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54화 (54/236)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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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던 수빈은 당황하지 않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빈의 눈에 자그마한 키에 환갑은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들어왔다. 온몸에 부티가 흐르고 오랜 세월 사람들을 손짓 하나로 부려온 듯 관록과 기세가 몹시 강렬했다.

'드디어 최종 보스가 등장한 거 같은데.. 마치 암호랑이를 보는 거 같군.'

첫인상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수빈은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저녁식사에 초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가요? 천재인 수빈군을 놀라게 했다니.. 작전이 성공한 거 같네요."

그때 옆에 있던 박실장이 여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정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5년 만에 보는 건가요? 박실장. 박실장도 그새 많이 늙었네요."

"저도 이제 낼모레가 환갑입니다. 가는 세월을 누가 막겠습니까.."

"그러게요. 근데.. 지금은 우리 아들이 회장이지 난 부회장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제 마음속에서는 영원한 회장님이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빈이 박실장에게 물었다.

"박실장님이 잘 아시는 분입니까?"

"음? 수빈군은 이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나? 연예인이라는 사람이 정미영 회장님 얼굴을 몰라?"

"제가 머리가 나빠서.. 누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빈의 대답을 들은 여인이 크게 웃었다.

"호호. 천재인 수빈군이 머리가 나쁘다고 하니 정말 재밌네요."

잠시 후 세 사람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눴다.

"그래서 거실에 제 그림을 걸어 놓으신 겁니까?"

수빈의 물음에 정회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방송계에서 천재로 소문난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죠. 그래서 내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전시를 할까 해서 사람을 시켜서 사 왔는데.. 막상 사고 나서 직접 보니 너무 맘에 들어서 거실에다 걸어 놓고 매일매일 감상하는 중이에요."

"그렇군요. 제가 그린 그림이 맘에 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가격도 후하게 2천만원이나 주셔서 덕분에 성금도 많이 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천이 아니라 2억을 줘도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그림을 보면서 알아챘죠. 아. 이 그림을 그린 수빈군은 정말로 천재구나. 사람들이 방송이나 기사에서 장삿속으로 천재 천재 그러면서 띄워주고 있는 게 아니라 진정한 천재로구나."

그 순간 박실장이 끼어들며 물었다.

"그래서 수빈군에게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을 제시한 겁니까? 저도 어제저녁에야 겨우 눈치챘습니다. 수빈군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수갑이 운다] 투자배급사가 BJ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설마요. 그림 하나 보고 그렇게 했을 리가 있겠어요? 어떤 사람이고 어떤 배우인지를 다방면으로 조사를 했죠. 특히 최근에 수빈군과 작업을 해본 적이 있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수빈군을 평가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도 봤고요."

정회장의 대답에 수빈이 다시 물었다.

"그분들이 저를 어떻게 평가하던가요? 많이 궁금한데요."

"당연히.. 비밀이죠."

시간이 흘러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정회장이 입을 열었다.

"박실장 그리고 수빈군. 수빈군은 잘 모르겠지만 박실장은 잘 아실 거예요. 내가 BJ 엔터테인먼트를 세우고 사업을 하면서 음악적으로는 NAMA(엔넷 아시아 뮤직 어워즈)를 만들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슈퍼스타 B도 성공적으로 출범시키고.. 한류 음악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영화에요."

박실장이 말을 받았다.

"회장님의 영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스필버그가 세운 드림웍스와의 합작을 이끌어 내고 BGV를 세워서 국내 영화 관객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신 분 아닙니까. 회장님이 없었다면 [설국기차] 같은 영화는 애초에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고마워요. 박실장. 그런데.. 최근에 내가 손댄 영화가 성적이 저조한 건 잘 아시죠?"

"음.. [나의 길]과 [군함섬]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좀 성적이 안 나오긴 했죠."

"특히 [나의 길]은 완전히 망했죠.. 요즘 사람들이 정미영의 감각이 한물갔다는 소리를 많이 하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솔직히 나도 인정해요. 나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겠죠."

"말도 안 됩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다닙니까? 회장님은 아직 한창때이십니다."

"아뇨. 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한계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조만간 은퇴할 거예요. 모든 걸 아들에게 넘기고 전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에요."

그때 수빈이 물었다.

"건강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얼굴을 보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몸이 많이 안 좋아요. 뭐하나 하려고 해도 이젠 체력이 버티지를 못해요."

"흠. 제가 자격증은 없지만 나름 한의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어디가 안 좋으신지 진맥을 한번 해볼 수 있을까요?"

"수빈군이 한의학에 조예가 깊다는 건 조사해서 알지만 이건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에요. 음. 뭐 그렇다고 진맥 한번 받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정회장이 손을 내밀자 수빈은 맥을 집은 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내공을 이용하여 정회장의 몸을 살펴보던 수빈은 깜짝 놀랐다.

'으음. 이건.. 삼음절맥(三陰絶脈)이군. 이 세상에도 이런 절맥이 존재하는구나.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어차피 다 똑같은 사람들이니.. 예전 세상처럼 기가 풍부한 영약들이 있으면 몰라도 지금 세상에선 나라도 치료가 불가능한데. 대주천이 완성된 이후라면 또 몰라도..'

수빈은 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후. 정회장님의 병은 체질적으로 타고난 병입니다. 음. 현대 의학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DNA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병입니다. 아마 보행장애가 있고 근력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실 겁니다."

"맞아요. 샤르코 마리 투스병(Charcot-Marie-Tooth Disease) 이에요. 일종의 유전병이죠. 내 나이 20대 한창 꽃다운 나이에 발병했고 여태까지는 잘 버텨왔는데..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버티기가 너무 힘드네요. 그런데.. 정말 놀랍네요. 그걸 진맥만으로 알아내다니. 혹시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 정회장님이 누군지 오늘 알았습니다만.."

"그럼 혹시 치료 가능성은 있나요?"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수빈의 답변에 순간적으로 정회장의 눈에 불이 켜진듯 번쩍거렸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은.. 가까운 미래에 치료가 될 수도 있다?"

"..확답 드릴 수가 없습니다."

"흐음. 그래요? 뭐 이 나이에 병 치료에 목을 매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가능해지면 알려줘요. 자식들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은퇴전에 마지막으로 어쩌면 유작(遺作)이 될 수도 있는 멋진 영화 한편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어요. 평생을 영화계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내 마지막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했다는 건 너무 슬프니까.."

"호사유피(虎死留皮) 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유종지미(有終之美) 일수도 있고.. 그래서 수빈군을 조사하고 난 뒤 결심했죠. 내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불세출의 천재인 수빈군이 내 마지막 영화의 주연배우다! 그래서 이번 블록버스트 주인공으로 수빈군이 낙점이 된 거죠."

"제가 많이 과분합니다만 아무쪼록 회장님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죠. 수빈군의 꿈은 뭔가요?"

정회장의 질문에 수빈은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까 회장님께서 본인의 젊었을 때 꿈을 말씀하셨죠. [적어도 아시아 만이라도 한국 문화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라고.. 저도 꿈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생겼죠. 회장님 표현을 빌리자면 적어도 이 세상만이라도 나만의 문화 식민지로 만들자는 게 제 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빈은 잠시 짬을 둔 뒤 이어 말했다.

"그리고 회장님이 회사 경영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다면.. 저는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경영도 하는 동시에 일선에서 배우나 가수로 직접 뛰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좀 많이 거창하죠?"

"적어도 이 세상만이라.. 만약에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곳도 만들고 싶다는 뜻인가요? 멋있네요. 젊은이의 꿈이 그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죠. 이루어질수 있도록 응원할게요."

정회장은 박실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노친네들하고 계속 있어봐야 지루하기만 할 테니까 수빈군은 이제 그만 보내주고.. 박실장은 남아서 나랑 제작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좀 더 나누죠."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게 하시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박실장을 뒤에 놔두고 수빈은 올 때처럼 최고급 세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날 2시경 수빈은 박실장과 함께 영화 출연계약과 관련하여 회의를 하기 위해 BJ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찾아갔다. 안내받은 회의실에서 두 사람은 실무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전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네. 어차피 정미영 부회장이 직접 추진하는 일이야. 이 영화에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건드리거나 간섭할 수 없어. 지금 BJ 회장으로 앉아 있는 아들도 감히 못 건드려. 그랬다간 자기 엄마한테 맞아 죽지.. 그 양반 성격이 얼마나 무서운데. 어제 자네가 본건 그나마 나이가 들어서 많이 순해진 모습을 본 거야."

"그렇군요."

5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회의실로 무려 여섯 명의 실무자가 들어왔다. 각자가 맡은 분야에 따라 개런티 및 예산, 배우 및 제작진 섭외, 국내외 촬영 장소 섭외, 제작 일정, 배급 및 개봉관 숫자 등을 의논했다.

박실장이 예상했던 대로 물 흐르듯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수빈은 따가운 시선을 계속 느꼈다.

6명의 실무진 중 5명이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서 열심히 떠드는 동안 제일 막내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아무 말없이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여자지? 분위기가 아무래도 그냥 평범한 일반 사원은 아닌 거 같은데..'

회의가 거의 끝날 때쯤 그 여성이 입을 열었다.

"수빈씨. 제가 이번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행할 실무자입니다. 아마 촬영 현장에서 자주 만나 뵙게 될 거 같네요. 외국 로케 때에도 통역 겸 실무처리를 위해서 동행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수빈씨. 마지막으로 혹시 저희 쪽에서 파악하지 못한 수빈씨의 특기나 장기 등이 있나요?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있으면 저희 쪽에서 참고하겠습니다."

여성의 질문에 수빈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답변했다.

"제가 내세울 만한 장기로는.. 검을 잘 씁니다."

"검을 잘 쓰신다고요? [킬빌]에 나오는 그런 칼싸움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성의 말에 수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갈세가 비전의 대천성검법(大天星劍法)이 한낱 칼싸움으로 전락하는구나.'

"대충 뭐..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러시군요. 칼싸움이라면 역시 일본인데.. 알겠습니다. 영화 제작에 꼭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수빈씨랑 저랑 나이가 비슷한데.. 다음에 보면 서로 친하게 지내요."

"네. 다음에 만나면 그러도록 하죠."

수빈은 왠지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을 간직한 채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수빈은 곡 작업을 위해 제1 녹음실로 직행했다.

'빨리빨리 곡 작업을 해놔야지. 다음 주면 [달빛 속의 호위무사] 영화 촬영이 시작되니까 그때부터는 작업할 시간이 별로 없어..'

수빈은 바쁜 마음을 추스르며 작업을 하기 위해 녹음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순간 마치 수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녹음실 밖에서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바빠죽겠는데..'

"네. 들어오세요."

수빈은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고선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나에게 볼일이 없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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