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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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팬사인회를 다녀온 수빈은 다음날 아침 BBG와 하이유의 합동연습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연습이 3시간이 넘어가자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쉴 틈 없이 계속된 연습으로 피곤한 얼굴의 하이유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래퍼인 경빈씨가 피콜로를 불줄 안다는 게 참 의외네요."
하이유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경빈이 대답했다.
"어머님의 권유로 어릴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플루트를 배웠어요. 중3 겨울방학 때 제가 그만 힙합에 빠지는 바람에 그만뒀죠."
수빈이 이어 말했다.
"일전에 밴드 연주를 한번 해볼까 해서 할 줄 아는 악기를 말해봐라 했을 때 경빈이가 플루트를 할 줄 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며칠 후에 이놈이 다시 말을 바꿨죠. 집에서 연습을 좀 해봤는데 잘 안된다고.. 도저히 손이 꼬여서 못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편곡을 피콜로로 다 바꿨습니다."
수빈의 말에 하이유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피콜로는 악기 길이가 플루트의 반밖에 안되니까 연주하기가 수월하겠죠. 그래도 다들 연주를 잘 하시네요. 연습하면서 들어보니까 수준급 밴드의 소리가 나와요."
"뭐 아무래도 영국 출신 멤버들이 원래 밴드를 했던 애들이니까 기본이 돼있죠. 성빈이는 지금도 집에서 한 번씩 기타를 친다고 하고.. 제가 베이스를 새로 배우긴 했는데 저도 악기를 좀 다룰 줄 알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배워져서.. 사운드가 나름 들을만 할 겁니다."
"들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밴드 사운드가 아주 수준급이라니까요."
그때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성빈이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빈이형. 이거 좀 한번 보셔야겠는데요."
"뭔데?"
"동영상요. 좀 전에 올라온 거 같은데요."
"동영상?"
"네. 일본에서 누가 SNS에 올린 동영상이라는데.. 지금 조회 수 올라가는 게 장난 아니에요."
성빈의 말에 수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일본이면 어제 그 사건이 결국 올라왔나 보네."
일본에서 올린 동영상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BBG 멤버랑 하이유랑 다 같이 모여서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수빈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벙찐 표정으로 어딘가를 쳐다보는 얼굴로 동영상이 끝이나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 이야. 이거 완벽한 카운터 아니냐?
- 얘가 뭐 좀 제대로 배운 거 같은데.
- 수빈씨. 마지막에 얼굴 표정이 너무 웃겨요.
- 형. 일본 경찰서에 같이 안 끌려갔어요?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합심해서 놀리자 수빈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자자. 다들 그만 웃고 다시 연습이나 합시다."
잠시 후 합동 연습을 마친 수빈은 박실장을 만나러 올라갔다.
"어서오게. 수빈군."
"안녕하세요. 실장님. 절 보자고 하셨다던데.."
"영화 최종 대본이 나왔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전해주려고 불렀지."
"그래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며칠 늦었네요."
"일전에 일도 있고 해서 정회장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검토했나 봐. 이제는 영화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시 수정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삼일 더 늦어졌다고 하더라고."
수빈은 박실장이 내미는 USB를 받았다.
"잘 알겠습니다. 대본은 제가 열심히 읽고 공부하겠다고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알겠네. 그런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된 건가? 나도 동영상을 한번 보기는 했는데.."
"..실장님도 그걸 보셨군요."
"그런 재밌는 일이 있었다는데 나도 당연히 봐야지. 그날 정확히 어떻게 된 건가?"
"어제 일본에서 팬사인회를 할 때 뮤란 멤버랑 저랑 같이 앉아 있었어요. 그때 제 옆에 에리카가 앉아 있었는데.."
"그런데?"
"에리카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있는 사람들 중에 눈빛이 영 수상한 남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의 깊게 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놈이 사인을 받다가 갑자기 에리카를 확 끌어안더군요. 그런 후 강제로 입맞춤을 하려고 하길래 제가 급히 손을 뻗어서 그놈의 입을 틀어막았는데.."
"아하. 자네가 그 남자가 뽀뽀를 못하게 막았는데 그때 동시에 뚜껑이 열린 에리카가 펀치를 날린 거구먼."
"열이 받은 건지 아니면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한 건지는 몰라도.. 암튼 저도 에리카가 그렇게 전광석화처럼 남자에게 주먹을 날릴 줄은 상상도 못했죠. 미리 알았음 제가 못하게 말렸을 건데.."
"영상으로 보니까 팔꿈치가 적절하게 꺾여서 들어가는 게 완벽한 라이트 훅이던데. 남자의 아래턱에 송곳처럼 정확하게 꽂히던걸."
"후. 그 바람에 남자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대자로 바닥에 뻗었죠."
"그래서 자네가 그런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군."
"그날 에리카가 날린 라이트 훅은 장난 아니었습니다. 제가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이건 그 남자가 잘못한 거라서 현장에 있던 경찰도 그냥 넘어갔고 뉴스에도 안 내보내기로 이야기가 된 건데.. 팬사인회에 왔던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 장면을 찍어서 SNS에 올린 모양인데요."
"이런 엄청난 일이 무사히 그냥 넘어가질 리가 있겠나. 이제 동영상이 올라왔으니 관련 뉴스가 앞으로 줄줄이 터져 나올 거야."
"후. 큰일이네요. 이 사건 때문에 애들 인기가 떨어지면 안 되는데.. 요즘 한창 잘나가고 있는데 말이죠."
"뭔 소린가? 동영상에 달린 댓글들은 아직 안 읽어본 모양이군."
"연습한다고 그것까지는 아직 못 봤습니다만.."
"에리카의 펀치 그러니까 일본 팬들이 얼음송곳 펀치라고 명명한 그 펀치를 날리는 동영상을 본 일본 팬들 사이에서 말이야. 뮤란이 정말로 사자를 때려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물론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거지. 말이 안 된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만큼 일본에서 뮤란이 가지고 있는 여전사 이미지가 더욱 강렬하게 팬들의 뇌리에 박혔다는 걸 빗대서 말하는 거지. 지금 일본에서 뮤란의 인기가 한층 더 올라가고 있다고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될걸세."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 아. 그리고 조만간 여자 주인공 오디션이 열린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오디션 날짜가 보름 뒤로 잡혔네. 자네가 정회장님에게 그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며?"
"네. 이상한 여자가 뽑힐까 좀 걱정이 돼서요."
"흠. 뭔 말인지는 알겠네만.. 설마 정회장에게도 그렇게 말했었나?"
"아뇨. 그 정도 눈치는 저도 있습니다."
"잘했네. 자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럼 대본을 보고 이상하거나 고칠 점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말을 해주게나. 이젠 시간이 촉박해서 모든 일을 빨리빨리 진행해야 하니까.."
"잘 알겠습니다. 실장님."
수빈은 BBG의 복귀 무대를 위한 밴드 연습과 영화 대본 공부를 병행하며 주말에는 [특별수사본부] 마지막 촬영을 하는 등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BBG 신곡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유희결의 도화지]에 출연하는 날이 되었다.
화요일 저녁 7시 반부터 시작하는 녹화를 준비하기 위해 수빈은 멤버들과 함께 1시까지 KBC 신관 공개 홀로 나갔다. KBC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 도착한 일행은 각자의 짐을 풀고 의자에 앉았다.
"수빈아. 오늘은 라이브 무대라 리허설이 많이 중요할 거 같은데."
마빈의 말에 수빈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일단 드라이 리허설은 우리끼리 간단히 하고 나중에 하이유 선배가 오면 카메라 리허설을 할 거니까 그때 악기 체크랑 음향 체크를 동시에 다 해야 돼서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을 거야."
"하이유 선배는 언제쯤 도착한데?"
"아까 대전 지났다고 했으니까 2시 좀 지나면 도착할 거야."
그때 대기실 문을 노크하며 스태프가 들어와서 말했다.
"BBG 드라이 리허설 준비해 주세요."
잠시 후 악기나 마이크도 없이 맨몸으로 무대에 올라가 간단하게 자신의 위치 및 동선 등을 확인하는 드라이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이십여 분 정도 리허설을 한 후 다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카메라 리허설을 준비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수빈에게 다가왔다.
"수빈씨?"
스태프로 보이는 3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수빈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BBG의 리더 수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도화지에서 음향 감독을 맡고 있는 김민호라고 합니다."
"아. 김감독님.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도화지에는 처음 출연이라 미처 몰라봤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래요. 수빈씨. 저도 수빈씨를 처음 보네요. 반가워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
수빈의 질문에 김민호 음향 감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빈씨. 난 수빈씨가 평범한 아이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박형석 감독님 기억하십니까?"
박형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듣자 수빈의 머릿속으로 일전에 평창 동계올림픽 기념 무대에서 본 적이 있었던 흰머리가 많고 나이가 지긋한 음향 감독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아. 박형석 감독님이라면.. 제가 기억합니다. 일전에 한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내 스승님 되십니다. 내가 이걸로 밥 먹고 살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이죠. 얼마 전 추석 때 이쪽 계통에서 일하는 친구들 2명이랑 같이 박감독님께 인사하러 댁으로 찾아갔었는데.. 그때 박감독님께서 수빈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랬나요? 박감독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수빈의 질문에 김감독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수빈씨가 천재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박감독님이 나랑 친구들을 쓱 한번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수빈이라는 젊은 친구가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앞으로 혹시 만나게 되면 그 친구가 원하는 게 있으면 웬만하면 다 들어줘라. 그러면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무대가 만들어질 거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너무 과찬이신데요. 제가 감히 박감독님께 그런 소리를 들을만한 수준도 아니고 역량도 많이 모자랍니다."
"그럴 리가요. 박감독님의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절대 빈말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전 그분이 누구를 욕하는 건 숱하게 들어봤지만.. 그분이 누구를 칭찬하는 건 살아생전에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그래서 지금 수빈씨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자. 수빈씨."
김감독이 뜨거운 열정이 가득한 눈빛을 수빈에게 보내며 말했다.
"박감독님이 그렇게 칭찬하시는 천재의 솜씨를 저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수빈씨가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허심탄회하게 말하세요. 제 능력으로 들어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같이 한번 멋진 무대를 만들어 봅시다."
김감독의 말에 수빈이 재빨리 머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방송국에서 모든 걸 직접 준비하고 만드는 무대라서 괜히 욕먹을까 봐 연출 쪽은 아예 건드릴 생각조차 못했는데.. 이거 예상치 못하게 박감독님 덕분에 잘하면 재밌는 무대를 만들 수도 있겠는걸.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는 게 임팩트가 있을까나..'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수빈은 입을 열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김감독님. 정 그러시다면 제가 생각한 무대가 하나 있긴 한데.. 이게 가능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무대인가요? 수빈씨가 생각하는 걸 편하게 말하시면 됩니다."
잠시 후 수빈의 설명을 다 듣고 난 김감독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재미 있겠는데요. 좋은 생각입니다. 수빈씨 생각대로라면 오늘 입장하는 관객들에게 아주 깜짝 놀랄만한 무대를 선사할 수 있겠는데요. 그럼 무대를 완전히 새롭게 다시 짜야겠군요."
"혹시 준비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스태프분들이 힘들어 하지지 않을까요? 이미 드라이 리허설도 끝난 상태이고 관객들이 들어오기까지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서요."
"아뇨.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수정하는 거는 금방입니다. 무대 감독이랑 소품팀에게 말하면 넉넉잡아 1시간이면 다 끝날 겁니다. 그리고 더 좋은 무대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 정도 수고는 일도 아니죠. 그리고.. 수빈씨가 베이스를 친다고 하셨죠?"
"네.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습니다."
"잠시만요."
김감독이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