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60화 (60/236)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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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실장에게 1차 수정 대본을 건네받은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수빈은 영화 촬영에 대비한 액션 연기 수업 등 기본적인 스케줄만 소화하며 집에서 대본에 푹 빠져 지냈다.

이틀 만에 회사로 나온 수빈은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신인기획팀과 미팅을 가졌다. 뮤란의 데뷔와 관련하여 제반사항을 의논한 후 수빈은 연습실에서 연습 중이던 뮤란 멤버들을 제1 녹음실로 불러 모았다.

비좁은 제1 녹음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뮤란 멤버들을 둘러보며 수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다고 선생님들에게 전해 들었다. 오늘 너희들을 불러 모은 건 내가 이제 스케줄이 바빠져서 너희들을 개인적으로 지도해줄 시간이 없기 때문이야. 오늘 너희들의 데뷔곡을 들려주고 1차 가녹음을 할 거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알겠지?"

- 네. 오빠.

"너희들이 1차 가녹음을 한걸 가지고 내가 신인기획팀 선생님들과 의논을 하고 나면 선생님들께서 너희들의 부족한 부분을 데뷔 전까지 계속해서 연습을 시켜주실거다. 노래, 안무, 표정, 인터뷰 스킬 등등.. 선생님들이 이 정도면 데뷔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합격 판정을 내리기 전까지 너희들은 데뷔를 할 수 없어. 이건 나보다 연습생인 너희들이 더 잘 알 거고.."

수빈은 잠시 짬을 두고 뮤란 멤버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뒤 말했다.

"신인기획팀 선생님들에게 합격 판정을 받으면 그때 내가 너희들을 다시 만나서 최종 녹음을 할 거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 네. 오빠.

"자. 그럼 제일 먼저 일전에 내가 내준 숙제부터 검사를 하자."

잠시 후 뮤란 멤버들 전원의 숙제검사를 모두 마치고 수빈은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부분들도 있지만.. 내 생각을 너희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받아들이는 건 각자 다른 법이니까. 숙제를 다들 열심히 해왔으니까 넘어가고.. 이제 노래를 들려줄 건데 그전에 너희들 데뷔곡 제목이 뭐라고 생각하냐?"

수빈의 질문에 뮤란 멤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라퓨타!

"맞아. [라퓨타]다. 그럼 걸리버 여행기에서 라퓨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볼 수 없지?"

- 발이나 바닥.

- 주위 풍경.

- 땅.

- 자신의 몸.

- 주변 사람,

다양하게 대답하는 뮤란 멤버들을 보며 수빈은 싱긋 웃었다.

"이야. 다들 숙제를 내준 보람이 있는걸. 지금 너희들이 말한 게 다 해당된다. 그 모든 걸 통칭해서 일반적으로 [현실]이라고 부르지.. 라퓨타에 있는 사람들은 한쪽 눈은 자신의 몸 안쪽을, 다른 눈은 하늘만 쳐다보며 살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고 살고 있다. 일종의 이상향(理想鄕)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을 작가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이해가 되나?"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뮤란 멤버들을 보며 수빈은 말을 이었다.

"이러한 이상향을 사람들은 보통 유토피아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릉도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덴동산이 될 수도 있고 극락정토가 될 수도 있겠지. 인간들이 꿈꾸는 궁극적인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 곳.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삶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결코 현실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는 거다."

수빈은 뮤란 멤버들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들로부터 너희들 뮤란의 콘셉트가 뭔지 혹시 들은 게 있나?"

수빈의 질문에 뮤란 멤버 전원이 달달 외운 티가 물씬 풍기는 대답을 하였다.

- 힘겨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고난과 시련에 굴하지 않는 강인하고 현명한 현대 여성상

"호오. 다들 열심히 외운 거 같은데.."

수빈의 말에 지영이 대답했다.

"오빠. 이번 데뷔에 우리들 인생이 걸려 있어요. 이 정도 외우는 건 일도 아니죠. 저희들도 필사적이라고요."

"흠. 그래. 아주 좋은 자세다. 그럼 다시 곡으로 돌아가서.. 너희들은 현실에서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는 소녀들인 거야. 라퓨타로 가는 꿈을.. 여기서 라퓨타는 너희들의 목표나 소원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되겠지. 곡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럼 다 같이 곡을 한번 들어보자."

수빈이 콘솔 박스에 손을 올려 스위치를 조작하자 녹음실 안으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녹음실에 있는 뮤란 멤버들이 숨도 쉬지 않고 음악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 음악이 끝나자 수빈이 말했다.

"다들 처음으로 들어보니까 지금 하고 싶은 말이나 물어보고 싶은 게 엄청 많을 거야. 일단은 참고.. 곡을 이제 부위별로 잘라서 한번 들어보자. 맨 처음 전주 부분부터.."

수빈이 콘솔 박스를 만지자 음악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삐리리리~ 하는 청량하면서도 어딘지 신비스러운 느낌의 피리 소리 같은 것이 처음으로 흘러나오고 잠시 후 거기에 두구둥~ 두구둥~ 하는 드럼 소리가 얹혔다. 그런 뒤 휘이~ 휘이~ 하는 마치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중간중간 합세하며 섞여 들어갔다.

전주 부분이 끝나자 수빈이 음악을 멈춘 후 멤버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전주 맨 처음에 나오는 소리가 뭔지 아는 사람?"

수빈의 질문에 에리카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저 들어본 적 있어요. 악기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 어디서 들어봤지?"

"[타이타닉]요. 거기 주제가에서 나온 악기 소리에요. [my heart will go on] 그 노래에서 들어봤어요."

"맞아. 아이리시 휘슬이라는 악기다. 악기 소리가 아주 목가적이면서도 몽환적이지? 이번 곡에서는 이 소리가 이상향 즉 라퓨타를 의미하는 악기 소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중간중간 나오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뭔지 아는 사람 혹시 있나?"

수빈의 질문에 미영이 손을 들었다.

"저 알아요."

"미영이가 알고 있다고? 흠. 아무도 모를 거라 예상했는데. 혹시.. 너 고향이 어디냐?"

"제주도요."

"아. 그럼 알 수도 있겠구나. 저 소리가 무슨 소리지?"

"해녀들이요. 바닷속으로 잠수를 했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때요. 그때 숨 쉬는 소리에요."

"정답. 그럼 그걸 뭐라고 부르지?"

"기억이 안 나요. 따로 뭐라고 부르는 거 같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이 소리는 [숨비소리]라고 한다.. 해녀들이 자맥질하는 걸 해녀들 스스로 이렇게들 표현하지. [죽으러 들어가고 살아 나온다]라고. 그만큼 힘든 일을 해녀들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닷속으로 잠수해서 죽을 만큼 호흡을 참았다가 물 위로 다시 살아나왔을 때 내뱉는 호흡 소리가 숨비소리다. 얼핏 들으면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지? 그럼 미영이에게 물어보마. 해녀 그러니까 그 여성분들은 왜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고 위험한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할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맞아.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지? 삶을 이어나가고 자식들을 건사할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해녀들이 거친 바다를 온몸으로 맞서며 강인하게 살아가듯이 현실의 험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현대 여성을 상징하기 위해 넣은 소리야. 아이리시 휘슬이 이상을 나타낸다면 숨비소리는 현실을 드러내는 거다. 이상과 현실.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소리인 거야. 인트로가 어떤 콘셉트인지는 다들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

- 네!

"그럼 다음 파트를 들어보자. 여기는 지영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필요해."

.....

"이제 마지막 후렴 부분이야. 이 후렴 부분을 부를 때 제일 중요한 건.. 기세다. 뮤란이라는 그룹명이 뜻하듯이 마음을 강하게 먹고 마치 사자를 때려잡을듯한 기세로 불러야 되는 거야. 듣는 사람들이 너희가 하는 말에 마음을 열고 설득이 되도록 아니면 너희들이 하는 명령에 따를 수 있도록 말이야.. 중간 부분은 지영이가 메인 보컬이라면 여기는 소희가 메인이다. 상당히 하이 노트로 진행이 되거든. 다들 가사를 다시 한번 읽어봐."

수빈의 말에 뮤란 멤버들이 고개를 숙여 들고 있던 종이에 적혀있는 후렴 부분의 가사를 읽어 보았다.

"맨 먼저 그쳐가 나오지? 그쳐. 이제~라도 너의 눈에서 눈물을 그쳐. 이때 앞부분에 나오는 그쳐는 소희가 선창을 하는 부분이야. 고음으로 힘껏 내질러야 된다. 뒷부분은 소희의 고음과 멤버들의 중음이 화음을 이루며 같이 합창하는 거고.. 나머지 후렴들도 같은 방식으로 부르면 되는 거야. 그럼 한번 연습으로 다 같이 불러볼까?"

- 그쳐. 이제~라도 너의 눈에서 눈물을 그쳐.

- 닥쳐. 이제~그만 포기한다는 소리는 닥쳐.

- 미쳐. 이제~부터 네가 꿈꾸는 드림에 미쳐.

"좋아.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소희의 독창이다. 한번 불러봐."

- 소리쳐. 세상을 향해 소리 높여 소리쳐. 지금 나 여기 숨 쉬며 살고 있다고.

"OK. 소희가 이제 고음이 제법 안정적으로 잘 나오네. 그런 후 합창으로 한번 더 부르는 거야. 지금 나 여기 숨 쉬며 살고 있다고.. 다들 이해가 됐지?"

- 네. 오빠.

"그럼 이제 파트별로 음정을 정확히 맞춰가며 녹음을 시작할 건데.. 당연히 오늘 하루 만에 완벽하게 녹음을 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지금 녹음할 때 어는 정도는 틀을 잡아놔야만 해. 그래야 선생님들이 너희가 부족한 부분을 연습 시킬 수가 있겠지? 그러니까 다들 집중하고 녹음에 임해라. 알았지?"

녹음이 시작된 후 녹음실에서는 수빈의 화가 나서 소리치는 고성과 부드럽게 달래는 나지막한 소리가 계속 번갈아가며 흘러나왔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수빈은 마이크 스위치를 올린 후 말했다.

"다들 녹음하느라 고생했다. 부스 밖으로 나와라."

녹음이 끝났다는 수빈의 말에 뮤란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부스 밖으로 나왔다.

- 드디어 끝났다!

- 미쳤니? 최종 녹음이 남았잖아.

- 나 힘들어 죽을거 같아.

- 오빠 화내니까 정말 무섭다.

- 난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쓰러질 거 같아.

"조용! 오늘 녹음한 건 내가 선생님들에게 직접 전달해 줄 거다. 녹음할 때 오빠가 지적한 것들 잘 기억하고 있지? 최종 녹음 이전까지 다들 스스로 고민을 하면서 연습들 열심히 해라."

- 네. 오빠.

수빈은 녹음을 마치고 신인기획팀이 퇴근하기 전에 녹음 파일이 저장된 USB를 전달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신인기획팀에게 무사히 USB를 전달한 후 수빈은 박실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는지 박실장의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수빈은 노크를 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오. 수빈군. 어서 오게.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실장님이 주신 수정된 1차 대본 말입니다. 제 나름대로 검토가 끝났습니다."

"벌써? 내가 건네준지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네. 이틀 동안 좀 열심히 봤습니다."

"역시 천재야. 그런데 왜?"

"네?"

"수정된 대본의 검토가 끝났다면서?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말하냐고."

"그럼 그걸 누구에게 말을 합니까?"

"내가 그때 말했지 않은가. BJ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굳이 나에게 보고할 필요 없네. 난 수빈군의 계약이나 촬영 일정, 언론 플레이 같은 것만 담당할걸세. 대본이나 연기 같은 건 이제 나랑 의논할 필요 없어. 내가 뭐라고 자네에게 그런 걸 감히 코치하나.."

"..그 말씀은?"

"거기 파일에 BJ 담당자 연락처가 없던가? 분명히 같이 들어가 있었을 텐데?"

"들어 있었습니다."

"그럼 거기로 수빈군이 직접 연락해서 이야기를 해보게. 나랑은 이제 상관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수빈이 방을 나가자마자 박실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저 박실장입니다."

[....]

"그럼요.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잘 처리했습니다."

[....]

"염려 놓으시죠. 젊은이들끼리 자주 만나다 보면 정분도 생기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편 그 시각 방 밖으로 나온 수빈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김성희씨 핸드폰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저 수빈이라고.. 수정 대본과 관련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지금 막 퇴근을 해버렸는데 어떡하지.. 그러면 수빈씨.]

"네.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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