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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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맨] 출연자들이 사용하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왕코 지석준과 뺀질이 양세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쪽 소파에는 메뚜기 유재식과 자신보다 더 큰 키의 기린 이강수, 초통령 하호, 근육질 몸을 자랑하는 김정국 등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여성 출연진들은 다른 대기실을 사용하는 듯 보이지 않았다.
수빈은 심호흡을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BBG의 리더 수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촬영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빈을 알아본 유재식이 제일 먼저 소파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요즘 한창 하태핫태한 수빈씨 아냐. 어서 와요. 만나서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유재식의 손을 두 손으로 정중히 잡으며 수빈은 말했다.
"선배님. 제가 아직 많이 어립니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선배님의 팬입니다."
"그래? 그럼 너도 선배 말고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불러라."
"알겠습니다. 형님."
잠시 후 수빈은 출연진들과 인사를 마치고 정철모 제작 피디와 출연진들과 함께 하는 긴급 제작회의에 참석을 하였다.
"수빈씨가 요즘 핫한 거 다들 아시죠? 수빈씨가 오늘 오후밖에 시간이 안 나서 급하게 촬영을 하는 관계로 지금 미리 준비된 대본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개략적으로 촬영 콘셉트를 잡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출연진 여러분들이 임기응변으로 하셔야 될 거 같아요."
정피디의 말에 유재식이 대답했다.
"어치피 오늘은 밖으로 못 나가고 스튜디오에서 찍어야 되니까 팀전으로 가죠. 지금 수빈이가 몸짱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많으니까 일단 정국이랑 다른 편에 넣어서 몸짱 대 몸짱 대결을 하는 코너를 하나 넣으면 그림이 좀 될 거 같은데요."
유재식의 의견에 김정국이 말을 보탰다.
"그럼 나랑 재식이 형이 각팀의 팀장하고 형이 수빈이를 그쪽 팀원으로 데리고 가면 되겠네. 여자 출연진들은 팀별로 한 명씩 드가고 나머지는 적당히 나눠서 들어가는 걸로.."
"그럼 되겠다. 팀원 뽑는 가위바위보 할 때 내가 이기면 제일 먼저 수빈이를 지목하고 정국이 네가 이기면 딴 사람을 뽑아."
"형. 그러지 말고 그냥 맨 처음에 내가 주먹 낼 테니까 형이 보자기를 내. 그래서 수빈이를 먼저 뽑아가. 내가 이겼는데 수빈이 말고 딴 팀원을 뽑으면 시청자들이 짰다고 생각할 거 아냐."
"야. 그건 짠 거 아니냐. 알았다. 그건 그렇게 하고.. 수빈이가 어렵게 나왔는데 홍보는 하고 가야 될 거 아니냐. 수빈아."
자신을 부르는 유재식의 말에 수빈은 얼른 대답을 하였다.
"네. 형님."
"너 지금 홍보 해야 할 게 뭐냐?"
"지금.. 드라마 말고는 특별히 없습니다. 형님."
"[특별수사본부] 말하는 거지?"
"네. 형님."
"정피디님. 우리가 자주 하던 코너 있잖아요. 지인 퀴즈 찬스 쓰는 거. 그걸로 홍보 한번 하죠. 수빈이가 특수본 출연하는 배우한테 전화를 걸어서 퀴즈를 풀게 하면 되겠네요. 그때 적당히 선전하는 걸로 하면 될 거 같은데.."
"특수본이면.. 성강호나 김해수씨 한테 전화를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시청자들도 좋아하는 배우고 예능에 잘 안 나오시는 분들이라 관심도 높을 거고. 그런데 그분들이 수빈씨한테는 워낙 대선배들이라.. 수빈씨. 그분들 전화번호 알아요? 혹시 통화 가능해요?"
정피디의 질문에 수빈이 얼른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통화 가능합니다."
그 순간 가만히 앉아 있던 왕코 지석준이 말했다.
"둘 다 되면 성강호 말고 김해수 갑시다. 김해수.. 여배우랑 전화 통화를 해야 시청률이 오르지."
"그럼 수빈씨가 김해수씨랑 먼저 하고 만약 통화가 안 되면 성강호씨랑 하는 걸로.. 둘 다 안되면 홍보는 꽝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또 좋은 아이디어 있습니까?"
피디의 질문에 이강수가 의견을 냈다.
"정국이 형이랑 나랑 평상시에 앙숙 관계니까 내가 재식이 형 팀에 들어가서 정국이 형 몸을 계속해서 놀리는 걸로 하죠. 수빈이 몸이랑 비교를 하면서 수빈이의 몸은 보기 좋고 예쁜데 정국이 형 몸은 보기 흉하다, 무식하게 약 먹고 근육만 키웠다고 놀리면 정국이 형이 참다가 화내는 걸로 콘셉트를 잡죠."
이강수의 말에 듣고 있던 김정국이 발끈했다.
"야! 나 약 안 먹어! 죽을래?"
"지금 그런 식으로 하시면 되겠네요. 아주 좋습니다. 또 다른 의견?"
잠시 후 정피디가 여러 의견들을 정리를 하여 말하였다.
"그럼 맨 먼저 유재식씨가 수빈씨 소개를 하고 간단한 소개와 장기자랑을 합니다. 그다음 지인 찬스 퀴즈를 하고요. 그런 후에 개인전으로 각자 자신이 자신 있는 종목을 적어내고 그걸 뽑아서 1:1로 붙는 코너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때 정국씨랑 수빈씨가 붙는 걸로 연출을 하고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진 팀에서 남자 한 명을 뽑아서 상의를 탈의하고 물벼락을 맞는 벌칙을 수행하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피디의 말에 유재식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요? 이건 대놓고 어떡하든 수빈이 옷을 벗겨서 시청자분들에게 몸을 보여주겠다는 건데.. 수빈이가 불편할 수도 있잖아. 수빈이 넌 어떠냐? 괜찮겠어? 불편하면 말해라."
유재식의 질문에 수빈이 빙긋 웃었다.
'역시 소문대로 게스트를 많이 배려해주시는구나..'
"뭐 남잔데 상의 탈의하는 정도야 상관없죠. 그리고.. 우리 팀이 이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본격적인 [질주맨] 촬영이 시작되었다.
유재석의 소개에 맞춰 수빈이 등장하자 촬영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쏟아졌다. 간단한 소개와 장기자랑 코너가 끝나자 첫 번째 지인 찬스 퀴즈가 시작되었다.
"수빈씨. 수빈씨가 천재라는 건 우리도 잘 알지만 수빈씨가 문제를 푸는 게 아니에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설명한 후 그 지인이 푸는 겁니다. 스피드 퀴즈가 아니니까 천천히 설명을 하셔도 됩니다. 단, 설명이 끝나면 5초 이내로 대답을 해야 됩니다."
유재식의 친절한 설명에 수빈이 대답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지인 중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겠습니까?"
"제가 요즘 타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하나 찍고 있는데 그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분에게 전화를 걸겠습니다."
"수빈씨. 그냥 KBC [특별수사본부]라고 말해도 돼요."
"어.. SBC에서 KBC 드라마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
"상관 없어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내가 시말서 쓸 것도 아니고.. 깨져도 담당 피디가 깨지겠죠. 자. 그럼 어느 배우분에게 전화를 걸 건가요?"
유재식의 농섞인 말이 끝나자 그 순간 출연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외쳤다.
- 김해수! 김해수! 김해수!
그 소리를 들으며 수빈은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이야. 역시 오래된 예능 프로라 그런지 출연자들 호흡이 딱딱 들어맞네. 연습 한번 안 했는데..'
"김해수 선배님께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수빈은 긴장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신호가 간지 제법 됐지만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안 받는 거 같은데.
- 꽝이다. 꽝.
- 딴 사람한테 해야겠다.
- 김해수 목소리 좀 들어보나 했는데.
"아. 김해수씨가 전화를 안 받는군요. 역시 대배우이다 보니 많이 바쁘신 거 같습니다. 그럼 실패로 하고 다른 분에게 전화를.."
유재식이 실패를 선언하려는 순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빈이니?]
- 우와. 김해수다. 김해수.
- 드디어 받았다.
- 목소리가 예술인데.
- 쉬.. 다들 조용히 해봐.
수빈은 김해수가 전화를 받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 선배님. 저 수빈입니다."
그러자 앙칼진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야! 수빈이 너. 내 손에 맞아 죽어볼래?]
그 순간 촬영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수빈의 귀에 유재식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방송사고 아냐? 이거 편집각인데.."
수빈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말했다.
"선배님. 제가.."
김해수가 수빈의 말을 자르고 다시 앙칼진 목소리로 한자 한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누! 나!]
"....해수 누나."
수빈이 호칭을 바꾸자 봄날같이 따사롭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호. 그래, 수빈아~. 어쩐 일로 전화했니? 누나가 샤워하느라 전화를 빨리 못 받았어. 미~안~해.]
옆에서 긴장한 채로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출연진들이 깜짝 놀라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 누나? 나이가 두 배는 넘을 거 같은데.
- 둘이 많이 친한가 본데?
- 설마.. 둘이 사귀는 사인가?
-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말고.
- 근데.. 김해수가 원래 저런 성격인가?
- 조용히들 좀 해봐. 뭐라 하나 들어보게.
저녁 5시부터 시작된 [질주맨] 촬영이 자정이 되어 끝났다. 수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매니저가 있는 차에 올라탔다.
"수빈아. 고생했다. 많이 힘들었지?"
"어휴. 예능이라는 게 장난 아니네요.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른데요. 몸이 그렇게 힘든 건 아닌데.. 정신이 다 너덜너덜 해진 기분이에요."
"그쪽도 살벌하지. 다들 자기 밥그릇이 달려있는데.. 당연하지."
"그래도 재식 형님이 잘 챙겨주셔서 무사히 잘 끝낸 거 같아요."
"그래. 그런데 아까 퀴즈 한다고 김해수랑 전화통화할때 보니까 김해수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같이 가자고 그러는 거 같던데?"
"아. 네. 아까 통화할 때 누나가 같이 가자고 하길래.. 제가 갈지 안 갈지 아직 잘 모르지만 만약에 가게 된다면 누나랑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영화제에 갈수 있는지는 사무실에다 물어봐야죠."
수빈의 대답에 백성철은 긴 숨을 내쉰 후 말했다.
"잘했다. 박실장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널 엎고 다닐 거다. 김해수 클래스 면 다른 사람들도 시비를 못 걸 거야. 방송에서 공언(公言)을 한 거니까 핑계도 충분하고.."
"응? 박실장님 한테 무슨 일 있나요?"
"아냐. 넌 신경 쓸 거 없어. 이미 다 끝난 문제니까. 아주 잘했다."
"네.. 그럼 내일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다음 주부터 영화 촬영 들어가니까 이번 주에 몰아서 다 찍으면 좋을 거 같은데.."
"내일은 오후 2시에 [비정상회의] 촬영을 가면 된다. jtbs에서 [한끼줘요]랑 [비정사회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길래 [비정상회의]를 골랐어. 그게 녹화 시간도 짧고 아무래도 편할 거 같아서.."
"네. 그게 아무래도 편하겠네요. 그럼 내일은 그걸로 끝인가요?"
"아니. 그거 촬영 끝나고 내일 밤중에 통영으로 차 몰고 내려가야 된다. [도회지 어부]도 나가기로 이야기가 끝났어. 모레 새벽 5시까지 통영항에 도착해야 돼."
"제가 바다낚시가 첨이라는 거는 그쪽에서 알고 있나요?"
"내가 그쪽에다 이야기했어. 현장에서 간단하게 배우고 정 안되면 옆 사람이 도와주면 된다고 하더라. 어차피 편집하면 되니까 상관없데.."
"그래요? 그럼 잘 됐네요. 낚시가 잘 안돼서 쓸만한 화면이 없으면 제가 회라도 한번 뜨죠. 칼질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백성철은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시작했다.
"수빈아. 그럼 내일 12시쯤 데리러 갈까? 메이크업 받고 가면 2시쯤 상암동 jtbs 사옥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뇨. 아침 10시쯤 데리러 오시면 좋을 거 같은데요. 어디 좀 가봐야 할거 같아서요."
"아침부터 어디를 가게?"
"낙원 상가에 좀 가보려고요."
"낙원 상가? 악기 때문에?"
"네. 아무래도 현대식 악기가 좀 필요할 거 같아서요."
수빈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불 꺼진 캄캄한 주차장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연주할 줄 아는 악기들은 다 옛날 악기들뿐이야. 미래를 위해서는 이 세상에 적합한 현대 악기들을 제대로 공부하고 배워야 할 거야..'
잠시 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가로등 불빛으로 환한 거리로 진입하자 수빈은 눈을 꼭 감고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