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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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이 뭐냐는 수빈의 물음에 박실장이 대답했다.
"수빈군. 먼저 이번에 촬영하는 영화와 관련해서 주의사항을 말해주겠네. 현재 [달빛 속의 호위무사] 최종 대본이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네. 그렇죠. 첨부터 끝까지 다 암기하고 있습니다."
"자네라면 충분히 그렇겠지. 하지만 대본이라는 게 말이야. 실제 현장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수정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네."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자네가 주의할게 있다네."
"어떤 걸 말입니까?"
"감독이 아마 자네보고 대본과 다르게 옷을 벗어라고 강요할 수도 있을 거야. 자네의 몸이 요즘 핫이슈 아닌가.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 어떡하든 자네의 옷을 벗기고 싶어 할걸세."
박실장의 말에 수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후. 제가 아름다운 여배우도 아닌데 말입니다.."
"차라리 자네가 여배우라면 이쪽에서 대응하기가 훨씬 편하지. 생각해보게.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작품을 위해 남자 배우 보고 상의 탈의를 요구하는 건 어디 가서 말할 거리도 못된다네. 남자라 계약 위반이니 성희롱이니 하면서 현장에서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힘들겠지."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옷고름을 부여잡고 아니 되옵니다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라도 해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네. 이미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손을 써뒀다네."
박실장의 말에 수빈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BJ 정미영 회장님이 이미 조치를 취하신 겁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나?"
"예로부터 있는 사람이 더 지독하고 가진 사람이 더 챙기는 법이니까요. 정회장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세인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길 원할 테고 그러려면 자신의 영화에서 제가 벗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을 내렸겠죠."
"하아. 자네를 보고 있으면 한 번씩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 나이에 이런 통찰력이라니.. 자네 말이 맞아. 정회장이 이미 그쪽 제작사나 투자자들에게 경고를 해두었다고 하더군. 영화판에서 감히 정회장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렇다면 굳이 제게 주의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요."
"내가 걱정하는 건 제작사나 투자자들이 아니라 감독이야. 장진석 감독은 전형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라네. 작가주의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영화에 관련된 공부는 계속해서 해왔으니까요. 한마디로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소설을 작가가 자신의 뜻대로 쓰듯이 영화는 감독이 원하는 대로 찍어야 한다. 그런 개념이 작가주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라네. 장감독이 영화를 찍다가 오버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현장에서 고집을 부릴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런 상황이 닥치면 그때는 어떡합니까?"
"분위기가 거절하기 힘들면 무리하게 버텨서 현장 스태프들에게 미움 사지 말고 그냥 벗게나. 단 그날 바로 나에게 전화를 주게나."
"흠. 박실장님에게 연락을 드리면 정회장님이 바로 뒤처리를 하겠다는 계획이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 정도로 하고.. 자네 바닥과 판의 차이를 아나?"
"저도 이 바닥에 있은지 몇 년 됐습니다. 가요계를 낮춰서 바닥이라 부르고 영화계를 높여서 영화판이라고 부른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고 있나?"
"뭐 별거 있겠습니까. 돈이겠죠. 자본주의의 핵심이자 근간 아닙니까. 투자되는 돈의 차이가 바닥과 판을 가르는 거겠죠."
"맞네. 가수가 음원 하나 내서 말아먹는 것과 제작사가 영화 한편 찍어서 말아먹는 것과는 투자금액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그래서 가수와 영화배우는 소속사에서 대응하는 방법 자체도 많이 다르다네. 그리고 영화판에는 가요계 바닥이랑 다른 불문율들이 몇 가지 있지.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걸세. 자네에게 내가 직접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싶어서라네. 이런 이야기는 책에도 나오지 않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거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
"흠. 잘 알겠습니다. 박실장님이 말씀하신 걸 유념해서 제가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처럼 똑똑한 친구라면 충분히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이것 받게."
박실장이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5만원권 10장 50만원이라네."
"저에게 용돈 주시는 겁니까?"
"헐. 이보게. 수빈군. 내가 미쳤나? 일 년에 나보다 열 배는 족히 넘게 버는 수빈군에게 내가 왜 용돈을 주나. 이건 고삿돈일세."
"고삿돈요?"
"그래. 오늘 고사 지낼 거 아닌가. 잘 나가는 아이돌이면 고삿돈을 넉넉하게 꼽아야지. 이번 영화에서 조연이라고 괜히 딴사람 눈치 보지 말고 팍팍 꼽게. 그래야 같이 일하는 스태프에게 잘 보일 거 아닌가."
"설마.. 고삿돈 꼽는 것까지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스태프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겠지만 주연배우 중 누가 더 많이 꼽았는지 뒤에서 일일이 다 비교하는 게 그 판이야. 그리고 조연이 주연보다 많이 꼽으면 조연 주제에 감히 주연을 무시한다고 욕먹는 게 그 판이고. 아까 내가 한 말들을 뭐로 들은 건가? 가요계랑 분위기나 환경 자체가 많이 다르다니까.."
"그럼 조연인 제가 너무 많이 꼽으면 오히려 곤란한 거 아닙니까?"
"이번 영화의 주연이 누군가? 무사 김동수 역을 맡은 게 성강호 아닌가. 자네랑 많이 친하잖아. 그럼 주연 눈치 볼 필요 없지. 그리고 자네보다 성강호가 더 많은 돈을 꼽을 걸세. 천만 배우가 그 정도 돈이 없을 거 같은가.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그때그때 상황을 잘 판단해서 행동해야 되네. 자네라면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네."
수빈은 자신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박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박실장의 방을 나온 수빈은 양수리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벤으로 향했다.
수빈은 주차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백성철을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이야. 형. 오늘따라 밴이 삐까번쩍 합니다."
"아이돌이 아니라 영화배우가 타고 다니는 밴 아닙니까. 당연히 번쩍번쩍거려야죠. 아침 일찍부터 광 좀 냈습니다."
"형. 갑자기 웬 존대를.."
"어제 박실장님한테 영화배우의 매니저가 지켜야 할 사항이나 규칙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계속 존댓말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는데요.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예전처럼 지내요. 안 그럼 제가 숨 막혀서 못 삽니다."
"그럴까..요?"
"좀!"
"그래. 알았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존댓말로 하마."
"뭐 꼭 그래야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죠. 이거.. 영화 찍는 첫날부터 많이 당황스럽네요. 아이돌이랑 영화배우랑 너무 차이가 큰데요."
"나도 이번에 많이 배웠다. 박실장님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영화배우는 일반 대중들에게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체면과 겉치레가 많이 중요하더라고. 아무래도 연예인들 중에서도 뽑히고 뽑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니 더 그런가 봐. 특히 영화의 흥행을 책임지는 주연배우들은 그게 훨씬 더 심하고.. 인기 없는 조연들이야 뭐 다른 연예인들이랑 별 차이가 없긴 하지."
"형. 전 아직 조연배우인데요."
"무슨 소리를! 넌 이미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으로 계약한 몸이잖아. 넌 어딜 가더라도 주연배우급으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흥분하여 눈을 치켜뜨며 소리를 지르는 매니저를 쳐다보며 수빈은 한숨을 쉬었다.
"후. 알았어요."
수빈의 말에 매니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면서 차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자자. 이제 그만 차에 오르시죠. 주연배우님."
수빈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네."
양수리로 가는 차 안에서 수빈이 매니저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보니 왜 연예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거 같네요."
"대접 자체가 차원이 다르지.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이 영화의 주연배우입니다라고 손꼽을 수 있는 배우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저예산 영화나 독립영화 같은 거 말고.. 극장 가서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 몇 십 년 동안 매번 본 사람이 다시 또 나오잖아. 그만큼 한 명의 주연배우로 성장하기가 힘들다는 거겠지. 그래서 더 대접받는 거고.."
"그리고 영화 주연배우에 기대하는 수익이라는 점에서 보면 액수 자체가 다른 연예인들과는 차원이 다르죠. [명량] 영화 한편이 벌어들인 돈이 1,300억 정도 되고 제작 감독인 김한민 감독이 번 돈이 120억이 넘는다고 하잖아요. 그 정도 금액을 아이돌이 음원 내고 행사 뛰어서 벌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수빈이는 잘할 거야. 누가 뭐래도 국내 최고의 영화 주연배우가 될 거라고 난 믿어."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뭐 저도 욕심이 나기는 하네요. 이왕 놀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 하겠죠.. 성철이형!"
"응. 왜?"
"끝까지 같이 잘해봐요."
"그래. 끝까지 같이 가보자. 내가 열심히 노력하마."
"그래요. 형."
"그리고.. 수빈아."
"네. 형."
"영화는 야외 촬영이 많잖아. 그래서 앞으로 영화 촬영하는 내내 이 밴이 대기실 역할을 하게 될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나에게 말해. 내가 다 구비해 놓을 테니까. 회사에서 법인카드를 받아왔다. 넌 특별한 일 없으면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벤 안에서 휴식을 취해. 제작진하고 스케줄 조율하는 거나 스탠바이 시간 같은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거 아무래도 형이 박실장님에게 교육을 단단히 받으신 모양인데요."
"그럼. 말도 마라. 내가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외울게 얼마나 많은지.. 아! 맞다. 그리고 또 하나. 코디가 필요한 날에는 가수 1팀이 아니라 배우 1팀에서 바로 지원 인력이 나올 거다. 당분간은 영화 제작진 쪽에서 코디를 도맡아서 해줄 거니까 필요 없긴 하지만.."
수빈은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운전을 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해요. 형이나 나나 영화판에 입성하는 게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 어깨에 힘들어가면 사고 납니다. 처음이면 멋모르고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죠."
"알았어. 후우."
"릴랙스. 릴랙스."
"그래.."
이윽고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양수리 촬영장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말했다.
"수빈아. 넌 차에 있어. 내가 가서 제작진에게 너 도착했다고 말하고 모이는 시간이 되면 와서 알려줄 테니까.. 넌 차에서 쉬고 있어라."
"네. 형. 그럼 전 대본이나 좀 보고 있을게요."
매니저가 차에서 내려서 뛰어가자 수빈은 차에 비치된 대본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저 형이 군기가 아주 제대로 들었는걸. 박실장님한테 어지간히도 들볶인 모양이야. 후. 나도 열심히 해야겠지."
수빈이 한참 동안 대본을 집중해서 보고 있을 때 차 문이 열렸다.
"수빈아. 10분 뒤 다 같이 모인 단다. 아무래도 네가 배우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니까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있는게 나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수빈은 차 밖으로 내려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양수리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이라 하늘이 푸르고 높은 게 참으로 좋구나.'
매니저가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가자 수빈도 따라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며 각오를 다졌다.
'나의 영화 인생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이야.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