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73화 (73/236)

# 73

25 - 3

수빈은 정팀장을 보고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팀장님께서 나이도 어린 저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제가 팀장님의 영역을 계속해서 침범할 거라는 오해를 하고 계실까 봐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작업하고 있는 뮤란 데뷔곡과 BBG 복귀 곡을 발표하고 나면 당분간은 프로듀싱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영화에 전념할 생각이라서요."

수빈의 질문에 정팀장의 입에서 이미 생각을 정리해 놓은 듯 즉각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첫째, 원인 제공자가 나라는 거지. 비록 몰랐다고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저지른 놈이 나랑 관련이 있고, BBG 멤버들이 어리다고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나의 잘못이지. 둘째, 나는 나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네. 국내 3대 기획사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YK에서 무려 십 년을 버티고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실력이 안되고 회사에서 바라는 만큼의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면 벌써 잘렸겠지."

잠시 숨을 고른 후 정팀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볼 때 나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인력이야. 나 정도 실력자는 못해도 이 바닥에 30명은 족히 될걸세.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자네는 그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야. 나는 수빈군이 조만간 YK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연예인이자 돈줄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보네. 그런 자네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는 거의 자살행위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사장 아들도 아니고.."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정팀장이 갑자기 주저주저 거렸다. 그런 후 뭔가 결심을 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이유로는, 아직 젊고 가능성이 많은 수빈군이 듣기에 치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돈 때문이라네. 이 바닥에서 나 정도 위치에 있다 보면 돌봐줘야 될 사람들이 많다네. 그 사람들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정팀장의 말에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돌봐줘야 될 사람이 많다고요? AR 팀에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3분이 전부 아닙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있나요?"

"AR 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네. 수빈군은 프로듀싱을 할 때 모든 걸 본인이 직접 다하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원래 노래 한 곡을 작업하면 거기에 들어가는 다른 인력들이 많이 있다네. 대표적으로 악기 연주자들이나 코러스를 넣어주는 무명 가수들이 있겠지."

"아.."

"음악 하는 사람들이 다 잘 먹고 잘 사는 건 절대 아니지 않은가. 실력은 있지만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해서 애기 분유값도 못 버는 인간들이 허다한 게 이 바닥이야. 예술을 한다는 게 원래 배고픈 일이기는 하지만.. 나 정도 위치가 되면 그런 사람들에게 큰 돈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밥은 먹을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게 음악계 선배로서의 도리라고 볼 수 있지."

"그러시군요."

"자네가 이미 발표한 [달과 나의 이야기] 음원이나 실황 음원에 그 누구도 참여를 하지 못했지 않은가. 남은 2곡도 자네가 직접 다 할 예정이라고 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게 행여나 나 때문이라면.. 나랑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거라면.. 내가 자네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바꾸고 싶은 심정이라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호라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정팀장님이 배곯는 음악 후배들을 곡 작업에 참가시켜 주면서 돈을 받아먹는 것도 아니야. 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예전에 음악을 하다가 포기하고 접으려고 했던 사람이야. 돈은 못 버는데 나 좋다는 여자는 생겼고 집에 생활비로 갖다 줄 돈은 없고.. 그러다 정팀장님이 곡 작업할 때 몇 번 불러줘서 겨우겨우 버티다가 편곡자로 돌아서면서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경우지. 그러다 몇 년 뒤 정팀장님이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불러주셔서 몇 년째 함께 일하고 있고.."

정팀장이 듣고 있기가 민망한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난 수빈군이 생각하듯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라서 오해를 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어디 가서 손가락질 받는 쓰레기 같은 인간은 아니라고 자부하네. 수빈군이 행여나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풀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정팀장의 말에 수빈이 대답했다.

"그 말씀은 만약 제가 오해를 푼다면 제가 지금 하는 작업에 AR 팀도 참여를 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부끄럽지만.. 그렇네. 수빈군의 음악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신선한 음악이야. 그럴 만큼 히트 가능성도 아주 높지. [달과 나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작업에 다른 사람들도 참여를 시켜주게나. 이건 절대로 나나 AR 팀만을 위해서 하는 부탁이 아냐. 부디 선처해주게.."

"흠.."

정팀장의 솔직한 말에 수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회의실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AR 팀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온다면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까지는 없겠지. 앞으로 스케줄이 더 바빠질 거고 AR 팀에게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잠시 후 마음을 굳힌 수빈은 긴장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AR 팀을 쓰윽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솔직히 아까 보여주신 자료들을 살펴보니까 제가 오해를 한 부분도 있더군요. 여태껏 정팀장님이 다른 멤버들의 저작권을 강탈해 갔다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자료들을 확인을 해보니 이건 저작권이라고 말할 수준이 안되는군요. 그냥 간단한 스케치 정도에 불과해서.."

수빈의 말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확 풀어졌다.

"후. 다행이네. 행여 수빈군의 오해가 안 풀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스케줄이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저의 불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무리 스케치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회사의 이익보다는 원작자의 이익을 더 신경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이네. 난 원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야. 그 당시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가.. 후우. 더 말하면 내가 구차해지고.. 암튼 앞으로는 더욱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네."

"좋습니다.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과거 일들은 깔끔하게 다 묻어버리고 오해도 푸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남자답게 서로 다 털고 가죠."

"고맙네. 수빈군."

수빈이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어 정팀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제가 작업하던 뮤란의 [라퓨타], BBG의 [Dispatch]의 마스터 음원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곡더.. [나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얼마 전 제가 만든 곡이 들어가 있습니다."

수빈의 말에 정팀장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런가.. 이걸 나에게 주는 이유는?"

"정팀장님이 직접 최종 프로듀싱을 하시죠. 챙겨야 할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배들도 좀 챙기시고요. 그 대신! 제가 가져야 할 저작권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프로듀싱도 저랑 AR 팀이 공동으로 한걸로 올려주시고요. 제가 손해를 많이 보면서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요."

수빈의 말에 정팀장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렴. 그거야 당연한 거지. 정말 그래도 되겠는가?"

"네. 어차피 저작권 중 제일 중요한 작사, 작곡이 제 몫이고 공동 프로듀싱이라면 저작인접권중에 일부는 힘들게 음악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저도 양보할 마음이 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자네에게는.."

수빈이 손을 들어 정팀장의 말을 잘랐다.

"굳이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정팀장님 덕분에 부담을 덜고 영화에 더욱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서로 윈윈하는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계약 조건이랑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의논을 해보죠."

"좋네. 이 은혜는 내가 절대 잊지 않겠네."

잠시 후 수빈과 AR 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열띤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날 이후 수빈은 자신이 찍고 있는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아침 일찍 양수리로 나가 하루 종일 영화를 찍고, 밤에는 집에서 뮤란의 앨범 재킷으로 사용할 그림을 그리는 나날들을 반복적으로 보냈다.

간간이 AR 팀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며 날이 추워지기 전에 예정된 승마신들을 다 찍기 위해 노력한 수빈은 일주일 만에 말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다 소화하고 뮤란의 최종 녹음 날에 맞춰 사무실로 나갔다.

AR 팀과 같이 이틀간 뮤란의 최종 녹음을 진행하면서 수빈은 영화 찍는 틈틈이 작업을 해 온 뮤란의 앨범 재킷도 마무리 지었다.

정신없이 바쁜 이틀간의 밤샘 작업 끝에 마침내 뮤란의 데뷔 앨범 최종본이 완성되었고 신인기획팀과 의논 끝에 뮤란의 데뷔 무대를 5일 후로 잡았다.

뮤란의 데뷔 앨범이 완성된 날 저녁에 수빈은 BBG 멤버들을 소집하여 앞으로 일주일 뒤에 신곡 녹음을 마무리하겠다며 각자 알아서 준비를 철저히 해달라고 통보한 후 매니저가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밴 안에서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빈아."

"네. 형."

"너 너무 정신없이 바쁜 거 아냐? 옆에서 보기에 불안하다."

"괜찮아요. 정해진 계획대로 굴러가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5일 후면 뮤란이 데뷔할 거니까 더 이상 제가 신경 쓸 필요가 없죠. 그러면 남은 거라곤 다음 주까지 BBG 신곡 녹음만 끝내면 돼요. 그럼 이제 영화 말고는 특별히 신경 쓸 일들이 없어요. 신곡 활동이야 어차피 해야만 하는 거고.."

"그래도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 보이는데.."

"형. 제가 아직 젊잖아요. 체력 좋을 때 좀 무리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저의 미래를 위해서는 제가 주연으로 들어가는 영화를 성공적으로 찍는 게 가장 중요해요. 크랭크인이 얼마 안 남아서 다른 일들을 미리미리 정리해 놔야만 돼요. 그래야 다른 잡생각 없이 집중해서 영화를 찍죠."

"후. 알았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밤에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그럼요. 걱정 마세요."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작은 거라도 형에게 말해야 된다. 알겠지?"

"네. 형"

"내일 발표 나면 당분간 또 정신없을 거니까 오늘 밤은 푹 자라. 내가 내일 11시쯤 데리러 오마."

"네. 조심해서 가세요."

오래간만에 집에서 편하게 잠을 잔 수빈은 다음 날 아침 10시경 느긋하게 일어나서 샤워를 한 후 거실에서 매니저가 오기를 기다리며 뉴스를 검색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뉴스가 올라올 때가 됐을 건데..'

잠시 후 수빈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뉴스가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다.

- [단독] 영화배우 수빈, 최초의 주연 작품으로 블록버스트에 도전하다.

BJ Ent.에서 거액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제작할 계획인 블록버스트 영화에 수빈이 전격적으로 발탁되었다. 제목이 아직 미정인 이 영화는 현재 예산으로 잡혀있는 제작비만 350억으로 내년에 개봉될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될 걸로 예상되는 작품이다. 이러한 대작에 이례적으로 신인배우에 속하는 수빈을 주연배우로 선정한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작사인 BJ. Ent.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수빈이라는 신인 배우가 가진 잠재력과 가치를 눈여겨본.....

뉴스를 다 읽은 수빈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영화배우로서의 나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군."

그때 매니저가 집 앞에 도착했는지 핸드폰이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