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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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거실에서 정회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거실 벽면에 걸려있는 작품들을 차분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수빈군?"
수빈은 몸을 돌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정회장님."
"호호. 지금은 회장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회장님이네요."
"호칭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회장님. 얼굴이 그새 많이 좋아지셨네요. 화색이 도는 게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앉아요. 수빈군."
"네. 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은 수빈이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굽힌 상태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온몸에 활력이 샘솟나 봅니다. 이전보다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거 같습니다."
"그래요? 하긴 요즘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 신경을 쓰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 그래서 내가 건강해 보이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회장님."
"그래 무슨 일로 수빈군이 날 독대하고 싶다고 한 건지 궁금한데.. 어디 한번 들어나 볼까요?"
"제가 회장님께 다른 볼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영화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외람되게 독대를 신청했습니다."
"영화 관련해서라.. 내가 보고받기로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죠?"
정회장의 말에 수빈이 피식 웃으며 정회장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돌직구를 날렸다.
"그거야 회장님이 이번 영화에 너무 매몰되어 계셔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오판일 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죠. 하지만 저 같은 천재는 이럴 때에도 냉철하게 분석을 할 수가 있는 법입니다."
"수빈군이 천재라는 건 알지만.."
수빈은 정회장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 시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전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일반적인 천재라는 범주를 벗어난 진정한 천재입니다. 그러니 제 말을 귀담아들으시는 게 좋습니다."
"이런. 수빈군이 오늘 말을 너무 막 하는 경향이.."
수빈이 다시 정회장의 말을 잘랐다.
"당연하죠. 전 정회장님 부하도 아니고 회장님 밑에서 일하며 월급 받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정회장님과 저는 영화제작자와 영화배우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수빈의 말에 정회장이 현재 본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려는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수빈군. 젊어서 패기가 있는 건 좋지만 선을 너무 넘으면 곤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빈이 다시 한 번 강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정회장님. 제가 회장님 맘에 안 드시면 다른 배우로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회장이 한참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본 다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정도 나이가 되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어요. 수빈군이 멍청하거나 어디가 모자란 사람도 아니고.. 천재라는 수빈군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온다는 건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굉장히 본인 맘에 안 든다는 건데.. 도대체 무슨 일인 거죠?"
그제서야 수빈이 소파에서 허리를 쭉 펴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군요. 젊은 놈의 무례를 이렇게 이해해주시다니 역시 회장님 소리를 들으실만한 분입니다.“
“공치사는 그만하고..”
수빈은 잠시 짬을 둔 다음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회장님. 제 판단으로는 이대로 가면 이번 영화는 반드시 망할 겁니다."
수빈의 충격적인 말에 정회장이 놀랬는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수빈군 판단으로는 이번 영화가 관객 동원에 실패할 거라는 건가요?"
"관객 동원에는 어느 정도 성공할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700만? 800만? 그 정도는 들 거 같습니다."
"그런데 왜 망한다고 말하는 거죠?"
"회장님의 목표가 그게 아니니까요. 이번 영화를 제작하는 목표가 800만 정도의 관객이 보는 영화를 제작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천만은 가볍게 넘고 영화사의 이정표 같은 대작 영화를 만드는 게 회장님의 목표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번 영화는 완전히 망할 겁니다."
"그럼 수빈군은 영화가 망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먼저 대본 문제가 있습니다. 회장님. 영화의 기본이자 뼈대인 대본 그러니까 얼마 전에 최종 수정된 대본을 혹시 읽어 보셨습니까?"
"당연히 읽어봤죠. 돈이 350억이 넘게 투입되는데.."
"재미있던가요?"
"아주 재밌게 봤어요."
정회장의 답변에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이번 영화가 망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좀 설명해 봐요."
"알겠습니다. 회장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통찰력이 뛰어나고 지적 능력도 매우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한다는 건.. 이번 영화의 대본이 일반인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장님이나 저같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번에 수정된 대본을 읽으면서 스스로 내용을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본 속에 많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대본을 읽을 때 재미를 주는 거죠. 하지만 일반인들 그러니까 실제로 영화관에 와서 영화를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불친절합니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는데 내가 여기서까지 머리를 써야 되냐며 싫어할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수빈의 말에 정회장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대본이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바로 회장님 때문입니다. 회장님이 주목하는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대본을 쓰는 사람들이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자신의 창의력을 총동원하여 대본을 썼을 겁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회장님 때문에 작가들이 보통 진부하다고 표현하는 클리셰를 대본에서 모조리 다 빼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런 걸 이용해서 대본을 쓰면 회장님한테 수준이 낮다고 욕먹을까 봐 작가들이 걱정을 했겠죠. 쉽게 말씀드리면.. 대본을 쓰는 작가들이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습니다. 이런 건 소설로 차분히 읽기에는 훌륭하지만 영상으로 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수빈의 말에 정회장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정회장의 질문에 수빈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대본에 클리셰를 다시 집어넣어야죠.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영화의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클리셰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구태의연하고 진부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회장님이나 저나 지금 상업영화를 찍는 거지 예술성 높은 독립영화를 찍는 게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요.“
수빈의 말에 정회장이 허리를 소파에 묻으며 한탄했다.
“후우. 수빈군 말대로라면 대본을 첨부터 다시 써야 된다는 말인데..”
정회장의 말에 수빈이 빙긋이 웃으며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대본에서 수정하고 추가될 내용을 간추린 겁니다. 문제점을 지적했으면 해결책도 드려야죠. 작가들에게 이걸 참고로 대본을 수정하라고 오더를 내리시면 아마도 이삼일 내로 대본을 다 고칠 수 있을 겁니다.”
“흠. 수빈군이 직접 작성한 건가요?”
“네. 회장님. 불세출의 천재를 한번 믿어보시죠. 제가 작성한 대로 대본을 수정하면 천만은 무조건 넘을 겁니다.”
“천만이라.. 장담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 대본을 제가 말한 대로 수정한다면 제가 한 계약도 다시 좀 바꾸고 싶습니다.”
“어떻게요?”
“계약서 상에서 말입니다....”
잠시 후 수빈의 설명이 끝나자 정회장이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회사 입장에서는 특별히 손해 볼 일도 없을 거고.. 오히려 수빈군이 너무 모험을 하는 거 아닌가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겠습니까. 제가 배금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도 돈 좋아하고 필요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회장님. 영화감독을 제가 말하는 사람으로 한번 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1,200~1,400만은 보장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1,200만을 보장할 수 있는 감독이라.. 천하의 봉순호 감독도 그런 장담은 못할 건데 그게 누구죠?”
“그 분은...”
수빈의 대답을 들은 정회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수빈을 쳐다보았다.
“그 감독의 최고 히트작 스코어가 300만 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서 지금 말하는 거죠?”
정회장의 말에 수빈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며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제 머릿속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감독들 대부분의 자료가 들어가 있습니다. 저의 천재적인 머리로 분석을 한 결과를 가지고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그 감독 분을 쓸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잠시 후 정회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후. 수빈군이 대본에 관해서 한 말들은 나도 어느 정도 납득이 돼요. 이번 영화 제작을 준비하면서 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모든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수빈군 의견을 수용할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감독 문제는..”
“회장님. 받아들이시기 힘들면 그냥 회장님이 원하시는 분으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감독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건 주제넘고 월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전 단지 건의를 드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본 수정만은 이번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관철되어야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늘 독대를 요청한 겁니다.”
정회장이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요. 수빈군. 대본은 작가들에게 다시 수정을 지시하죠. 하지만 감독은 제가 정합니다.”
“네. 저도 좋습니다.”
정회장이 범같이 매서운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빈군. 내가 수빈군을 천재라고 인정을 했기 때문에 오늘 독대를 한 거고 수빈군의 대본 수정 요구까지 들어주는 거니까..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말아요.”
“회장님.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이제 다른 할 말이 더 있나요?”
“사소하지만 개인적으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잠시 후 수빈의 부탁을 들은 정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정도는 그냥 수빈군이 원하는 대로 들어줄 수 있어요. 큰 문제도 아니고.. 다른 부탁이 또 있나요?"
"없습니다."
수빈은 말을 하며 품에서 몇 번 접은 종이를 꺼내어 내밀었다.
"제가 회장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겁니다. 못 하는 서예지만 집에서 몇 자 적어왔습니다."
수빈이 내미는 종이를 보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면서 정회장이 말했다.
"어머 어머.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난 수빈씨 그림도 좋지만 글도 너무 좋더라."
- 鶴壽松齡
여러 번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펴면서 정회장이 물었다.
"뭐라고 적은 건가요?"
"학수송령. 회장님의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적어봤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예쁘게 표구해서 거실에 걸어둘게요."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회장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설려다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뒤돌아섰다.
"아. 회장님."
"네. 수빈군."
"거실에 걸려있는 그림 중에 말입니다. 일전에 왔을 때 없던 그림이 새롭게 걸려있더군요. 제가 볼 때는 1888년 그려졌던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랑 아주 유사한 화풍의 그림이었는데.. 혹시 그 그림이 고흐의 작품입니까?"
"어머. 수빈군. 서양화에 대해서도 잘 아나 봐요. 고흐의 그림 맞아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요."
"그렇군요. 고흐가 아를르 시기라고 불리는 1년 좀 넘는 기간 동안 200점 가까운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고흐가 워낙 많은 작품들을 그렸으니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작품들도 당연히 많이 있겠죠. 하지만.. 거실에 걸려있는 그 그림은 웬만하면 다시 파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수빈의 말에 정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은.. 그 그림이 가짜라는 말인가요? 이 정미영이 누군가에게 속아서 그림을 샀다?"
"회장님. 그림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남에게 팔면 법적으로 사기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정확한 진위 여부는 저도 확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천재의 눈을 믿는 게 좋으실 겁니다. 사신지 아직 얼마 안 되신 거 같은데.. 빠른 시간 내에 다시 되파시길 권해드립니다."
수빈의 말에 정회장이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그 그림은 내가 다시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도록 하죠."
정회장이 내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밤늦게까지 작업에 다시 몰두했다.
새벽에야 잠이 들은 수빈은 잠결에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는 거야? 어라. 박실장님인데..'
"여보세요? 박실장님?"
[박실장이네. 수빈군. 어제저녁에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