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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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홍 무술감독이 수빈을 보고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빈군. 요즘 한창 바쁠 텐데..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네."
그 말에 장진석 감독이 받았다.
"수빈군. 급하게 온다고 아직 저녁도 못했을 텐데.. 양갈비 좀 먹게나. 이 집이 양갈비를 아주 잘해."
두 사람에게 공치사를 받은 후 수빈은 자리에 앉아 양갈비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걸 보고 식사를 멈췄다.
수빈은 의자를 바짝 당겨앉으며 허리를 세워 자세를 똑바로 한 후 두 감독이 말하기 편하도록 먼저 입을 열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셔서 부르신 거 같은데.. 편하게들 말씀하시죠."
수빈이 말하기 편하도록 분위기를 잡아주자 장감독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수빈군. 자네는 천재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오늘 저녁에 왜 수빈군을 보자고 한 건지 따로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않은가"
"제 짐작이 맞는다면.. 아마 정세경씨가 말한 이번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추격신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래. 이번 영화는 내가 감이 아주 좋아. 대박 칠 촉이 온다니까.. 여태껏 찍은 모든 장면들이 다 내 맘에 쏙 든다네. 하지만 추격전 그 장면은 아무리 봐도 맘에 안 들어. 몇 번을 돌려봐도 너무 밋밋하고 별로야. 영화 하이라이트 부분이 그 모양이면 말짱 황이라고..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흠. 장감독님께서 그 장면이 밋밋하다고 느끼시는 건 그 이전에 제가 한 액션 때문에 반대급부로 그렇게 보이시는 겁니다. 절대로 밋밋한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정 그러시다고 하시면 제가 생각해본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수빈이 미끼를 던지자 몸이 달은 장감독이 덥석 물었다.
"어떤 방법인가? 천재인 자네가 생각한 거라면 보나 마나 대박이겠지. 빨리 말을 해주게나."
수빈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아무 조건 없이 또 도와드리기에는 이전의 일도 있고 해서 저도 사무실에 면이 안 섭니다. 만약에 제가 요구하는 세 가지를 들어주시면.. 그럼 저도 사무실에다가 떳떳하게 이야기를 하고 감독님이 원하시는 좋은 영상을 찍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한번 나서보겠습니다."
"세 가지? 후. 어떤 조건인가? 일단 한번 들어나 봄세."
"사실 그렇게 어려운 조건들은 아닙니다. 일단 첫째로, 제가 정도홍 무술감독님이랑 당연히 협의를 하겠지만 제가 낸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시고 영상에 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그런 건 조건도 아니고.. 또 다른 건?"
"저도 영화 편집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 장면을 편집할 때 저도 좀 끼워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집에 관련된 이론적인 부분들은 제가 이미 공부를 마쳤고 장비 조작하는 건 5분이면 다 배울 겁니다. 제가 명색이 천재 아니겠습니까? 편집 작업하실 때 많이 방해되지는 않을 겁니다."
"흠. 편집할 때 수빈군을 참석시키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때 너무 월권을 하면 내가 입장이 곤란해."
"에이. 감독님도..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뭐라고 감히 감독님의 권한인 편집권을 침해하겠습니까? 경험 삼아 한번 참여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그것도 충분히 들어줄 수 있어. 나머지 하나는 뭔가?"
"마지막 남은 건 돈 문젠데.. 보통 이 문제가 제일 힘들긴 하죠. 조건을 말하기 전에 감독님께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뭐든지 물어보게나."
"제가 볼 때 이번 영화가 사극이기는 하지만 [남한 산성]처럼 대규모 전쟁신 같은 게 없어서 제작비가 많이 들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우리 영화 제작비? 내가 알기로는 남한 산성이 150억 정도 들었지. 우리는 80억짜리야. 남한 산성 반 정도 밖에 안 들어."
"역시 그렇군요. 사람이 많이 나와봐야 저잣거리의 건달 패거리 아니면 선화 옹주의 뒤를 쫓는 추적자들이니까.. 그럼 손익분기점이 얼마입니까?"
"270에서 280만 사이 정도 되려나? 대충 300만부터는 무조건 남는다고 봐야겠지."
"그럼 주연배우들은 300만 정도부터 러닝개런티를 받겠군요?"
"그렇겠지. 내가 배우들의 계약까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얼추 그 정도 될걸세."
"흠. 감독님. 그럼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제가 이번 영화에서 받는 출연료가 천오백만 원입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영화가 잘 된다면.. 만약 그렇다면 저도 러닝개런티를 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조연배우라고 하지만 저에게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닝개런티라.. 수빈군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나도 생각하네. 하지만 이미 다 끝난 계약을 회계팀에서 다시 해줄 리가 만무한데.."
"그럼 그쪽에다 이렇게 한번 제의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손익분기점이 300만이라고 하면.. 그럼 전 500만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러닝개런티를 받는 걸로 하면 부담이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주연배우도 아니고 하니.. 500만을 못 넘기면 어차피 저에게 한 푼도 줄 필요가 없어지는 거고, 500만이 넘으면 영화가 나름 흥행에 성공한 거니까 저에게 보너스를 준다는 개념으로 러닝개런티를 주는 걸로 말입니다."
"흐음. 그런 조건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말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럼 그 문제는 감독님이 한번 알아봐 주시고.. 제가 생각한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빈의 말에 두 사람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는 건가?"
"혹시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 중에 산(鏟)이라고 아십니까?"
"그게 뭔가?"
그때 정도홍 무술감독이 끼어들어 말했다.
"월아산(月牙鏟) 할 때 그 산을 말하는 건가?"
"역시 정감독님이 무술을 하셔서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산입니다."
"그거 아주 다루기 힘든 병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기병(奇兵)에 속하는 병기고 양쪽에 다 칼날이 달려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제대로 배워야 쓸 수 있는 병기죠. 잘못 다루다가는 자기 손가락을 날려먹거나 자기 몸을 찍기 십상인 아주 위험한 병기입니다. 왜 사람들이 쌍절곤 좀 한다고 세게 돌리다 자기 머리통이나 팔을 찍지 않습니까?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걸 자네가 다룰 줄 안다고?"
"아는 정도가 아니죠. 아주 잘 씁니다. 십팔반병기는 어릴 때부터 사부님께 인이 박히도록 배워왔거든요."
"그런가? 하여간 알면 알수록 대단한 친구야.. 근데 갑자기 그걸 왜 생각한 건가?"
"제가 요 며칠 한국에서 방영된 사극들을 많이 조사해 봤습니다. 사극에 보통 등장하는 병기들이 대부분 창이나 칼 아니면 활 정도가 전부이더군요. 감독님이 보시기에 너무 식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면 처음에는 신기해하지만 막상 또 보다 보면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병기를 영화 속에 등장시키면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물론 어설프게 사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겠지만요."
수빈의 말에 장감독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 뭐야. 월아산? 그 병기를 사람들이 신기해하지만 막상 보면 익숙하다고? 난 처음 들어보는 병기 같은데.."
장감독의 말에 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시면 감독님도 익숙하실 겁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그러면서요. 쉽게 설명드리면.. 서유기 아시죠?"
"서유기는 알지.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럼 사오정은 아십니까?"
"그것도 당연히 알지. TV에서 맨날 나~방~ 하는 애 아닌가."
"뭐 그건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이고요. 서유기에 나오는 사오정이 들고 다니는 무기가 일종의 월아산 같은 겁니다. 강요보장(降妖寶杖)이라고 따로 불리는 이름은 있지만 월아산의 한 종류인 거죠."
"아! 사오정이 들고 다니는 거. 그거 나도 알아. 앞에 둥그런 거 달린 거 말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앞부분에 달린 초승달처럼 생긴 부분을 월아(月牙)라고 부르는 겁니다. 뒤에 달린 삽같이 생긴 칼날 부분을 산(鏟)이라 부르고요. 합쳐서 월아산이 되는 겁니다."
"그걸 자네가 잘 다룬다고?"
수빈이 장감독의 질문에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귀신처럼 다루죠."
수빈의 대답에 장감독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말이야. 영화 속에서 우검 송해섭이 그걸 귀신처럼 잘 다룬다는 걸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하지? 원래 대본에 없는 내용이고 거기에다 월아산이라는 게 전통적인 조선의 무기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장감독의 질문에 수빈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대사 한 줄 집어넣으면 간단하게 해결되죠. 우검 송해섭이 예전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때 그때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그쪽 고수에게 배웠다. 그럼 끝인 거죠. 거기에 송해섭이 혼자서 월아산을 들고 수련하는 영상을 잠깐 집어넣으면 더욱 좋고요."
수빈의 말에 장감독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영상들이 많은지 갑자기 촛점이 흐려진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되겠구만. 좋아. 아주 좋아.. 그럼 월아산을 들고 우검 송해섭이.."
"하이라이트인 추격전을 할 때 쓰는 거죠. 말을 타고 월아산을 휘돌리면서 적진으로 달려간 다음 화려한 액션으로 적들 몇 명을 가볍게 격파하면 그림이 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적의 반격에 당해서 말에서 떨어지면서 월아산을 놓치는 겁니다. 화살 같은 걸 몇 대 몸에 꼽고 떨어지면 딱이겠죠. 그런 다음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는 겁니다. 원래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말입니다."
"멋지겠군. 그림이 되겠어.."
"사극에서 처음 등장하는 병기니까 관객들이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겁니다. 월아산이 앞뒤에 칼날이 다 달려 있는 병기라서 양쪽 칼날로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적들 목을 날리면.. 흠. 그건 너무 잔인해 보일 거 같긴 하네요."
"아냐. 그런 것도 가능해. 나중에 적당히 편집하면 될걸세. 지금 아주 삼빡한 영상이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어. 이건 무조건 대박일 거야."
"어떤 영상입니까?"
"다들 이리 가까이 와보게."
잠시 후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영화 촬영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간 수빈은 BBG와 약속한 연습을 하기 위해 지하 1층에 있는 2번 합주실로 내려갔다.
막상 합주실에 도착을 해서 수빈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합주실 안에 모여 있었다.
"우와. 뭡니까? 깜짝 놀랐네요. 아침부터 무슨 일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