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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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 촬영장에 도착한 수빈은 분장실에서 분장을 받고 있었다. 분장이 거의 끝날 때쯤 어디선가 본듯한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수빈씨?"
"네. 접니다만.. 누구시죠?"
"정세경 배우의 매니저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서 뵌 얼굴이다 했더니.. 촬영장에서 오다가다 본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인사는 처음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신지?"
"분장 끝나고 잠시 정세경씨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으신가 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제 매니저 쪽으로 전화를 주셔도 충분한 일을.. 네. 잠깐이라면 시간이 됩니다."
"그럼 기다렸다가 분장이 끝나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세경씨가 지금 밴 안에서 쉬고 있는데 같이 가시죠."
"그럴까요? 분장이 거의 다 끝나가니까 잠시만 기다리시죠."
잠시 후 수빈은 정세경의 밴 안에서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정세경은 아직 분장을 하기 전인지 쫙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핏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수빈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정세경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수빈씨. 고마워요. 촬영하느라 바쁘고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아닙니다. 무슨 일로 보시자고 하신 건지?"
"제가 부탁을 드릴게 있어서요."
"어떤 부탁을 말입니까?"
"영화에서 마지막 추격전 말인데요. 그 장면에서 저번처럼 한 번 더 말을 갈아타는 액션을 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네? 그 추격전은 일전에 이미 촬영이 다 끝났잖습니까?"
"맞아요. 촬영은 끝났는데.. 그 장면을 모니터링하신 감독님 말씀이 조금 밋밋하다고 하셔서.. 뭔가 임팩트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보고 다시 그때처럼 말위에서 뛰어넘는 묘기를 부리라고요?"
정세경이 다리를 바꿔 꼬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장면이 보기에 훨씬 더 풍성해질 거 같은데.. 수빈씨 생각은 어떠한가 해서요."
정세경의 말에 수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못 하겠습니다."
설마 수빈이 자신의 면전에서 대놓고 못하겠다며 즉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한 듯 정세경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러신가요? 하기가 힘드셔서 그런 건가요?"
"뭐 억지로 하려고 들면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세경씨."
"네. 수빈씨."
"일전에 아침 일찍 옥상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죠?"
"네. 같이 방에서 술 마신 다음날이었죠."
"그때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번 영화는 흥행에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저보고 도와달라고. 이전에 찍었던 상업영화가 그러니까.. [노름꾼-2] 맞나요? 그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서 여배우로서 많이 힘들다고."
"네. 그 영화가 관객 동원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별로 없고 해서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영화는 꼭 성공하고 싶다고 수빈씨 보고 많이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해요."
"제가 비록 조연이기는 하지만 이번 영화가 제가 영화배우로서 처음으로 출연하는 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이번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경씨의 부탁도 있었지만 저도 제 나름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 대본에도 없던 파격적인 액션신을 찍었죠. 그것도 제가 그런 액션을 하겠다고 나서면 위험하다고 말릴게 뻔해서 매니저 형을 거짓말로 속이기까지 하면서요."
"네.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위험하고 파격적인 액션은 그때 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깜짝 놀라는 충격적인 장면은 한 번으로 족해요. 영화 속에서 그런 비슷한 액션이 또다시 반복되면 관객들이 오히려 싫어할 겁니다. 과유불급이죠. 그리고.. 제가 부상을 당할 위험도 아주 높고요. 그래서 못합니다. 정세경씨?"
"네?"
"전 조연배우입니다. 영화 속에서 조연이 너무 튀면 오히려 영화를 망친다고 생각해요. 스크린에서는 주연배우가 훨씬 더 밝게 빛나는 게 맞는 거죠. 전 정세경씨가 주연배우로서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남은 촬영 기간 동안 조연배우로서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빈은 정세경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 후 밴에서 나와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떡밥을 던져놨으니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독이 직접 나에게 섭외를 하겠지. 그러면 제작진이나 투자자들과 정식으로 딜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이 세상이 자본주의라면 나도 거기에 맞게 살아야지. 노동에는 대가를 받아야 하는 법. 기브 앤 테이크. 간단하잖아.'
자신감과 신념이 가득 담긴 발걸음으로 촬영장에 도착한 수빈은 금일 정해진 촬영 분량을 다 찍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실장님? 저 수빈입니다."
[수빈군. 어쩐 일로 자네가 직접 전화를 한 건가?]
"실장님께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어떤 부탁인가?]
"가까운 시일 내로 BJ 정미영 회장님과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흠. 그게 쉽지는 않을 건데.. 무슨 일로 그러는 건가?]
"뭐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조만간 들어가는 S. A.T. 영화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 거죠. 정미명 회장님이 제 작품을 좋아하시니까 아마도 쉽게 승낙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날 때 그림은 힘들지만 간단하게 글이라도 하나 써서 드리겠다고 운을 한번 띄워보시죠."
[알겠네. 어떤 내용인지 나에게는 비밀인 건가?]
"네. 우선은 그냥 약속만 잡아주시죠. 실장님이랑 의논을 해봐야 회장님이 노! 하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일단 저쪽을 먼저 설득하는 게 우선입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풀리게 되면 그때 실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만나야 하는 건가?]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늦어도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약속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알았네. 그럼 내가 정회장님께 연락을 한번 해보고 답변을 받으면 바로 알려주겠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실장과 통화를 끝낸 후 수빈은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 수빈씨?]
"네. 선배님. 잘 지내시죠?"
[네. 수빈씨는 요즘 어때요? 많이 바쁘죠?]
"조금 바쁘네요. 선배님. 지금 어디십니까?"
[전 지금 강원도로 가는 차 안이에요. 그쪽에 행사가 잡혀있어서요.]
"그러시구나. 요즘 강원도 쪽에서 행사가 많은가 봐요?"
[네. 평창 동계올림픽 때문에 강원도 쪽에서 행사가 많네요.]
"그럼 오늘은 힘들겠고.. 선배님, 내일 오전에 혹시 시간이 되십니까? 만나서 의논을 할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내일요? 잠시만요.]
전화상으로 매니저와 하이유가 일정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하이유가 말했다.
[수빈씨?]
"네, 선배님."
[내일 오전에 잠깐 시간이 될 거 같아요. 11시쯤에는 다시 행사를 하러 출발해야 되지만요.]
"그럼 내일 오전 9시쯤 제1 녹음실로 오시면 어떨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흠.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그런데.. 만나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시간 맞춰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저 기대 잔뜩 하고 있을게요. 내일 봐요.]
전화를 끊으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일 때문에 보자고 하는 건데 뭔 기대를 잔뜩 한다는 거야.."
그때 백성철 매니저가 수빈에게 물었다.
"수빈아. 회사로 가면 되는 거야?"
"아뇨. 형. 집으로 가주세요. 후.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엄청 많네요."
"그래? 알았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수빈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컴퓨터 앞으로 갔다.
'차분하게 하나씩 처리해야지. 일단 그럼 제일 먼저 [달빛 속의 호위무사]를 위해서 검색부터 해보자..'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작업을 한 수빈은 다음날 아침 일찍 집에서 악기를 챙겨 회사로 나갔다. 회사에 도착한 수빈은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방음이 잘되어 있는 합주실 중에서 요 근래 BBG가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2번 합주실로 찾아갔다.
집에서 가져온 악기를 합주실에다 내려놓고 제1 녹음실로 올라간 수빈은 하이유가 오기를 기다리며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9시가 10분 정도 지났을 때 녹음실 문이 열리며 하이유가 들어왔다.
하이유는 아침 일찍부터 미용실에 다녀온 듯 풀 메이크업인 얼굴에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분홍색 짧은 미니스커트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검은색 롱 패딩을 걸친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수빈씨. 저 왔어요."
"아. 선배님. 오셨어요?"
하이유가 혀를 날름 내밀며 말했다.
"수빈씨 만난 다음에 행사 바로 갈려고 메이크업 받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선배님. 얼마 늦지도 않으셨는데요."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나요? 설마 절 보고 싶어서?”
하이유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던지는 말에 수빈은 가볍게 대꾸하였다.
“뭐 선배님이 보고 싶기도 했었지만 오늘은 일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
“네. 선배님.”
“어떤 일 때문에?”
“유희결 선배님 아시죠? [유희결의 도화지] 진행하시는.. 그분이 제게 부탁을 하셨는데요....”
잠시 후 수빈의 설명이 끝나자 하이유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수빈씨랑 함께라면 저도 좋아요. 유희결 선배님 부탁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잘 됐네요. 이번 기회에 수빈씨에게 빚진 것도 좀 갚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에 새롭게 편곡한 걸 한번 들어 보시죠.”
수빈이 장비를 만지자 녹음실 안으로 새롭게 편집된 [달과 나의 이야기] 음악이 흘러나왔다.
맨 처음은 귀에 익은 둥 둥 두둥 하는 드럼 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런 뒤 하이 피치의 삐리리~하는 악기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하이유가 물었다.
“음? 이건 무슨 악기 소리죠? 원곡에 있던 악기도 아니고 일전에 수빈씨가 평창에서 직접 연주하던 아쟁 소리도 아닌 거 같은데요?”
“이건 피콜로 소리입니다.”
“피콜로요?”
하이유의 질문에 수빈은 음악을 멈췄다.
“네. 선배님.”
“수빈씨가 피콜로 소리를 좋아해서 이렇게 편곡한 건가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선배님.”
“어떤 사정이죠?”
"이게 왜 들어가게 된 거냐면..."
하이유는 수빈의 설명이 끝나자 이해를 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피콜로를 사용하신 거구나.”
“그럼 다시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래요.”
음악이 끝나자 하이유가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음. 전 맘에 들어요.”
“그래요? 특별히 거슬리거나 고쳤으면 하는 부분은 없나요?”
“네. 전체적으로 다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데요?”
“이번 편곡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수빈씨가 예전에 하던 거랑 조금 다르네요.”
“역시 귀가 예민하시네요. 이번 편곡은 저희 멤버 중에 로빈이 직접 한 겁니다. 세부적으로 제가 손질을 좀 했지만 대부분은 로빈 작품이죠.”
“아. 로빈이.. 그렇구나.”
“특별히 더 고칠게 없으시면.. 다르게 편곡된 게 한 곡 더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죠.”
수빈이 장비를 만지자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전주가 시작되자 하이유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수빈에게 물었다.
"이 전주는.."
"맞습니다. 귀에 많이 익으시죠? [Axel F]에서 샘플링 한 겁니다."
"이 곡을 어디에서 공연을 하려고 이 전주를 쓰신 건가요? 설마 이것도 유희결 선배님의 도화지에서?"
하이유의 질문에 수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이 곡은 곧 있으면 열릴 [NAMA] 무대에서 쓸려고 편곡한 겁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편곡을 이렇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 무대랑 딱 어울리네요. 전 이 편곡이 아~주 맘에 들어요. 이건 수빈씨가 직접 하신 거죠?"
"네. 제가 한 겁니다."
"흐음. 역시.."
"저희가 다음 주 월, 수, 금에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방송국 무대에 나가기 전에 선배님이랑 최소한 두 번 정도는 맞춰봐야 될 거 같은데.. 시간이 가능하시겠습니까?"
"매니저랑 의논을 해서 스케줄을 조정해 볼게요. 다음 주 언제 언제 가능한지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하이유를 보내고 난 뒤 수빈은 지하 1층에 있는 합주실로 내려가 BBG 멤버들과 만나서 [유희결의 도화지] 무대를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점심 무렵에 박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정미영 회장과의 독대가 잡혔다는 연락이었다.
수빈은 저녁 6시경 회사에서 정미영 회장이 보내준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잠시 후 수빈은 일전에 박실장과 같이 한번 와본 적이 있었던 정미영 회장의 집 앞에 도착하였다.
운전기사가 공손히 열어주는 차 문으로 내리면서 수빈은 생각했다.
'암호랑이가 살고 있는 집이라.. 호랑이를 잡으려면 아무래도 호랑이 굴로 직접 쳐들어가는 게 가장 간명한 방법이긴 하지.'
수빈은 어깨를 쫙 펴고 암호랑이의 소굴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