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61화 (61/236)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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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살짝 당황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미 퇴근했으면 내일 만나면 되지. 굳이 왜 여기까지 직접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수빈은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보안실입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BBG의 수빈이라고 합니다."

보안실에 BJ에서 자신을 찾는 손님이 방문할 거라고 알린 후 수빈은 2층 회의실로 걸어갔다. 손님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수빈은 핸드폰으로 자신과 관련된 팬카페에 들어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글을 올리네. 얼마 전 드라마 촬영장에서 팬들에게 사인해준 것들도 사진으로 정리해서 올라와 있고.. 시간날 때마다 자주 들어와 봐야겠다.'

그렇게 처음으로 들어간 팬카페에서 글들을 탐독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빈씨? 저 김성희에요. 지금 YK에 도착했는데 어디에 계시죠?]

"아. 저 2층 회의실에 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오시면.."

[그러지 말고 주차장으로 내려오세요. 제가 아는 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저녁이나 하시면서 이야기하죠.]

"저랑 같이 하시면 사람들 시선 때문에 많이 불편하실 건데요. 저희 회사 구내식당이 3대 기획사 중 최고로 맛나다고 꼽힙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런 건 걱정 마시고 빨리 내려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뚜우.]

수빈은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잠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자기 멋대로군. 하는 짓이 아무래도 BJ 재벌 집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후. 힘없는 연예인이 까라면 까야지.'

수빈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선 회의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걸어간 수빈은 자신을 기다리는 차량을 발견하였다. 새까만 벨벳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색 차체에 보닛에는 짐승 한 마리가 뛰는 자세로 있었다.

'재규어인가.. 차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지 비싸 보이는데.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수빈은 문을 열고 운전석 옆자리에 착석하고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옅은 베이지색의 가을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김성희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어느 고풍스러운 건물의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들어간 재규어는 엘리베이터가 가까이 보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에서 식당까지 다이렉트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내리세요."

"알겠습니다."

수빈은 170 정도의 여성으로서는 적지 않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스틸레토 킬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김성희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5층 버튼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 각각 2명씩 유니폼을 차려입은 남녀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무리 봐도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식당 같은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여성 종업원이 말을 건넸다.

"고객님. 코트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김성희가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종업원에게 건넸다.

그 순간 수빈은 김성희의 옷차림에 깜짝 놀랐다.

팔 소매 부분과 허벅지 아랫부분이 씨스루로 되어 있어 팔다리가 훤히 비치고 옷에 달린 조그마한 비즈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끊임없이 반짝거리는 검은색 머메이드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퇴근하는 직장여성이 저런 화려한 옷을 평상시에 입고 다닌다고?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 아냐?'

자리에 앉아 적당히 식사와 음료를 주문한 후 수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직원들은 저를 보고도 특별히 아는 척을 하지 않네요."

"그 정도는 미리 교육이 되어 있죠. 유명인들이 편하게 식사를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곳인데 일하는 종업원들이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되죠."

"그렇군요."

수빈이 말을 마치고 물을 마시자 김성희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혹시 수빈씨가 저를 미친년으로 볼까 봐 좀 걱정되네요."

속을 들킨 거 같아 화들짝 놀란 수빈은 마음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네?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오후에 미국 할리우드 쪽에서 오신 손님들과 리셉션 겸 조그마한 파티가 있었어요. 제가 담당자 겸 통역으로 참석을 해서 조금 전까지 거기에 있다 바로 온 거라 복장이 이런 거니 오해는 말아 주세요."

"아. 그러시군요. 아주 아름다우신데요. 보기 좋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수빈씨가 이런 화려한 복장이 취향이신가 보군요? 앞으로 옷을 고를 때 참고할게요."

'도대체 뭘 참고하겠다는 거냐?'

수빈은 찜찜한 마음을 감추고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바뀐 수정 대본에 관해서 좀 여쭤볼게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먼저 할 건가요? 수빈씨가 지금 가장 궁금한 건 그게 아닐 건데요?"

평상시와 달리 대화를 하는 도중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자 수빈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세상의 여자와 관련된 책이라도 좀 사서 공부를 하던가 해야지.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좋습니다. 김성희씨께서 솔직한 걸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수빈씨나 저나 아직 젊으니까요. 두 사람이 앞으로 편한 친구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데.. 서로 솔직한 게 좋지 않겠어요?"

"편한 친구 사이라.. 그럼 호칭부터 정리하죠. 제가 어떻게 부르길 원합니까?"

"서로 편하게 말을 놓죠. 수빈아 성희야. 그게 좋을 거 같은데요."

"올해 나이가?"

"수빈씨랑 나이가 같아요. 작년에 대학 졸업하고 올해 직장 1년 차니까.."

"그럼 이제부터 말을 놓겠습니다. 그래. 성희야. 너 뭐 하는 여자냐?"

"뭐 하는 여자 같아 보여?"

"그날 회의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일반 회사원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정미영 회장님이랑 무슨 관계냐?"

"알아맞혀 봐. 너 천재잖아."

"하는 거 보고 정회장님 친손녀라도 되는 줄 알았지. 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으니까. 그런데 이씨면 몰라도 김씨면 거기에 해당이 안 되거든. 그럼.. 가까운 친척 정도?"

"맞아. 정미영 회장님이 외할머니야. 우리 엄마가 외할머니 둘째 딸이니까."

"그렇군. 어쩐지.."

"우리 아버지는 BJ랑 상관없는 모 백화점 사장님이시지.. 난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외할머니에게 부탁을 드려서 거기에 다니고 있는 거고. 더 궁금한 건?"

"이번 영화에서 현장 실무자를 맡게 된 것도 외할머니 뜻인거야?"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자원한 거야. 이런 대작이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하고 싶지 않겠어?"

"그렇구나."

"궁금한 게 더 있어? 없으면 이제 내가 질문해도 돼?"

"그래 물어봐."

"내가 지금 너에게 가장 궁금한 건 이거야. 혹시 너 불능이야?"

"불능? 뭐가?"

"고자냐고."

"...아닐 건데 아니 내 말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그럼 왜 그런 거지? 너도 잘 알겠지만 재벌가에서 연예인 하나 뒷조사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 넌 예전부터 아무 여자에게나 막 들이대는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오토바이 사고로 다치고 난 이후 여자랑 데이트를 하거나 같이 잔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들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혹시 그 사고로 불능이 된 게 아닌가 하고."

"난 건강해. 단지 철이 들었을 뿐이라고."

"흐음. 그래?"

못 믿겠다는 듯한 성희의 말에 수빈은 강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나는 문제없어. 그러니까 다른 질문."

"없어. 키 크고 잘생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천재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똑똑하다. 그리고 거기에도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며 현재 정기적으로 만나는 애인도 없는 상태다.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럼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래."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수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정된 대본에서 일단 큰 변화들만 먼저 물어보자. 왜 주인공 직업이 갑자기 바뀐 거지? 사기꾼에서 정부 에이전트로 바뀌는 건 너무 괴리가 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외할머니 뜻이야. 주인공 직업이 사기꾼이면 속편 제작이 힘들다고 보시는 것 같아.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속편을 찍으려면 주인공 직업이 누가 봐도 폼 나는 직업이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속편이라.. 무리하게 대본을 수정해서 그 결과로 이번 편이 망하게 되면 속편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을 건데."

"외할머니 말로는 절대 안 망할 거라고 하시던데."

"그런 걸 누가 알겠냐. 그럼 원래 대본에서는 주인공 유년시절이 나오는 게 있었는데 바뀐 대본에는 간단한 대사 몇 줄로 처리하고 넘어가던데.. 그 이유는?"

"집중.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오로지 수빈 너 한 명에게만 집중하길 원해. 그래서 쓸데없는 아역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게 외할머니의 뜻이야."

"너무 부담되는 거 같은데."

"수빈이 너라면.. 너의 매력이라면 충분하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던데."

"회장님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신 거 아닌가. 아무튼 그분 뜻이라면..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바뀌겠군."

"그렇지."

"마지막으로 원래 대본에 없던 일본이 해외 로케로 들어가 있던데.. 그것도 회장님 뜻인가?"

"아니. 그건 내가 넣었지. 네가 그날 칼싸움이 주특기라며? 그래서 칼싸움 장면을 위해서 일본 로케를 집어넣어 달라고 요청했지. 할머니도 내 이야기를 듣고 허락하셨고."

"그랬구나."

"더 물어볼 건?"

"큰 부분으로는 더 없어. 세세한 부분들은 아직 많이 있지만."

"그럼 내가 질문. 네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외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던데.. 영화 대본에서 네가 자유롭게 구사가 가능한 외국어는 대사를 영어에서 그 나라 원어로 다시 다 바꿔야 될 거 같은데. 어디까지 가능한 거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비정상회의] 제작하는 곳이 BJ 산하의 종편 방송이란 걸 몰랐어? 네가 그 프로 녹화한 그날 바로 알았지."

-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수빈은 김성희와 식사를 하며 대본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는 수빈에게 그녀가 말을 건넸다.

"수빈아. 외할머니가 너랑 나랑 잘 되기를 바라는 건 너도 이제 잘 알겠지만 내가 그걸로 너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어."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어차피 둘 다 아직 젊잖아. 친한 친구 사이로 충분하지 않겠어? 굳이 결혼이니 뭐니 그런 거에 서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봐."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

"내가 부담을 주지는 않겠지만 만약 네가 맘에 드는 여자가 생긴다면 바로 나에게 알려줄 것. 그래야 나도 상황에 맞춰 입장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

"OK. 그러도록 하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그럼 다음에 또 봐."

"그래. 운전 조심해."

수빈은 떠나가는 차를 지켜보며 저녁 내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화를 간신히 삭혔다.

'예나 지금이나 힘 있는 자들의 일방통행식의 사고방식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군. 이런 식으로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서 빨리 나도 힘을 키워야겠지. 지금은 참고 견딜 수밖에. 재벌이라..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수빈은 수원에 있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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