 세차게 던져버린 남자가 차가운 얼굴을 하며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젖은 머리와 미처 못 닦은 물방울들이 또르르 흐르는 벗은 상체로, 오로지 청바지 만을 걸친 남자가 맨발로 수영장을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남자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버리자 여성이 다급한 표정으로 비치백에서 물 빠진 스키니진을 꺼내어 입더니 황급히 남자를 뒤쫓아갔다. 그 장면을 본 모녀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웃기는 년일세. 있을 때 잘하던가.."

"지가 차버려놓고 쫓아가긴 왜 쫓아가.."

뛰어서 남자를 따라잡은 여성이 뒤에서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남자의 날렵한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뒤쪽으로 돌려서 얼굴을 보였다.

그 순간 남자와 여자가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 되더니 앵글이 느린 속도로 남녀의 하체 쪽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막이 천천히 타이핑 되기 시작했다.

- My Favorite Jean.

영문 자막이 사라지며 새로운 자막이 떠올랐다.

- 최(最) 애(愛) 진(Jean)

새로운 자막마저 사라지며 화면 가운데 붉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만들어진 로고가 떠올랐다.

- [디젤(Diesel)]

잠시 멍한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던 김성미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하이 톤으로 외쳤다.

"어머! 어머어머! 이거 CF였니?"

"엄마. 이거 이제 보니 청바지 CF야.."

"최애진? 그건 뭐야? 광고에 나왔던 여자 배우 이름 말고 다른 뜻이 또 있는 거야?"

"최애템 처럼 최애진.. 내가 가장 아끼는 청바지라는 뜻인가 봐."

"디젤은? 디젤이라는데가 옷 만드는 회사니? 자동차 만드는 회사가 아니고?"

"아냐. 디젤이라고 중저가 패션 브랜드가 있어. 이탈리아 꺼.."

"이탈리아.. 중저가라고? 그럼 싸겠네?"

"얼마 안 할걸? 청바지 한 벌에 십만 원 정도 하려나?"

이심전심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치더니 눈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딸아.."

자신을 부르는 김성미의 위엄 어린 목소리에 수희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조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머니. 소녀 여기 있사옵니다."

"학교가 내일 몇 시에 끝나지?"

"겨울 방학전 마지막 시험 기간이라 일찍 파해서 3시면 귀가할 듯 하옵니다."

"시험? 이런.. 내가 깜박했네. 안타깝구나.. 내일 같이 쇼핑이나 하려 했더더니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가야겠구나."

"어머니!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 한 말씀이시옵니까. 시험이란 본디 평상시 공부한 것으로 보는 것. 부디 소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러다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제가 한 달간 저녁 설거지를 하겠습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렸다?"

"네. 소녀 약조하겠사옵니다."

그제야 김성미가 다시 평상시 목소리 톤으로 입을 열었다.

"디젤인지 경윤지 집에서 가까운 매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8시 뉴스 좀 보려다 난데없이 쇼핑하게 생겼네. 아빠한테 들키면 한소리 들을 거 같은데.."

수희가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빠 것도 하나 사지 뭐. 엄마. 집 근처에 매장이 있어."

"그래? 어딘지 나도 좀 보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수빈은 여상하게 소주천을 하고 권법 수련을 한 뒤 샤워를 하고 나왔다. 거실에 나오니 매니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 형."

"샤워하고 나온 거야? 내가 집에 들를 때마다 악기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네."

"다 연습용 악기들이라서 가격이 얼마  안해요. 그런데.. 예정보다 훨씬 일찍 오셨네요."

"후. 왜 일찍 왔겠냐. 아침부터 회사 전화통이 불이 나고 내 핸드폰으로도 연락이 하도 많이 와서.. 너무 뜨거워서 지금 만질 수가 없을 정도다."

"어제부터 시작한 CF 때문인가요?"

"그래. 지금 난리도 아니다. 일단 넌 아무 전화도 받지 말래. 회사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좀 지켜본 다음에 최종 결정이 내려지면 그때 다른 사람들과 통화하란다."

"나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요?"

"지금 회사에서 수빈이 너 CF 몸값부터 드라마나 예능 출연료까지 조정 작업을 할 거래. 광고는 대박을 쳤지만 그게 실제 판매까지 이어지는지를 확인해 봐야 적절히 조정을 할 수 있다네. 그때까지 괜히 전화받아서 출연 약속 같은 거 할까 봐 그러는 모양이야."

"알았어요. 일단 회사로 나가보죠."

회사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수빈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BJ 엔터의 김성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이건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받아봐. BJ 하고는 이미 계약이 다 끝났으니까 받아도 될 거다."

수빈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성희에요. 수빈씨가 요즘 워낙 잘 나가서 통화하기도 힘드네요.]

수빈은 김성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슨 일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건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삐졌군. 물어보나 마나 떨어졌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최종 합격자가..'

수빈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화가 힘들다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성희씨가 전화를 주시면 제가 언제든 받지 않습니까."

[정말로 그런가요?]

"그럼요. 지금도 바로 받았잖습니까."

[알았어요. 이쯤 해두죠. 수빈씨?]

"네. 말씀하시죠."

[어제저녁부터 방영된 디젤 CF 있잖아요. 그거 수빈씨가 콘티를 짜고 편집까지 직접 한 거라면서요?]

'역시.. 이 바닥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는 정말로 빠르군.'

수빈은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혼자 한 게 아니라 CF 감독님과 서로 협의해 가면서 작업한 겁니다."

[그 말이 그 말이죠. 암튼 봉순호 감독님이 오늘 저녁 7시에 미팅을 하자고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아마 감독님도 CF를 보셨으니까 수빈씨랑 의논할 일들이 있나 봐요. 자세히는 말씀을 안 해서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 7시. 알겠습니다. 위치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늦지 않게 시간 맞춰서 나가겠습니다."

[저도 나갈 거니까 그때 봐요. 그리고..]

"그리고요?"

[SAT 여자 주인공이 결정됐어요.]

'이제야 본론을 말하는군..'

수빈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듯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혹시 성희씨가 된 거 아닙니까? 그날 오디션 때 심사위원들 반응이 아주 좋았잖습니까.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전 떨어졌어요. 심사위원들 눈이.. 아무튼 김샛별이라는 여자애가 됐어요.]

"이런. 안타깝군요. 잔뜩 기대했었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걔가 뭐가 이쁘다고.. 그리고 봉감독님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대본 리딩을 시작한다네요. 출연자들에게 미리미리 준비 좀 해달라고 말 좀 전해달래요.]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며칠 안 남았네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그래요. 이따 봐요.]

전화를 끊고 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아. 피곤하군. 정회장님 친척에 제작사 직원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때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빈아. 다 왔다. 내릴 준비해라."

"네. 형."

잠시 후 수빈은 밴에서 내려 회의실로 올라갔다.

여러 부서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노트북과 핸드폰을 붙들고 정신없이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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