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55화 (55/236)

# 55

19 - 1

수빈은 녹음실 안으로 한 손에 페이퍼백을 들고서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하이유를 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연락도 없이 여기는 어쩐 일로?

"수빈씨. 안녕하세요. 새로운 영화에 주연으로 확정되었다면서요? 축하드려요."

하이유의 말에 수빈은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이 바닥이 소문이 빠르다고 하지만.. 조금 전 막 결정된 일을 선배가 벌써 알고 있다고? 이게 말이 되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정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셔서 그때 통화하면서 들었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근데 정미영 회장님이랑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

"어머. 그럼요. 저도 나름 탑급인 연예인인데요. 그분이 제가 데뷔할 때부터 어린애가 소녀 가장이라고.. 집에 빚 갚느라 고생한다고 얼마나 아껴주셨는데요."

"그렇군요.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건지?"

수빈의 거듭되는 마치 추궁을 하는듯한 질문에 하이유가 기분이 상했는지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왜요? 제가 찾아오면 안 되나요?"

"설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단지.. 요즘 선배님이 행사나 공연 때문에 잠 잘 시간도 모자라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정신없이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신가 해서요."

"흐음. 그래요? 일단 넘어가죠. 회장님이 수빈씨가 출연하는 영화의 OST 중 한 곡을 제가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요. [달과 나의 이야기]를 보니까 둘 사이의 케미가 좋은 것 같다고 그러면서.. 그리고 12월 NAMA 시상식 때 저보고 오프닝 무대를 맡으라고 하셔서 수빈씨랑 의논하러 온 거예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걸 왜 저랑 의논을?"

"수빈씨가 출연할 영화이고 수빈씨가 프로듀싱 한 곡인데 그럼 누구랑 의논을 하나요? 너무 걱정 마세요. 당장 작업을 시작하자는 게 아니니까.. 요즘 수빈씨가 바쁘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일단 이런 일들을 해야 된다고 미리 알려드리고 축하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잠깐 들른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OST는 제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수빈씨에게 들려드릴 테니 그때 평가를 좀 해주세요. 그리고 NAMA 무대는 어떻게 연출할 건지 시간 날 때 한 번씩 구상을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리고 이거 샌드위치 싸온 건데.. 작업하면서 귀찮다고 밥 굶지 말고 잘 챙겨드세요."

하이유가 가고 난 뒤 혼자 남은 수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마 날 좋아하나? 연상인데.. 에잉. 나도 모르겠다. 달나이 때문에 고마워서 챙겨준 거겠지.."

수빈은 잡념을 지우고 다시 곡 작업에 몰두했다.

저녁에 백성철 매니저에게 전화가 와서 잠시 통화한 걸 제외하고 오로지 곡 작업에만 매달렸다.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날밤을 샌 수빈은 새벽에 잠깐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풀고 아침 10시까지 녹음실에 처박혀 곡 작업에 매진했다.

"후우.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완성이 된 거 같은데.. 나중에 세부적으로 조금만 손질하면 되겠다. 배가 고파서 더 못하겠네. 애들 숙제 검사도 해야 할 시간이고.."

녹음실을 나선 수빈은 얼굴이라도 좀 씻기 위해 세면장으로 걸어갔다. 출근시간이 훌쩍 지나 복도를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걸어가는 도중 수빈의 예민한 감각에 이상함이 감지되었다.

'뭐지? 이 느낌은? 날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어제랑 다른데.. 내가 블록버스트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됐다는 소문이 이미 퍼진 건가? 그래서 어제랑 다른 시선으로 나를 보는 걸까?'

의구심을 가진 채 세면을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한 뒤 수빈은 지하 2층으로 내려가 뮤란의 연습 상태를 점검한 후 숙제검사를 실시했다.

잠시 후 수빈은 연습실 중앙에 뮤란과 함께 둘러앉아서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하다. 다들 열심히 숙제를 해왔네. 멤버 교체는 안 해도 되겠는걸."

수빈의 말에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던 뮤란 멤버들이 활짝 웃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 숙제 끝!

- 아. 오늘은 푹 자겠다.

- 드디어 해방이다.

- 이제 밥이 좀 넘어가겠네.

- 끝까지 같이 가는 거야.

"다들 조용. 내가 너희들에게 [걸리버 여행기]를 읽게 한건 몇 가지 목적이 있어서야. 일단 먼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소설들은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서 쓰고 있지. 왜 인간은 불행한가?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과연 어떡해야 하는 걸까? 이런 문제를 고민한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글로써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거다. [걸리버 여행기]도 마찬가지야. 소설의 내용 중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거인국, 소인국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인간의 불행은 어디서 오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겠는 사람?"

뮤란의 멤버들 중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수빈이 다시 말했다.

"그건 바로 비교(比較)다! 거인국과 소인국을 통해서 작가는 비교라는 개념 없이는 어떠한 것도 크거나 또는 작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너희들이 아이돌로 데뷔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비교 당할 거다. 너희 멤버들 중에 누가 더 예쁜지, 누구 몸매가 더 잘빠졌는지, 누가 춤을 제일 잘 추는지, 누가 노래를 잘하는지..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다른 걸그룹과도 계속해서 비교 당하겠지."

수빈은 잠시 말을 끊고 멤버들 전원과 일일이 눈을 맞춘 다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 거기에 매몰(埋沒)되지 말아라. 내가 다른 멤버들과 비교해서 어떤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걸그룹들과 비교해서 어떤지.. 그런 식으로 비교를 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거야. 너희들은 너희들 존재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거다. 아이돌로 데뷔해서 인기를 얻게 된다면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벌수 있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수 있는 만큼.. 자칫하면 인생이 망가질 가능성도 높아. 나중에 너희들 중에 행여나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때 반드시 지금 내가 한말을 기억해라. 그게 너희들을 망가지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을 거다. 알겠냐?"

- 네. 오빠.

- 잘 알겠어요. 비교하지 마라..

- 고마워요. 오빠.

- 명심할게요. 오빠.

"너희들의 아이돌 선배로서 그리고 PD로서 꼭 해주고 싶은 충고였지만.. 아무래도 재미없고 지루했겠지. 그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두 번째 목적. 너희들의 데뷔곡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걸리버 여행기]를 읽다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단어가 나올 거다. 혹시 뭔지 아는 사람?"

수빈의 질문에 에리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라퓨타(Laputa)요."

"호오. 에리카는 라퓨타라는 걸 어디서 들어봤냐?"

"집에서 책을 보는데 엄마가 말해줬어요."

"그래? 하기야 나온 지 30년이 넘었으니까 너희 어머니는 아실게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 봐서 다들 알겠지만 끊임없이 공상에 잠긴 인간들이 살고 있는 날아다니는 섬 이야기가 나오지? 눈이 하나는 안쪽으로,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 그 섬의 이름이 라퓨타라고 나와있다. 자. 여기서 숙제!"

- 또? 또 숙제야.

- 하아. 연습보다 숙제가 더 힘들어.

- 숙제 싫어요. 오빠.

- 다른 책을 또 읽어야 되나요?

"조용히 해라.. 이번 숙제는 쉽고 재밌으니까 걱정 말고. 너희들은 지금 [걸리버 여행기]라는 고전 작품을 통해 라퓨타라는 게 뭔지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럼 현대 작품 속에서 또 다른 라퓨타를 알아볼 차례야. [천공의 성 라퓨타]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까 찾아보면 금방 나올 거야. 그걸 하루에 한 번씩 해서 3번을 보고 오는 거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미로, 두 번째는 이걸 만든 감독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여자 주인공에 빙의되어서 보고 오는 거다. 이건 보고 난 뒤에 감상문을 쓸 필요도 없어. 다들 이번 숙제는 하기 쉽지?"

- 네!

"그럼 3~4일 정도 뒤에 완성된 너희들의 데뷔곡을 들려주마. 이번 데뷔곡의 콘셉트는 전적으로 너희들이 만든 거고 너희들에게서 나온 거니까.. 아마 곡을 이해하기 쉬울 거야. 그럼 며칠 뒤에 다시 보도록 하고.. 혹시 질문 있는 사람?"

그때 지영이 손을 들었다.

"내가 한 말 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요즘 저 같은 젊은애들은 말을 많이 줄여서 사용하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집에서 엄마랑 뮤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사자를 때려잡는 소녀들]을 줄이니까 [사때소]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듣기에 별로 재미가 없어서 엄마랑 같이 말을 바꿔봤는데요."

"어떻게?"

"사자 말고 영어로 바꿔서 라이언을 쓰면 어떨까 해서요. [라이언을 때려잡는 소녀들]을 줄이면 [라때소녀]가 되잖아요. 라때가 라떼처럼 들리니까 훨씬 귀에도 쏙쏙 잘 들어오고 잘하면 커피 CF도 노려볼 수 있겠다고 엄마가 말씀하셔서.."

"흠. 좋은데? 난 맘에 든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는 싫어하셨어요."

"응? 아빠가 왜 그걸 싫어하셔?"

"아빠 고향이 대구라서.. 라이언을 때려잡는다고 하니까 짜증을 내시더라고요. 아빠가 프로야구 광팬이시거든요."

"아하.. 그런 문제가 있군. 뭐 상관없을 거 같긴 한데. 꼭 그런 뜻은 아니잖아? 그리고 대구 말고 다른 팀들은 다들 좋아하겠지. 잘하면 대구랑 붙는 다른 팀에서 너희들한테 시구 좀 해달라고 요청이 많이 들어올 수도 있겠는걸.. 뭐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조정미 선생님한테 여쭤도 보고.. 또 다른 질문?"

소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저기.. 집에서 부모님이 오빠 사인 좀 받아오라고 그러시는데.."

"그래? 해드리면 되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지금 해줄까? 사인받을 종이랑 펜은 있냐?"

"있어요! 아빠 엄마 두 분 다 그냥 종이 말고 수빈 오빠가 나온 사진에 꼭 받아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잠시만요."

소희를 필두로 다른 멤버들도 다 같이 사인을 받으려는지 한쪽 벽에 일렬로 놓여 있는 자신의 가방을 향해서 맹렬히 뛰어갔다.

잠시 후 수빈은 사인을 해달라고 소희가 가방에서 꺼내온 사진 속에서 물에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올리고 있는 한 남자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상체는 완전히 탈의한 상태로 하체에는 짧은 반바지만을 착용한 채 온몸의 근육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진 속의 자신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인을 마치고 연습실을 나온 수빈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어쩐지 하루 사이에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했더니.. 그게 영화 출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뉴스에 나온 내 몸을 보고 그런 거였군.'

수빈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성철이형. 나 수빈이. 혹시 뉴스 봤어요?"

[그래. 어제저녁에 뉴스 나왔잖아. 너한테 말해주려고 전화를 했었는데.. 네가 곡 만든다고 정신이 없는 거 같아서 이야기를 안 했지. 저녁도 녹음실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때울 거라고 하길래.. 너한테 나쁜 뉴스도 아니고 해서 내일 작업 끝나고 나면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이제야 작업이 끝난 거야?]

"아. 그래서.. 그랬구나. 네. 끝났어요."

[그래? 잘 됐다. 지금 나랑 유실장이랑 걸려오는 전화받느라고 난리도 아냐.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방송국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 전화가 오고 있어. 너 좀 나올 수 있냐고.. 심지어 뷰티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나와달래.]

"뷰티요? 그거면.. 화장하고 성형 수술 같은 거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잖아요? 거기서 날 왜 섭외를?"

[어떡하면 그런 몸을 유지하면서도 얼굴이 탱탱하고 하얗냐고.. 피부관리 비결이나 몸매 관리 비결을 물어본다는데.. 특별히 먹는 식단이나 운동방법 같은 노하우를 중심으로 방송을 하겠다고..]

"후우. 그런 거 없어요."

[그래. 그런 쪽은 일단 다 거절했으니까 걱정 말고. 지금 유실장님 말로는 네가 방송국마다 대표 프로그램을 하나씩 골라서 우선적으로 나가는  좋을  같다고 그러시는데.. 무작정 다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

"당연히 나가야죠. 어제의 저랑 입장이 또 다르잖아요. 명색이 블록버스트 영화의 주연배우인데 제 지명도가 높아져야 티켓 파워도 오를 거고 그래야 영화 흥행에도 도움이 될 거니까.. 이제부터는 저도 적극적으로 방송에 임할 생각이에요.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이야. 수빈이가 그렇게 생각해주면 우리가 고맙지. 혹시 너 아무 데도 안 나간다고 고집부릴까 봐 유실장이랑 나랑 엄청 고민했었는데..]

"형도 참. 제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걱정은 앞으로 안 하셔도 됩니다. 유실장님이랑 둘이서 의논하면서 따로 생각해 놓은 프로그램이라도 있나요?"

[생각을 해놨다기 보다 시간상 오늘 저녁이라도 바로 촬영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두 개가 있는데..]

"뭔가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인 [질주맨]이랑 종편 예능 프로그램인 [도회지 어부]라고 있어. 그거 두 개는 오늘 저녁에라도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럼 어떤 거부터 가는 게 나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