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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호텔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심사위원석이었다. 기다란 하나의 테이블과 나란히 놓여 있는 6개의 의자. 그리고 그 주변에서 오디션 심사위원이라 여겨지는 몇몇의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수빈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86인 수빈보다도 더 큰 키의 외국인이었다. 그 남자를 발견한 순간 수빈은 놀라움에 사로잡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다리우스 콘지가 심사위원이라니..'
수빈은 다리우스 콘지를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정회장의 배포에 새삼 놀라면서 심사위원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세븐,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에비타, 에일리언 4, 비치, 윔블던, 미드나잇 인 파리... 지금 당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얼추 10여 편은 되는군. 저 감독이 이 자리에 와있다는 건 내가 예상했던 게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뜻인데..'
수빈은 다른 심사위원들도 살펴보았다.
'성강호와 김해수 선배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군. 그리고 다리우스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남자는 일전에 BJ에서 있었던 미팅에서 배우와 제작진 섭외를 담당하고 있다던 김일섭 부장이고.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보이질 않네.'
심사위원석 가까이 다가가자 수빈을 발견한 성강호와 김해수가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가까이 다가간 수빈이 먼저 인사를 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빈의 말에 성강호가 봄볕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뭘.. 좀 전에 니가 음악 방송에서 1등하는 거 TV로 지켜봤다. 축하해."
'저번 주 드라마 촬영장에서 그림을 전해드린 효과가 너무 좋은데. 그림이 형수님 맘에 쏙 드셨나 보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빈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호텔 방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다들 바쁘네요."
수빈의 말에 김해수가 굳은 얼굴을 하고서는 살짝 긴장이 섞여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디션 볼 때 사용할 카메라랑 오디오 세팅한다고 정신없어서 그래. 곧 끝날 거야."
"그렇군요. 근데.. 누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보통 때와 달리 많이 긴장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수빈의 질문에 김해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늘 오디션에 우리 사무실 소속 여자애도 나오거든."
"그런다고 누님이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이번 오디션에는 걔를 내보내야 한다고 사무실에다 강력하게 추천했거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부담감이 좀 드네. 오늘 오디션에 나오고 싶어 하는 다른 애들이 많이 있었는데 내가 우기다 시피 해서 걔가 나온 거라.."
김해수의 말에 성강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조금 전에 둘이서 그 이야기하고 있었다. 혜수가 추천했다는 애가 영화는커녕 드라마나 연극 무대 경험도 없는 완전 쌩초짜란다. 뭘 믿고 그런 애를 이런 중요한 오디션에 내보내는 건지 원.."
김해수를 타박하는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천하의 해수 누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초보자를 내보낼 리가 없잖아요. 그 친구가 연기를 엄청나게 잘하나 보죠?"
수빈의 질문에 김해수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김해수의 대답에 수빈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네? 누님도 잘 모르신다고요?"
"그래. 걔가 우리 사무실에 들어온 지 아직 일주일 정도 밖에 안 지났어. 며칠 전에 연기 연습하는 걸 얼핏 보긴 했는데..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판단을 못 내리겠네."
"그런데도 오디션에 추천을 하셨다고요? 혹시.. 외람되지만.. 그 친구가 누님 조카라도 됩니까?"
"그런 건 아니고.. 이따 보면 알아."
분위기가 야릇해지자 성강호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턱으로 다리우스 쪽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수빈아. 저 양반이 누군지 모르지? 내가 인사시켜주마."
성강호가 김부장과 대화하고 있는 다리우스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을 사용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다리우스를 데리고 온 성강호가 말했다.
"수빈아. 인사해라. 다리우스 콘지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촬영감독님이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봉순호 감독님이랑 함께 [옹자]를 찍으신 분 아닙니까."
"어라? 어떻게 알았냐?"
"요즘 제가 영화 관련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영화배우를 하겠다는 놈이 봉순호 감독님 작품을 공부 안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죠."
수빈은 성강호의 질문에 대답을 한 후 다리우스에게 다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Je m'appelle Subin. Je suis enchanté de vous rencontrer. C'est votre fan. J'ai vu les films que vous venez de filmer."
(수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당신의 팬으로서 그동안 감독님이 촬영하신 여러 영화들을 아주 감동 깊게 봤습니다.)
다리우스 콘지가 살짝 놀란 얼굴로 수빈과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Enchantee. Vous parlez assez bien français."
(반가워요. 불어를 상당히 잘하시는군요.)
"Dieu merci. J'avais peur de ne pas prononcer la mauvaise note."
(다행이군요. 발음이 나빠서 못 알아 들으시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때 갑자기 드르륵 소리를 내며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침실 방문이 활짝 열렸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지 귀에서 핸드폰을 떼며 거실로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봉순호 감독이었다.
수빈은 곱슬머리에 안경을 끼고 부드러운 눈빛을 이리저리 던지면서 심사위원석 쪽으로 걸어오는 봉감독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최종 보스께서 등장하셨군..'
잠시 후 본격적인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심사위원석에는 맨 왼쪽을 기준으로 수빈, 김해수, 성강호, 봉순호, 다리우스 콘지, 김일섭 부장 등이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김해수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오디션 지원자들의 서류를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수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수빈 동생은 안 봐?"
"선입견이 생길까 봐 지원자들 서류는 나중에 보려고요. 일단 아무런 정보 없이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들은 알아야 누굴 떨어뜨릴지 판단하기가 쉬울 텐데.. 뭐 알아서 잘하겠지."
"네. 누님.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여기 심사위원석 앞쪽이랑 저기 좌우에 하나씩 있는 카메라가 오디션 지원자들을 촬영하려고 설치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 맞아."
수빈은 오른손 엄지를 펴서 자신의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여기 심사위원들 뒤쪽에 높이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는 뭡니까? 저기서는 오디션 지원자들이 잘 안 찍힐 텐데요. 제 눈에는 마치 심사위원들을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 수빈 동생이 늦게 도착해서 잘 모르는구나. 저건 심사위원들을 찍는 카메라가 맞아."
"저희를 왜 찍고 있는 거죠?"
"지금 오디션장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로 찍는 모든 영상들이 실시간으로 바로 전송이 되고 있거든. 어디로 전송되는지 짐작되니?"
"설마.. 정미영 회장님?"
"맞아. 역시 예리한데.. 회장님이 자택에서 오디션 진행사항을 보시고 싶다고 하셔서 심사위원들까지 카메라로 찍어서 보낸다고 하더라고."
"이거 꼭 감시 당하는 기분인데요."
"뭐 상관없잖아.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지. 정회장님 성격상 심사에 직접 간섭할 일도 없을 거고.. 그냥 오디션 현장 분위기가 궁금해서 지시한 거겠지."
"흠. 그렇군요."
그때 심사위원석 앞쪽으로 세련된 스타일의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걸어 나왔다. 심사위원석을 향하여 가볍게 목례를 올린 여성이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보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SAT 여자 주인공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본 오디션은 젊고 신선한 새로운 얼굴의 여배우를 뽑기 위한 오디션으로서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국내의 대형 기획사를 중심으로 각 기획사에서 추천받은 총 12명의 지원자를 심사하게 되겠습니다. 심사 순서는 저희 쪽에서 임의로 지원자들의 지명도를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즉, 처음 들어오시는 분이 가장 지명도가 낮고 마지막에 들어오시는 분이 지명도가 가장 높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수빈은 오디션 진행자의 설명을 들으며 곁눈질로 김해수를 쳐다보았다.
'지명도가 기준이면 해수 누님이 추천했다는 친구가 가장 먼저 들어오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빈의 눈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는 김해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 누님의 친척도 아니고.. 그 친구의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셨을까? 궁금한데..'
"그럼 1번 지원자부터 모시겠습니다. 현재 SN 소속으로 이름은 김샛별입니다."
진행자가 지원자 소개를 끝내고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스태프 중 한 명이 무전기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1번 지원자 입장시켜."
잠시 후 똑똑~ 하는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1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의 아름다운 여성이 들어왔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단처럼 새까만 머릿결이 마치 물결치듯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여성이었다. 트렌치코트로도 감출 수 없는 풍만한 가슴과 꽉 조인 허리띠로 인해 가느다란 허리가 더욱 강조되어 굳이 코트를 벗지 않아도 훌륭한 몸매를 지녔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 와..우..
- 죽이는데.
- C'est beau.
- 작살이네.
- 끝내준다.
오디션장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올 때 수빈은 지원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휘유. 대단한데.. 아름답고 매력적인 얼굴이기도 하지만 얼굴 자체가 굉장히 이율배반적이야. 그 점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매료시키는 것 같아. 전체적으로 볼 때 개성이 흘러넘치는 얼굴이로군.'
수빈은 지원자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매끄럽게 흘러가는 눈썹의 곡선과 크고 동그란 눈망울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는 반면 까만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눈빛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단칼에 베어버릴 듯 매서웠다.
타원형의 부드럽고 갸름한 얼굴형을 가지고 있지만 턱 끝에서 예각을 이루며 목으로 떨어지는 라인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곧고 높은 콧날에 반해 동그랗고 앙증맞은 콧방울과 조그마한 콧볼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고, 얼굴 전체를 볼 때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만 애기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는 지원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참을 감상하던 수빈이 고개를 슬쩍 돌려 김해수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열띤 반응에 한시름 놓았는지 긴장을 풀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의자에 깊이 파묻고 있는 김해수를 보며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누구라도 인정할만하지. 연기력은 차후의 문제고.'
수빈은 고개를 돌려 지원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 순간 수빈은 지원자에게서 알 수 없는 친밀감과 기시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느낌은? 이런 아름다운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그때 봉순호 감독이 마이크를 들고 물었다.
"지원자 분. 굉장한 미인이신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드디어 본격적인 오디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