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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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촬영이 있던 다음 날 오후 2시 충무로에 있는 [벨 스튜디오] 편집실.
편집실 테이블과 바닥에는 컵라면 용기와 삼각김밥 포장지가 뒹굴어 다니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런 편집실 안에서 두 사람이 뿌듯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박수종 감독이 입을 열었다.
"후. 수빈군. 드디어 편집이 완료되었네. 촬영 후 반나절만에 편집이 끝나다니..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군."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수빈군이 확실히 젊긴 젊구먼. 밤을 새워도 얼굴이 뽀송뽀송한 게 역시 청춘이야. 우리 딸이 좀 있으면 20살이 되는데.. 몇 년 좀 기다릴 생각이 있나?"
밤을 같이 새며 많이 가까워진 박감독이 농을 하자 수빈도 웃으며 받았다.
"따님이 절 좋아할까요? 15년 뒤면 제 나이가 너무 많다고 싫어할 거 같은데요. 그리고.. 사실 저도 좀 피곤합니다. 감독님. 지금 바로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이렇게 멋진 영상이 나왔는데 [디젤]에 들고 가서 어서 빨리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감독님.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농담이지? 이런 멋진 영상을 보고 헛소리를 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걱정 말게. 조만간 TV에서 정식으로 만나볼 수 있을 거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감독님 덕분에 편집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수빈의 말에 박감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수빈을 쳐다보았다.
"날 놀리나? 오분? 십분? 그 정도 되려나. 기본적인 개념이랑 자주 쓰는 몇 가지 테크닉 그리고 간단한 장비 조작법을 가르쳐 준게 전부이지 않은가. 나머지는 자네가 매뉴얼 북을 직접 읽어보고 터득한 거고.."
"감독님께서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신 노하우를 가르쳐 주셨다는 게 중요 한거죠."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내가 알려준 테크닉들은 영상 좀 만진다는 인간들은 다 아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들이야. 그것보다.. 솔직히 난 지금 자네가 좀 무섭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모든 영상들의 타임 테이블을 머릿속으로 외운 다음 각 장면들의 플레이 시간을 암산으로 바로바로 계산해 나가면서 편집을 진행하면 훨씬 빠른 시간 내에 편집이 가능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기억하는 게 맞나?"
"맞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하시는군요."
"하도 충격을 받았더니 잊히지가 않는군. 어젯밤에 자네가 그런 말을 할 때 난 당연히 농담으로 하는 소린 줄 알았네.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안 해봤으니까.. 자네 혹시 서번트 증후군 뭐 그런 건가? 왜 [레인맨]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남자 있지 않은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했던.."
"그런 이야기를 가끔씩 듣긴 합니다만 제가 무슨 증후군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암기력이 좋은 편이고 특히 숫자에 강해서..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고는 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난 절대로 안 믿었을 거야. 3일은 족히 걸릴 편집 작업을 반나절만에 끝내다니.. 수빈군이 영화 편집에 관심이 많다고?"
"네. 그래서 어제 감독님께 부탁드렸던 겁니다. 실제 편집 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감사드립니다."
수빈의 말에 박감독은 경외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실력이면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편집에 관해서는 절대 밀리지 않을 걸세. 내가 보장하겠네. 자네가 하는 편집은.. 솔직히 말해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니야."
"칭찬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그리고 말이야.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네. 말씀하시죠."
박감독이 갑자기 양손으로 수빈의 오른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내가 보기에는 수빈군은 앞으로 수많은 영화와 CF, 드라마 등을 찍을 걸세.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나를 좀 불러줄 수 있겠나? 내가 최선을 다해서 찍겠노라고 약속하겠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냐. 내가 그럴 만큼 빈곤한 형편도 아니고.."
박감독은 말을 하다 눈을 살포시 감았다.
"어제오늘 자네와 한 작업들은.. 나에겐 정말로 즐겁고 행복한 작업들이었네. 머릿속에선 영감이 끊임없이 샘솟아 오르고 온몸에선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지. 밤을 새워도 힘든 줄을 모르고 마치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박감독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선 수빈을 열정이 넘쳐흐르는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기분을 다시 꼭 느끼고 싶다네. 그러니 날 불러주게. 자네가 부른다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겠네."
"저도 감독님과 한 작업들이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수빈은 아침 일찍 도착해서 자신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를 만나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 안에서 수빈이 물었다.
"형은 잠 좀 잤어요?"
"나야 집에서 편하게 자고 왔지. 수빈이 넌 꼬박 밤새웠지? 많이 피곤하겠다."
"저 아직 젊어요. 형. 젊은 놈이 하루 밤새운다고 큰일 나겠어요. 그보다.. 형. 빨리 출발하죠. 오후에 진주에서 행사 있다고 들었는데 늦겠어요."
수빈의 출발을 재촉하는 말에 백성철 매니저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문자 온 거나 읽어봐라."
수빈은 매니저가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서 읽어 보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 읽어 봤냐? 다른 멤버들이 너 행사 내려오면 죽여버리겠단다. 무리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쉬래. 나보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더라."
"이것들이.."
"그러니 그냥 바로 집에 가서 푹 쉬어. 그리고 경빈이가 그러더라. 그 대신 내일 쇠고기나 좀 사달라고.."
"알았어요. 내일 점심때 제가 한턱낸다고 전해주세요. 그럼 집으로 가죠."
다음 날 오전 11시경 오래간만에 BBG 전용연습실로 나간 수빈은 아무도 없는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내가 너무 일찍 온 모양인데.."
수빈은 연습실 한쪽 구석에서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메모장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로빈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수빈을 발견하고선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수빈의 뒤쪽으로 접근했다.
로빈이 수빈의 등 쪽으로 거의 접근했을 때 수빈이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네가 도둑고양이냐? 뭘 그렇게 조심조심 걸어와."
"..너 어떻게 알았어? 음악 안 듣고 있었냐?"
"음악은 듣고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귀가 밝잖아. 음악 들으면서도 네 발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어."
수빈의 말에 로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여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이야.. 뭐 듣고 있었냐?"
로빈은 수빈이 건네주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이걸 왜 듣고 있어? 갑자기 클래식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고.. 내가 요즘 영화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잖아. 요 며칠 영화 음악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니 영화에 깔리는 BGM의 대부분이 클래식이더라고. 그래서 관심이 가서 유명한 클래식 넘버들부터 다시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야."
수빈의 말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근데.. 핸드폰 메모장에다 뭘 쓰고 있는 거야?"
"아. 이거? 악보랑 연주랑 서로 다른 곳이 있어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야."
수빈의 말에 로빈이 경악에 찬 얼굴로 물었다.
"교향곡이면 총보(總譜) 두께가 장난 아니게 두꺼울 텐데 그 긴 악보를 네가 다 외웠.. 아. 아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겠지. 악보도 못 외운 놈이 연주가 이상하다고 체크할 일이 없을 테니까.. 계속 들어라. 다른 멤버들 올 동안 나도 핸드폰으로 검색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수빈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른 멤버들이 연습실 안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연습실 광경을 둘러 본 경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로빈에게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빈형. 수빈형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신곡 작곡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변태 중인 거 같다."
"변..태..요?"
"그래. 괴물이 또 다른 걸로 변태하려나 봐. 영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하는 중이란다."
그때 말수가 적은 성빈이 로빈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럼 수빈이 형이 괴물에서 이제 신수로 바뀌는 겁니까?"
"신..뭐? 그게 뭐냐?"
"신수(神獸)! 왜 이무기 같은 괴물이 도를 닦으면 나중에 용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걸 신성한 짐승이라고 해서 신수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경빈이 혀를 차며 말했다.
"로빈형. 신경 쓰지 마세요. 성빈이 저놈이 어릴 때부터 [드래곤볼]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쓰는 놈이라서 그래요."
그때 마빈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이 입을 열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마빈이 도착했으니 다 모였네. 다들 밥 먹으러 가자."
잠시 후 YK 인근의 고깃집에서 BBG 멤버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다들 어제 고맙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덕분에 편히 쉬었다."
수빈의 말에 마빈이 대꾸했다.
"네가 잘 돼야 우리도 많이 벌지. 그러니 그런 소리 안 해도 된다."
경빈이 보탰다.
"맞아요. 수빈이 형 덕분에 올해 정산금이 아주 두둑할 거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니 행사 같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형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돈 많이 벌어 오세요."
그때 경빈의 머리를 툭 치며 케빈이 말했다.
"수빈아. 네가 이해해라. 다들 쑥스러워서 말만 그렇게 하는 거니까.. 바쁜 사람이 있으면 시간이 되는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빈자리를 메꾸는 건 당연한 거다. 그게 멤버고 친구 아니냐. 그 대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요즘 네가 너무 바쁜 거 같아서 걱정된다."
케빈의 말에 수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몸 생각하면서 일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리고.. 이렇게 다 모인 김에 하나 의논할 게 있는데.."
수빈의 말에 수빈의 부재시 리더 격인 마빈이 대답했다.
"뭐?"
"저번 주에 홍보팀에서 나에게 부탁한 게 있었어. 그 자리에서 나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는데.. 일주일 안에 답변을 주기로 했거든. 오늘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김에 멤버들 의견을 한 번 들어보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데?"
"뮤비!"
"뮤비? 디스패치 뮤비 말하는 거야?"
"응. 디스패치가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건 알고 있지?"
"들었어. 가사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래. 그래서 홍보팀에서 부탁을 해왔어. 외국 시장을 노리고 영어판 디스패치 뮤비를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찍는 거야 나쁘지 않지. 문제는 어떤 콘셉트로 어떻게 찍느냐가 문제지. 뮤비를 찍으려면 제대로 된 콘티도 있어야 될 거고 유능한 촬영감독도 섭외해야 할 거고.. 근데 그걸 왜 너에게 물어보지? 어차피 그런 일들은 홍보팀이나 기획팀에서 하는 거 아닌가?"
"홍보팀에서 나보고 직접 제작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더라고."
수빈의 말에 마빈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보고 직접 하라고 그랬다고? 정말로 그게 가능하겠어?"
수빈은 마빈의 질문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하라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지 않겠어?"
잠시 후 회식을 마친 BBG 멤버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7시경 수빈은 한 통의 짧은 문자를 받았다.
- 오늘 저녁 SBC 8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