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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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
'이 양아치를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는 소리를 들을까나..'
그때 김성희가 말을 타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야. 김호진. 내가 초대한 손님들에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성희 네가 부른 사람들이야?"
"말조심해! 내가 부른 사람이 아니라 정중히 와달라고 초대한 분들이라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다투는 동안 수빈의 머리가 초고속으로 회전을 하기 시작했고 수빈의 눈이 예리하게 찰색을 하기 시작하였다.
김성희와 같은 성씨. 서로 반말하는 동등한 관계. 남자의 눈빛에서 알 수 있는 치기(稚氣). 육체노동과 무관한 허약한 몸. 무례한 말투에서 느낄 수 있는 오만한 품성. 부자들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승마를 즐기며 폴로 시합장을 하루 통째로 빌릴 정도의 재력.
'전형적인 철없는 부잣집 아들이로군. 자신밖에 모르고 살면서 고생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온실 속의 화초. 이런 인간을 전생에서 내가 어떻게 처리했더라..'
수빈은 오래간만에 이전 생에서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주던 교관과의 대화가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의 가르침에 따라 실행을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때 교관님께서 죽어도 싼 놈은 마땅히 쳐죽여라고 가르쳐 주셨지..'
두 사람이 대판 싸우는 동안 수빈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슬며시 꺼내어 녹음 기능을 활성화시킨 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예전 같았으면 사지 중 하나를 부러뜨리고 난 후 대화를 시작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 사는 이상 그럴 수는 없겠지. 필요한 건 두들겨 팰 수 있는 명분과 그에 따른 증거.'
"성희씨."
수빈은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큰 소리로 김성희를 불렀다.
'지금 필요한 건 간단한 도발. 멍청하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인간일수록 잘 걸리지..'
김성희가 수빈의 호명에 미안한 눈빛을 하며 대답했다.
"네. 수빈씨."
수빈은 오른손 검지를 뻗어서 남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은 누구시길래.."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까이 댄 후 빙글빙글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굽니까? 혹시?"
자신을 보고 돌았냐고 하는 수빈의 액션에 김호진이라는 남자가 크게 소리를 쳤다.
"이 천한 놈이 감히 누굴 보고.. 너 죽고 싶어!"
수빈은 멍청한 놈답게 참으로 쉽게도 걸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녹음이 잘 되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천한 놈이라니요! 저도 나름 공인이라 불리는 연예인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시죠."
"예의? 개, 돼지 보다 못한 연예인 나부랭이가 아주 뒈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남자의 거친 말에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면 명분은 충분히 얻었고.. 남은 건..'
수빈은 폴로 시합장이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를 쳤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나이도 어려 보이는 사람이 아까부터 예의 없이 반말로 찍찍 내뱉고.. 당신이 뭔데 사람을 이렇게 무시합니까."
수빈의 큰 소리에 멀리서 일행을 지켜만 보고 있던 폴로 선수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계획대로 증인들은 충분히 모이는데.. 혹시 다들 한통속으로 거짓을 말할 수도 있으니 성희씨를 끌어들여야겠지..'
"아까 성희씨 말 못 들었어요? 난 성희씨가 초대한 손님 자격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근데 왜 당신이 지랄입니까 지랄이.. 귀에 못 박았어요?"
"이 천한 놈의 새끼가!"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흥분해서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수빈은 생각했다.
'너 같이 싸가지 없는 놈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는 건 또 절대로 못 참지. 어디 한번 덤벼봐라.'
"죽어라!"
- 꺄아아악!
깜짝 놀란 성희의 소프라노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가 말을 탄 상태에서 말렛이라는 나무망치를 수빈의 머리통을 향하여 힘차게 휘둘렀다. 이미 그럴 줄 예상하고 있던 수빈은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주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흉기를! 사람 머리를 향해 흉기를 휘두르다니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지금 사람을 죽일 생각입니까!"
남자가 흥분하여 큰 소리로 외치며 다시 말렛을 휘둘렀다.
"그래. 이 새끼야! 뒈져라!"
수빈은 날아오는 말렛을 쳐다보면 생각했다.
'증인도 많고 녹음된 증거도 있고.. 준비는 완벽하군.'
수빈은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말렛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한발을 앞으로 내밀어 진각을 밟은 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빠른 속도로 팔을 뻗었다.
'맘 같아선 골반 신경에 경(經)을 박아 넣어 평생 고자로 만들고 싶지만 그건 너무 심하고.. 사나흘 정도는 피똥을 질질 싸도록 만들어 주마..'
- 퍽
모래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측 콩팥 쪽에 발경을 얻어맞은 남자가 게거품을 물었다.
- 허억. 끄르르륵. 끄어억.
- 쿵.
남자가 참을 수 없는 극통에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자 수빈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절 쳐죽이려고 흉기를 휘두르다 그만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군요."
수빈은 땅바닥에서 배를 움켜쥐고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낙마하면 부상 위험이 많다고 하던데 이거 큰일이네요. 구급차라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가까이 모여들자 수빈은 뒤로 빠졌다.
"수빈씨! 어디 다친데 없어요? 호진이 저게 미쳤나. 말렛을 사람에게 휘두르다니.. 괜찮아요?"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피했습니다. 저분 아주 위험한 분이네요. 말위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정도로 사람의 머리를 향해서 전력으로 망치를 휘두르다니.. 자칫하면 머리통이 깨져 죽을뻔했습니다."
김성희의 자신을 걱정하는 말에 수빈은 많이 놀란 듯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을 한 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녹음 기능을 중지시켰다.
'이 정도 녹음했으면 증거로 충분하겠지..'
시간이 흐른 후 수빈은 클럽 하우스에 있는 식당에서 김성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빈씨. 오늘 죄송해요. 제가 초대를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괜찮습니다. 어디 다친데도 없고.. 근데 아까 그분은 누구시길래 그렇게 무례합니까?"
"대전에 있는 백화점 사장을 하고 계시는 작은아버지 아들이에요. 저랑 사촌이죠."
"그럼 그분은 거기 백화점에서 일하는 분입니까?"
"아뇨. 저랑 동갑인데 얼마 전 군대 입대했다가 허리디스크 때문에 의가사 제대하고 내년에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는 대학생이에요."
"흠. 그런 분이 승마를 하면서 폴로 시합을 하시는군요."
"뭐 이쪽 사람들이 다 그렇죠..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그 인간이 뒤끝이 아주 심한 성격이라.. 행여나 수빈씨에게 보복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네요."
수빈은 김성희의 말에 아까 퍼뜩 떠올랐던 교관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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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수빈. 너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절대 믿어서는 아니 된다."
"교관님. 왜 그렇습니까?"
"네가 힘 있는 집안의 자식이기 때문이야. 만일 네가 가난하고 힘없는 천민의 아들이라면 성선설을 믿는 게 살아감에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믿고 도우면서 살아야 그나마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틸 수 있을 테니.. 하지만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어떡하든 짓밟고 잡아먹어야만 자신의 권세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럼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먼저 힘 있는 사람들의 습성을 알아야 할 것이야. 그들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신과 상대방의 힘을 비교하여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그런 습성에 따라 힘 있는 사람들은 지독(至毒), 포악(暴惡), 악랄(惡辣), 음흉(陰凶), 크게 이 네 가지 품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각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교관님."
"상대방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자신이 더 약하다고 생각될 때 일단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잡아먹을 기회가 오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지독,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되면 무력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짓밟으려고 드는 포악, 상대방보다 우위라고 판단되면 온갖 치졸한 방법을 동원해서 상대방을 괴롭히고 기를 꺾으려 드는 악랄,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지만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척 행세를 하며 뒤에서 몰래 계략을 꾸미는 음흉."
"그럼 유형별로 대처는 어떡해야 합니까?"
"대처법은...."
"잘 알겠습니다. 교관님. 그런데 만약에 힘은 있지만 상대방과 자신의 힘을 비교하지도 않고 마냥 짓밟으려고만 드는 유형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처럼 어리석고 멍청한 유형은 오히려 네가 상대방보다 더 강하게 나가면 될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인간 곁에 그 인간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을 리 만무하니 후환(後患)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어도 마땅한 놈들은 그냥 쳐죽이면 그만이야. 명심해라. 제갈수빈. 인간의 성품은 본디 악한 것이고 선한 것은 인위(人爲) 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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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상념을 멈추며 김성희에게 말했다.
"그런 철없는 인간의 보복 따위는 절대 두렵지 않습니다."
수빈의 말에 반한 듯 눈빛을 초롱 하게 빛내며 김성희가 대답했다.
"수빈씨는 보기보다 성격이 많이 대범하고 남자답네요."
수빈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아까 매니저에게 듣기로는 대본 때문에 오늘 절 보자고 하셨다던데.. 어떤 내용입니까?"
"아. 대본.. 이번 영화의 제목이 정해졌어요. 혹시 아시나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S.A.T. - Mission No.1]이라고 정해졌어요."
"영화 제목은 SAT고 미션 1은 속편을 대비해서 붙인 거겠군요."
"네. 맞아요."
"그럼 오늘 제목을 알려주려고 보자고 하신 겁니까?"
"아뇨.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 때문에 보자고 한 거예요."
"영화 여주인공요?"
"네."
수빈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대본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았다.
"제가 읽은 바로는 영화 속에 여주인공은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해외 로케를 할 때 그 나라의 여성들이 엑스트라로 가끔 등장은 하지만 여주인공은 없지 않습니까?"
"영화 속에서 수빈씨는 미주 1팀이잖아요. 그리고 유럽 2팀이 따로 또 있는 건 아시죠?"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미주 1팀은 다 남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유럽 2팀에는 여자가 한 명 있잖아요."
"그렇죠. 유럽 2팀은 팀장과 백업요원이 남자고 연락책이 여자죠."
"그 여자가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이에요."
"네? 그 여자분이 영화의 여주인공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요."
-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
그때 식당의 여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수빈은 머릿속으로 유럽 2팀과 관련된 대본 내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