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29 - 1
수빈은 성강호의 갑작스러운 차가운 태도가 진심인지 농인지 찰색을 해보았지만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하. 대배우라는 인간들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찰색으로는 도통 알기가 힘드네.’
“형님이 싫으시다면.. 그럼 성강호 선배님?”
“어허. 이놈이 아직도.”
“성강호 선생님?”
수빈의 말에 성강호가 팔로 수빈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마. 정신 안 차릴래? 원장님! 내가 니 대빵 아이가.”
그때야 농이라는 걸 알아챈 수빈은 엄살을 부렸다.
“아. 원장님. 하늘 같으신 국정원장니임. 아파요.”
팔을 풀며 성강호가 말했다.
“아프긴 뭘 아파. 테레비 보니까 김정국이한테도 힘으로 이기는 놈이..”
“에이. 그거야 정국이 형이 재밌으라고 봐준 거죠. 예능이잖아요. 예능.”
“말은 잘해요.”
“원장님 아니 형님. 감사합니다. 제가 찍는 영화에 국정원장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로 하신 걸 보고 안 그래도 만나면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마! 그런 놈이 그래?”
성강호의 말에 수빈은 머리를 세차게 굴렸다.
‘이 양반이 지금 분명히 나한테 뭔가 삐진 게 있는데.. 그게 뭘까?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 순간 수빈의 머리를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형님. 혹시 집에서 형수님이..”
“그래. 이놈아. 이제야 알았냐? 어제저녁에 내가 집에서 니가 이번에 프로듀싱했다는 여자애들 그 누구야.”
“뮤란입니다. 형님.”
“그래. 뮤란. 걔들 앨범이 일본에서 대박이 났다고.. 그것도 그 뭐야. 니가 그린 그림으로 붐이 생겨서 무지 잘 팔린다고 삼실에서 주워들은 걸 집에서 말했다가..”
“형수님한테 박살 나셨죠?”
성강호가 생각만 해도 열이 받는다는 듯 흥분해서 말했다.
“그래. 내가 어.. 집에서 어.. 맨날 우리 수빈이 우리 수빈이 그러는데 말이야. 어제 마누라가 한소리 하더라. 그렇게 아끼는 후배라면서 어.. 약속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림 하나 못 받아 오냐고.. 내가 마누라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니가 아나? 내가 니한테 부탁한 지가 언젠데.. 생판 첨 보는 어린 여자애들 그림은 그렇게 몇 십 장씩 그려제끼면서 말이야.. 나는 신경도 안 쓰지?”
“몇 십장은 아닌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다음 촬영 때까지 꼭 그려오겠습니다.”
“진짜지?”
“네. 형님. 믿으셔도 됩니다.”
성강호가 수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그래. 요즘 니가 정신없이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니한테 뭐 대단한 그림을 바라겠냐. 마누라가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도록 쪼매난 거 하나만 그려줘라. 나도 좀 집에서 맘 편하게 밥 좀 얻어먹고 살자.”
“알겠습니다. 형님.”
“니가 주연인 영화에 카메오로 나가서 내가 아주 작살을 내려고 그랬는데.. 내가 봐준다. 원장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형님.”
“왜?”
“영화에서 저는 주로 외국에 나가있기 때문에 국정원장이랑 같이 걸리는 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 내가 아직 대본을 못 봐서.. 영화가 뭐 그러냐?‘
“...그러게 말입니다.”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밴 안에서 매니저가 물었다.
“오늘 촬영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피곤해 보이는데.”
“후. 그런 건 아닌데.. 일을 하나 해결하면 하나 또 생기고.. 끝이 없어서요. 영화 찍기 전에 벌여놓은 일들 다 정리하려고 성질도 좀 죽이고 사람들한테 양보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빨리 잘 안되네요.”
“뭐 젊을 때는 그런 것도 좋지 않아? 몇 년만 더 지나면 그때는 일을 차분하게 골라서 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네. 그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겠죠.”
“이번 영화가 잘 돼서 천만 찍으면 가끔 예능이나 나가고 일 년에 영화 한두 편씩 만 출연해도 될 거야. 잘 나가는 영화배우들은 그러고 살잖아?”
“에이. 말도 안 돼요. 회사에서 그렇게 놔둘 리가 없잖아요. 제가 그렇게 사는 걸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수빈의 목표는 뭔데?”
“제 목표요?”
회사에 도착한 수빈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신곡 녹음을 위해 제1 녹음실로 올라갔다. 장비를 체크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마빈이 들어왔다.
"이야. 친구. 얼굴 보기 힘들다."
"야! 그게 누구 때문인데.. 네가 워낙 바빠서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멤버들 보고는 숙제하라고 던져 놓고선 자기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야.."
"후. 내가 많이 미안하다.."
수빈의 발 빠른 사과에 마빈이 흠칫하며 말했다.
"뭐.. 너한테 사과까지 받으려고 한 소리는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너 왜 그래? 평상시랑 달라서 많이 좀 낯설다.. 다른 멤버들은 다 어디 갔어?"
"아직 안 왔어. 네가 너무 일찍 온 거야.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어라. 그동안 난 녹음 장비 좀 살펴볼 테니.."
마빈이 의자에 앉아 장비 점검을 하는 수빈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수빈이 너. 요즘 많이 힘든가 보다?"
"음? 내가 많이 힘들어 보여?"
"그래 인간아. 쓰레기 같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천재로 각성하더니 송곳처럼 날카롭게 여기저기 푹푹 찌르고 다녀서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 송곳이 많이 무뎌진 거처럼 보이네. 잠깐 안본 사이에 뭔 일 있었냐?"
"너 눈에는 내가 많이 변한 것처럼 보이냐?"
"그래. 미우나 고우나 친구 아니냐.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지.."
"후. 자본주의가 뭔지 법치국가가 뭔지.. 그동안 몸으로 체험을 했다고나 할까.."
"그게 뭔 소리야?"
"연예인으로서 성공하려면 투자자나 제작진의 눈치도 봐야 되고 같은 연예인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기도 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지.. 맘에 안 드는 인간이라고 다 때려죽일 수도 없고 맘에 안 드는 일이라고 다 때려치울 수도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체득한 거야."
수빈의 말에 마빈이 피식 웃었다.
"애가 잠깐 안본 사이에 바보가 다 됐네.. 네가 봤을 때 두들겨 맞을만한 놈이니까 때렸겠지. 때려치울만한 일이니까 때려치웠을 거고.. 네가 성격이 지랄 맞은 건 알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럴 만큼 멍청한 인간은 아니잖아?"
"그렇게 성질대로 하다가는 이 바닥에 적이 너무 많이 생겨. 그래서 깨달았지. 연예인으로 성공하려면 내 맘대로 하고 살면 안 된다는걸.. 빨리 돈도 많이 벌고 어떡하던 위로 올라가려면 성질 죽이고 세상에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수빈의 말에 마빈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거 천재 맞아? 야. 너 꿈이 제대로 된 연예기획사를 설립해서 세계를 잡아먹는 거 아니었어?"
"그렇지. 그러려면 연예인으로서 어서 빨리 탑으로 올라가야지."
"너 천재가 아니라 바보지? 연예기획사를 설립하는 조건에 회사 사장이 탑인 연예인이어야 한다는 조건 같은 건 없다고. 그냥 돈만 좀 있으면 누구나 다 설립할 수 있는 거야."
"그래. 돈! 이 세상은 돈이 전부인 자본주의 세상 아니냐. 회사를 세우려면 당연히 돈이 있어야 할 거고 그러려면 내가 어서 빨리 탑급 연예인이 되어야 하는 거지.."
수빈의 대답에 마빈이 화가 난 듯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우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따위 놈이 무슨 천재라고.. 야! 연예인 아니면 돈 벌 자신 없어? 연예인 그만두면 굶어죽어? 너 정도 머리면 속셈학원을 차려도 떼돈을 벌 거다. 아니면 그림을 그려서 팔아먹든지.. 권법 도장을 차려도 좋고 외국어 잘하니까 어디 가서 어학원을 차려도 될 거고.. 연예인 못하면 다른 걸로 돈 벌어서 기획사 차리면 될 거 아니냐. 왜? 다른 일로는 돈 벌 자신이 없어서 그래?"
수빈은 장비를 만지던 손을 뚝 멈췄다.
마빈의 말이 수빈의 머릿속에서 계속 리플레이 되며 마치 철퇴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내가 다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복수해 주겠다고 나한테 큰소리 떵떵 치던 놈은 어디로 간거야? 그렇게 패기 있게 내지르던 수빈이는 어디 가고 이따위 바보 멍청이가 남은 거냐고?"
마빈이 말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너 같은 천재가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살아. 그러려고 연예인 하고 사나? 잘 나가는 연예인이 되는 게 너 목표인 거야? 아니면 세계를 주름잡는 연예기획사를 설립하는 게 너 목표인 거야?"
마빈의 말에 수빈이 신음성을 내었다.
"아.."
"세상에 순응하고 그러는 건 나같이 머리 나쁘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놈들이나 하는 거고..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렇게 살 필요도 없고.."
"아아.."
"천재라고 불리는 그 좋은 머리는 어따 쓸려고 그러는 건데? 예능 프로 나가서 퀴즈 풀 때나 쓸려고 그러는 거야?"
"아아아.."
흥분해서 말을 쏟아붓던 마빈은 자신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신음성만 내뱉는 수빈을 보며 깜짝 놀랐다. 마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수빈에게 다가가 의자에 멍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수빈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수빈아! 얘가 왜 이래? 진짜로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수빈아. 수빈아."
마빈이 어깨를 잡고 흔드는 통에 정신을 차린 수빈은 마빈의 허리를 와락 부둥켜안고 말했다.
"고맙다. 마빈. 너 덕에 내가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거 같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지. 어떻게 얻은 두 번째 기회인데.."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빈아. 괜찮아? 괜찮은 거야?"
그때 녹음실 문이 열리며 나머지 BBG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수빈과 마빈이 부둥켜안고 있는 걸 발견한 멤버들이 문 앞에서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입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경빈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닥쳐!"
"..네. 형."
잠시 후 BBG의 신곡 녹음이 진행되는 녹음실에서 수빈의 고성이 연신 터졌다. 시간이 흘러 녹음이 다 끝났는지 수빈이 말했다.
"다들 고생했다. 부스 밖으로 나와라."
- 우와. 드디어 끝이다.
- 수빈이형. 오늘 장난 아니다.
- 형이 하도 갈궈서 나 오늘 울뻔했다.
- 아이고. 난 힘들어 죽을 거 같아.
- 수빈이가 오늘 날 잡았나 본데.
멤버들이 부스 안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마이크를 올리고 수빈이 말했다.
"앞으로 데뷔 무대가 있기 전까지는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을 할 거다. 그러니까 다들 스케줄 조절 잘해. 나도 안 빠지고 꼭 참석할 테니.. 빠지는 인간들은 각오하고.."
- 아. 저 인간 오늘 왜 저래?
- 후. 앞으로 죽어나겠군.
- 리더가 까라면 까야지.
- 우리가 신인 그룹도 아니잖아요?
- 마빈형이랑 하는 연애가 잘 안 되나?
수빈은 다시 마이크를 올렸다.
"조금 전 연애 어쩌고 한 놈이 경빈이지?"
-...아닌데요. 성빈이 같아요.
- 저 아니에요. 형. 경빈이 맞아요.
"며칠 후면 올해도 다 간다. 우리도 4년 차에 접어들고.. 이번 앨범으로 BBG가 국내에서 원탑으로 올라서야 하지 않겠어?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룹이 한번 되어보자고.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다들 나만 믿고 따라와라. 알았지?"
- 네. 형. 알았어요.
-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면 되죠?
- 리더가 까라면 까야지.
- 넌 그만 좀 까라. 그러다 헐겠다.
- 일단 밥부터 좀 먹자고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수빈은 양수리에 있는 [달빛 속의 호위무사] 영화 촬영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