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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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여성 중에서도 비교적 작은 키에 속하는, 명숙이라는 이름의 코디를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일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 코디는 기대감이 듬뿍 담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양손에는 기이한 형태의 옷을 들고 서있었다.
'이거 영화 속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등장할 때 입는 옷과 비슷한 거 같은데.. 망토? 가운?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수빈은 코디에게 말을 건넸다.
"보통 남자배우들은 턱시도에 보타이가 일반적이라면서요? 그럼 제가 지금 입고 있는 걸로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수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디가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채 열기 띤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보통 남자배우라면 그렇죠. 하지만 수빈씨는 보통의 남자배우가 아니잖아요. 이 정도는 걸쳐주셔야 수빈씨를 바라보는 모든 여성들의 로망을 충족시켜주죠."
"...로망?"
"네. 로망."
"어떤 로망?"
코디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자님! 수많은 여성들이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고 죽기 전까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동화 속의 왕자님."
수빈은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혹시.. 명숙씨도 절 보면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어머. 당연하죠. 저만 그럴까요? 수빈씨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는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저랑 똑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런 왕자님이 일반 평민처럼 그냥 평범하게 입으면 안 되죠. 한눈에 봐도 왕자님이란 걸 알 수 있게 차별되게 입으셔야죠."
어서 빨리 입어보라는 듯 옷을 든 양손을 앞으로 내미는 코디를 보며 수빈은 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일단.. 입어는 보죠."
수빈은 재촉하는 코디의 손에서 옷을 넘겨받아 두 손에 펼쳐들고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바깥쪽은 칠흑같이 깜깜한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들췄을 때 보이는 안쪽은 상처 입은 비둘기가 흘리는 피처럼 붉디붉은 선홍색이었다.
수빈은 조심스럽게 손으로 옷을 쓸어보았다.
검은색 외피 부분은 벨벳으로 되어 있는 듯 보드라운 솜털이 느껴졌고 붉은색 내피는 실크로 만들어진 듯 손끝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수빈은 옷을 입기 위해 양쪽 어깨 부분을 잡고 위로 들어보았다.
"어라? 이거 그냥 눈으로 볼 때 보다 길이가 많이 짧네요?"
수빈의 질문에 코디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채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170이 되니 안되니 싸우는 드워프들에게는 딱 맞겠지만 수빈씨처럼 키가 훤칠한 남자에게는 많이 짧은 길이죠."
'이 양반이.. 만나는 남자친구가 키가 작은 편인가. 왜 이런 말을 한 서린 목소리로 내뱉는 거야..'
수빈은 옷을 입어 보았다.
목부분은 프릴처럼 조밀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아래쪽 부분은 폭이 넓은 셔링 형태로 되어 있었다.
옷의 길이는 앞뒤가 달라서 등 쪽의 길이는 허리에 올 듯 말듯했고 가슴 쪽의 길이는 어깨를 간신히 덮을 정도였다.
목부분에는 갈고리 모양의 조그마한 호크가 달려있어서 양쪽을 채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수빈은 뒤돌아서 거울을 보며 호크를 채운 후 팔을 움직여 보았다.
'피풍의(避風衣)처럼 소매가 없으니 움직이기에는 편하네.'
그 순간 수빈은 거울 속에 비치는 두 여성이 폴짝폴짝 뛰면서 손바닥을 부딪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꺄악! 꺄악!
- 완전 왕자야. 왕자.
- 아드레이 가문의 당주 같아.
- 윌리엄 알버트! 꺄악!
'둘이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 후.'
"이건 뭐라고 부르는 옷입니까? 망토나 판초의 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수빈의 질문에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코디가 몸을 꼬면서 대답했다.
"그런 형태를 따로 특별히 부르는 이름은 없지만.. 굳이 부르자면 트렌치 케이프 숏 코트? 그 정도 될 거 같네요. 수빈씨. 하아. 너무 멋져요."
"맞아. 보면 볼수록 빨려 든다. 옷의 명칭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니. 어머어머. 명숙아. 우리가 이럴 때가 아냐. 빨리 사진 찍자. 사진."
사진을 찍네 동영상을 찍네 호들갑을 떠는 두 여성에게 살짝 질린 수빈은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죠?"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수빈은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는 밴에 올라탔다.
"어서 와라. 고생했다. 옷 입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네?"
"하아. 옷만 입은 게 아니라 연기까지 연습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연기? 영화제에 참석하는데 무슨 연기를 연습해?"
매니저의 말에 수빈은 조금 전 장면을 회상했다.
"그럼 이제 다 끝난거죠?"
"아니죠. 이제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연기를 연습해봐야죠."
"..각본대로 연기를 한다고요?"
"네. 김해수씨 코디랑 같이 간단하게 하나 짠 게 있어요. 잠시만요."
코디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한 장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1) 수빈씨가 먼저 차를 타고 레드 카펫 앞에 내린다. 풀장착을 한 수빈씨가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동안 차가 빠진다.
2) 그사이 해수씨를 태운 밴이 도착한다. 그럼 수빈씨가 걸어가 차 문을 열어 주고 해수씨가 수빈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린다.
3) 해수씨가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동안 수빈씨가 해수씨에게 귓속말로 묻는다.
4) 그럼 해수씨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 수빈씨가 케이프를 벗고 해수씨의 뒤로 돌아가서 케이프를 해수씨의 어깨에 걸쳐준 다음 앞쪽으로 손을 뻗어 호크를 잠가준다.
5) 해수씨가 수빈씨의 팔짱을 끼고 포토존까지 걸어간다. 그런 후 포토존에서 수빈씨가 다시 해수씨의 호크를 풀어준다.
6) 간단한 인터뷰와 포토 타임을 가진 뒤 다시 케이프를 수빈씨가 입혀준다.
7) 팔짱을 끼고 영화제가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끝.
코디가 읽어주는 내용을 다 들은 수빈은 잠시 멍한 얼굴로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까 해수씨가 입을 옷이 선홍색 오픈 숄더 원피스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걸 입혀주면 어깨랑 등이 다 가려져서 오히려 더 곤란할 거 같은데요. 그리고 앞에서 보면 붉은색 내피가 보여서 그나마 괜찮겠지만 뒤에서 보면 검은색이라 의상 자체가 굉장히 언밸런스 해 보일 거 같아요. 차라리 안 입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수빈의 말에 코디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콧바람을 뿡뿡 뿜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날씨가 쌀쌀해져서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벗어서 걸쳐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리고 포토존에서 사진 찍을 때는 어차피 다시 벗기 때문에 곤란할 거 없어요. 그리고 언밸런스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중요한 겁니까?"
"여자의 로망!"
"...또.. 로망입니까?"
"그럼요."
"후. 이번엔 어떤 로망입니까?"
"키 크고 잘생기고 멋진 내 남자친구가 옷을 벗어서 나에게 입혀주는 로망!"
"..여자분들은 그런 로망도 있습니까?"
그때 김팀장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럼요. 옷을 벗어주는 남자가 누가 보더라도 잘생기고 멋져야 한다는 게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그런 로망이 있죠.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의상의 언밸런스 따위는 전혀 네버 절대 중요하지가 않죠. 오히려 옷이 품이 커서 헐렁하고 길이가 길어서 이상하게 보이는 게 오히려 더 멋진 거죠. 명숙아. 그렇지?"
"맞아요. 수빈씨. 계획대로만 잘 풀리면 영화제에 참석한 다른 여자배우들이 질투로 눈이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수빈씨. 하악. 저를 대상으로 연기 연습을 한번 해보세요."
"네? 뭐라고요?"
잠시 후 마음을 비운 수빈은 명숙의 말에 따라 연기 연습을 시작했다.
"자아.. 수빈씨. 케이프를 벗어서 손에 들고.. 제 뒤에 서서.. 그렇죠. 이제 손을 뻗어서.. 꺄악! 나 어떡해. 어머어머. 손이.. 이제 호크를 잠그.. 하악. 수빈씨 손이 내 가슴에.. 꺄악. 언니. 나 어떡해.."
"뭘 어떡해. 이년아. 닥치고 나와. 이제 내가 할 차례니까.."
잠시 후 다시 케이프를 손에 들고 있는 수빈에게 김팀장이 말했다.
"수빈씨. 명숙이 저년은 키가 작아서 해수씨 역할로 적합하지 않아요. 제가 훨씬 키가 크니까.. 그러니까 저랑 같이 다시 한번 연습을 해보아요."
모든 걸 포기한 눈빛으로 수빈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으실 대로 하시죠."
"그렇죠.. 하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제 팔을 뻗어.. 어머머. 이제 호크를.. 하악..."
수빈은 회상을 중지하고 고개를 거칠게 저은 후 대답했다.
"형.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이따 부산에 도착하면 알려드리든지 할게요."
"그래? 그럼 지금 출발한다. 못해도 4시간은 걸릴 건데 잠이라도 좀 자라."
"가는 동안 자면 머리 세팅한 게 잘못될 거 같은데요."
"거기 목베개 있잖아. 그거 끼고 자면 괜찮아."
이윽고 시간이 흘러 영화제 참석 시간이 다가왔다.
YK에서 미리 잡아둔 부산의 모처에서 간단하게 머리랑 분장을 매만진 수빈은 복장을 살펴본 후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이제 가야 될 거 같은데요. 해수 누나 쪽이랑은 이야기가 끝났나요?"
"그래. 영화제 쪽으로 가면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데. 그 사람이 순서대로 차를 보내주니까 거기에 맞춰서 입장하면 된단다."
"그래요? 그럼 출발하죠."
잠시 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유명한 영화배우들이 속속 도착하여 레드 카펫 좌우로 서있는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레드 카펫을 밟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빈의 차례가 다가왔다.
수빈은 레드 카펫 앞에 정차한 밴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수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요 근래 치솟은 인기를 반영하듯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플래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꺄아악! 수빈씨! 수빈씨!
- 멋져요! 오빠. 여기 좀 봐줘요.
- 옷이 너무 멋지다. 왕자다. 왕자.
- 귀족처럼 고급스러워 보여요. 오빠!
- 오빠! 날 가져요! 제발요!
- 닥쳐! 수빈오빠. 쟤 말고 날 가져요!
수빈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사람들과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김해수를 태운 밴이 도착했다. 수빈은 가까이 다가가 밴의 문을 열었다.
김해수가 오픈 숄더 형태의 선홍색 원피스를 입고 차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수빈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김해수가 수빈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김해수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핏빛처럼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김해수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해 보였다.
- 언니! 옷이 너무 예뻐요.
- 언니! 언니! 사랑해요.
- 해수 언니 짱! 짱!
- 역시 김해수! 언니! 여기 좀!
사람들의 환호 속에 김해수가 손을 흔들 때 수빈이 예정된 수순대로 해수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그러자 김해수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였다.
수빈이 속삭이듯 말했다.
"누나. 이제 시작할까요?"
그 순간 속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김해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크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해. 늦었다."
수빈이 빠른 손놀림으로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나. 이쪽으로 돌아서야죠."
수빈이 양손에 케이프를 들고 속삭이자 김해수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야. 이쪽이 기자 쪽이잖아. 네가 내 뒤로 가야지."
수빈이 빠르게 김해수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해수의 어깨에 케이프를 걸친 다음 양손을 해수의 목을 감싸듯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호크를 잠그기 위해 쇄골에 살짝 팔을 걸쳤다.
김해수가 부끄러운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수빈이 부드럽게 팔을 움직여 호크를 잠갔다. 그 순간 사람들에게서 미친 듯한 비명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 꺄~아~악. 멋져요!
- 오빠. 꺄악! 나도 나도!
- 떨린다. 나한테도 해줬으면.
- 둘 다 사랑해요! 오빠! 언니!
- 하아. 남친이랑 정말 비교되네.
- 너무 섹시해요! 수빈 오빠!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숨넘어가는 비명 속에 김해수가 호크를 잠그고 옆에 서있는 수빈의 팔짱을 강하게 꼈다. 그리고선 도도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 후 김해수는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얼굴로, 줄리어스 시저를 손아귀에 넣은 클레오파트라처럼, 레드 카펫을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고 수빈도 조심스럽게 보조를 맞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가 마치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부산국제영화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한 뉴스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밤 주인공은 우리야 우리. 수빈 & 김해수. BIFF에서 가장 빛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