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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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뮤란을 만나기 위해 지하 2층으로 내려가니 여느 때처럼 복도에서 많은 연습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수빈은 복도에서 연습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요 근래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많이 격상되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에는 부러움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연습생들이 지금은 열망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던 연습생들이 허리를 접으며 폴더식 인사를 하고 마치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조세홍입니다.
- 연습생 이미정. 인사드립니다.
- 선배님. 춤과 노래에 자신 있는 박정석입니다.
- 춤. 연기. 노래. 다 가능한 송선미에요.
- 래퍼 김종한입니다. 꼭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들 연습생 중 뮤란의 데뷔 앨범이 이미 완성되었고 데뷔 무대가 이틀 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수빈의 주도하에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모두 알고 있으리라.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연습생들이 연예인으로서 뜨고 싶다는 갈망과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으로 한껏 불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수빈은 속으로 또 한 번 다짐했다.
'후. 생각해 보면 나는 운이 참 좋은 편이야. 앞으로 매사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해야겠다. 안빈낙도 따위야 나이 먹고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정상에 올라서는 것만 생각하자..'
수빈은 뮤란이 연습하고 있는 3번 연습실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와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의 고함과 호통 속에 뮤란이 라퓨타 음악에 맞춰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 발! 야! 다들 발 안 맞춰? 발이 먼저 딱딱 맞아야 손이 맞을 거 아냐!
- 데뷔 무대 영상이 평생 너희들을 따라다닐 건데 계속 이따위로 할래?
- 데뷔하기 싫어? 말만 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준다.
- 손끝! 표정! 얼굴 찡그리고 춤출래? 그러고도 너희들이 아이돌이야?
수빈은 뮤란의 연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구에 조용히 서서 구경을 하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짜임새가 있는걸. 역시 선생님들이 이런 쪽에서는 나보다 낫군. 내가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지..'
라퓨타 음악이 끝나자 뮤란 멤버들이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을 헐떡거렸다. 선생님들이 수빈을 보며 아는 척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수빈씨. 어서 와. 애들이랑 할 이야기 있음 지금 휴식시간을 줄 테니.."
수빈은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가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하는 말을 잘랐다.
"아뇨. 선생님. 처음부터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제가 중간에 들어와서.."
"그래?"
그 순간 박송희가 야차 같은 표정을 지으며 뮤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다들 안 일어나? 이것들이 빠져가지고서.. 너희들 데뷔 앨범 프로듀서가 왔는데 이런 모습 보일래? 처음부터 전력으로 다시 간다. 빨리빨리 일어나."
곧바로 라퓨타 음악이 흘러나왔고 뮤란 멤버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수빈은 무대 전반적인 움직임과 멤버들 간의 호흡 등을 중점으로 지켜보았다.
'그동안 다들 열심히 한 모양이네. 선생님들이 연습 중에 호통칠 때 멤버 개개인 이름을 따로 호명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군. 멤버들 전원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충분히 올라왔어. 그렇다면..'
음악이 끝나고 뮤란 멤버들이 다시 바닥에 주저앉자 박송희가 수빈을 슬쩍 쳐다보았다. 박송희를 바라보며 수빈이 오른손 검지를 세운 채 한 바퀴 돌렸다. 박송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꾸 퍼질래? 아예 이불을 깔아줄까? 아침에 몸무게 잰 거 보니 다들 어제 실컷 먹고 잤던데 체력이 왜 이래. 빨리빨리 일어나라. 돼지처럼 띵띵 부어서 TV에 나갈 거야? 살 빼야지. 좋은 말로 할 때 발딱 일어나."
다시 음악이 흐르고 뮤란의 춤이 시작되었다. 수빈은 이번에는 멤버 개개인의 동작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윽고 음악이 끝나자 수빈은 박송희 트레이너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10분간 휴식. 살 빼야 되니까 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수빈은 뮤란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트레이너 선생님들과 짧은 회의를 하며 자신이 파악한 몇 가지 유의 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런 후 바닥에 퍼질러 있는 뮤란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침 일찍부터 연습을 시작하였는지 소녀들의 땀 냄새가 수빈의 코를 찔렀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고생이 많다. 오늘 직접 보니 선생님들이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그런지 아주 훌륭한 데뷔 무대가 될 거 같네."
수빈의 말에 멤버들 중 에리카가 손을 들며 물었다.
"오빠. 이틀뒤 저희 데뷔 무대에 같이 가주시면 안 되나요?"
"내가? 왜? 너희들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이틀 후면 너희들도 이제 어엿한 아이돌인데 내가 왜 너희들을 신경 쓰냐. 그날부터 너희들은 연습생이 아니라 나랑 똑같은 연예인이고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버는 사회인들이야. 그럼 다들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그리고 그날 난 제주도에서 훈련받아야 된다. 나도 내 코가 석자인 사람이야.. 뮤란의 데뷔 무대는 내가 TV로 본방 사수하마."
우~하는 뮤란 멤버들의 반발을 가볍게 무시하고 수빈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잠시 후 연습실에서 나온 수빈은 제1 녹음실로 올라가서 편곡 작업을 하고 있는 로빈을 만났다.
"내가 부탁한 건 잘 돼가냐?"
수빈의 말에 요 며칠 무리를 했는지 로빈이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곡은 거의 다 끝났어. 세부적으로 조율만 하면 될 거 같아."
"그래? 고생했다. 그럼 어떤지 한번 들어볼까."
잠시 후 로빈이 편곡한 걸 들은 수빈이 말했다.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그럼 알아서 마무리 잘하고.. 4일 뒤 우리 신곡 녹음할 때까지는 완성되겠지?"
"후. 그때까지 계속 붙들고 있으면 가능할 거 같긴 하다."
"OK. 그럼 그때 멤버들 다 같이 모여서 같이 들어보는 걸로 하자. 수고해라."
로빈을 격려한 후 수빈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건물을 나서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 이틀이 흘러 일요일이 찾아왔다.
수빈은 스킨스쿠버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해양실습 교육을 받기 위해 매니저와 함께 아침 일찍 제주도로 날아갔다.
제주도 성산포에 도착한 수빈은 아침 9시부터 11시 반까지 강사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은 후 점심 식사를 위해 뭍으로 올라왔다.
같이 교육받는 사람들과 함께 가까운 식당에 들어간 수빈은 각종 회 및 제주도 향토 음식인 오분자기 뚝배기를 시킨 후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쯤이면 시작할 거 같은데..'
뮤란의 첫 데뷔 무대인 [SBC 인기가요]를 보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자 옆에서 같이 교육을 받는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빈씨. 지금 뭐 보시는 거예요?"
"아 네. 저희 사무실에서 오늘 [SBC 인기가요]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신인 걸그룹이 있어서요. 12시 10분부터 방송이 시작한다고 해서.. 본방사수 좀 하려고 그럽니다."
"어머. 그럼 핸드폰 말고 TV로 다 같이 보면 되죠. 아주머니! 아주머니! 여기 TV 좀 SBC로 틀어주세요."
잠시 후 식당 안에 있는 TV가 켜지고 SBC로 채널이 맞춰졌다. 그러자 여성이 다시 말을 걸었다.
"수빈씨. 아직 시작 안 했네요. 지금 광고 중인데.. 그럼 이제 핸드폰 안 보셔도 되죠?"
"네.."
"그럼 사진 좀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제 SNS에 좀 올리려고 그러는데.. 전 내일 출근 때문에 조금 있다 서울로 올라가야 되거든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수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핸드폰을 꺼낸 후 우르르 수빈 옆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사람들과 사진 찍으랴 사인하랴 야단법석을 떨은 후에야 수빈은 겨우 TV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살짝 긴장한 채로 점심을 먹던 수빈은 뮤란의 데뷔 무대가 끝난 후부터는 흡족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잘했어. 내가 지적한 걸 이틀 새 다들 잘 고쳤네. 멤버들 중에 실수한 사람도 없고 에리카가 공중 도약하는 퍼포먼스도 얼굴이나 자세가 다 잘 빠진 거 같고.. 멤버들 얼굴이 조금 긴장해 보이는 건 첫 무대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사람들 반응이 어떠려나..'
식사 도중 핸드폰으로 뮤란의 데뷔 무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해보려던 수빈은 마음을 고쳐먹고 핸드폰을 집어넣은 후 식사에만 열중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났어. 사무실에서 알아서 잘 하겠지. 오호. 오분자기 뚝배기 맛이 예술인데..'
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한 후 수빈은 1시 반부터 3시 반까지 오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후 뭍으로 나왔을 때 강사가 수빈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빈씨. 교육받느라 고생했어요."
"강사님이 고생하셨죠. 바닷속 깊이 잠수하니까 엄마 품속처럼 느낌이 아주 포근해지는 게.. 사람들이 왜 스킨스쿠버를 하는지 알겠더군요."
"그렇죠? 수빈씨. 원래는 내일 오후에 계속 해양실습 교육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겠죠."
"지금 수빈씨가 교육을 너무 잘 따라오고 물속에서 아주 침착하셔서 연산호 투어에 같이 가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뭡니까?"
"제주 앞바다에서 보트 타고 조금 멀리 나가면 산호초 군락지가 있어요. 연산호라고.. 가을 요맘때가 가장 아름다울 때입니다. 원래는 어드밴스부터 참가가 가능한데.. 수빈씨 정도면 같이 가도 될 거 같아요."
"저는 좋죠. 사고 안 칠 테니 데려만 가주시죠."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해양실습을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연산호 투어를 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수빈씨도 거기에서 다이브를 한번 하고 나면 스킨스쿠버의 매력에 흠뻑 빠지실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저녁 먹을 때 다시 보든지 하죠.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네. 강사님도요."
매니저와 함께 지정된 숙소로 돌아온 수빈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수빈아."
"네. 형."
"너 샤워하는 동안 연락이 왔는데.."
"어디서요?"
"BJ 김성희."
"그 여자가 왜 전화했데요? 전화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지금 좀 볼 수 있냐고 하는데.."
"제주도라 못 본다고 말 안 하셨어요?"
"그쪽도 지금 제주도에 있데."
"그래요? 내가 제주도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전화했지.."
"SNS 보고 알았단다."
"뭐라 하면서 보자고 하던가요?"
"수정 대본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서 간단하게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데.."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
"후. 뭔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쪽이 아직은 갑이니까 까라면 까야죠. 지금 출발하면 됩니까?"
잠시 후 수빈은 매니저가 모는 렌터카에 올라타서 이동을 하였다.
"어디로 오라고 하던가요?"
"주소를 보내줬어. 제주도 지리는 나도 잘 몰라서 네비 찍고 가는 중이다. 제주시 구좌읍이라는 곳으로 오라는데..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넌 눈 좀 붙이고 있어라."
삼십여 분을 차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은 김성희가 미리 이야기를 해놨는지 입구에서 검문을 간단하게 통과하고 차를 몰아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눈앞에 축구장 3배 정도 되는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잔디밭 위에서 여러 마리의 말들이 사람을 태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형. 여기 뭐 하는 곳입니까? 격구(擊球) 비슷한 걸 하는 거 같은데.. "
수빈의 질문에 매니저가 대답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까 안내판 보니까 여기가 폴로 경기장이래. 지금 폴로 경기하고 있는 거 같은데."
"폴로라.. 전 처음 보는 경기네요."
그때 잔디밭 위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이쪽으로 말을 몰고 왔다. 수빈이 살펴보니 자신들을 여기까지 부른 김성희였다.
머리에는 분홍색 헬멧을 쓰고 상체에는 등 쪽에 숫자가 적혀있는 분홍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체에는 하얀 바지에 니패드와 무릎 아래까지 오는 웰링턴 부츠를 신고 있었다.
한 손에 나무망치 같은 것을 들고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온 김성희가 말을 탄 채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던졌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찾아오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네. 금방 오던데요. 지금 폴로라는 시합을 하시는 겁니까?"
"네. 오늘 모임에서 친선 경기가 있어서요. 폴로 시합장이 한국에는 제주도 밖에 없어서 아침에 내려왔어요."
"그렇군요."
그때 말을 타고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수빈을 쳐다보며 이건 웬 놈이냐라는 눈빛을 한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손에 들린 말렛(mallet)이라고 불리는 나무망치를 앞으로 내밀며 말을 던졌다.
"너희들 뭐야?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오늘 여기를 우리 모임에서 하루 임대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내가 직원들에게 명령해놨는데.. 무슨 방법으로 몰래 들어온 거야? 이곳은 개나 소나 함부로 다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고.."
말을 탄 남자의 고압적인 태도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말에 수빈은 벙찐 얼굴을 한채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또 뭐 하는 강아지냐? 세상은 넓고 양아치는 많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