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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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빠지에 도착해서 절 기다리고 있던 강호형이랑 만난 후에 강호형이 감독님께 데려가서 인사를 시켜 주시더라고요. 정세철 영화감독이라고.."
수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실장이 툭 던졌다.
"영화가 형사물이지?"
"네. 맞습니다. 혹시 박실장님은 제가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모르지. 자네가 그날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것도 지금 처음 듣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찍고 있는 영화가 어디 한두 편이라야 말이지. 난 수빈군처럼 천재가 아니야. 하지만.. 정세철의 주특기가 형사물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지. 감독마다 잘 찍는 영화 분야가 따로 있으니까. 가수들도 발라드, 트로트, 락. 힙합 등 자신이 잘하는 분야가 따로 있지 않은가. 정세철이 감독이라면 거의 100% 형사물이지. 영화 제목이 뭐던가?"
"[수갑이 운다]입니다."
박실장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어. 그래. 난데.. 정세철이가 영화감독이고 제목이 [수갑이 운다]라는 영화가 있을 거야. 그 영화 제작 관련해서 정보 좀 간략하게 보내줘봐. 어. 그래.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은 박실장이 말했다.
"계속 이야기해보게."
"네. 그런 후에 대본을 받았죠. 영화 내용이 [베테랑]이랑 비슷하던데요. 범죄를 저지른 재벌 3세를 쫓는 거는 똑같은데 이 영화에서는 재벌 3세가 범죄를 저지른 후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잠적을 했다는 게 조금 다르더군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그놈의 뒤를 봐주고 수사를 방해해서 잡기가 힘들다는 설정의 영화였습니다. 뭐 결국에는 잡히지만요."
수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강호형 역할이 범인의 뒤를 쫓는 형사인데, 형사가 평상시 범인과 친하게 지내던 다른 재벌 3세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탐문수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그 범인의 친구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럼 수빈군은 재벌 3세 역할을 연기한 거구먼?"
"네. 그렇죠."
"할만하던가? 수빈군이 그렇게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자라난 게 아니라서 많이 어색했을 텐데.."
박실장의 말에 수빈은 예전 생각이 떠올라 속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남자 하인이 4백에 시녀 숫자만 해도 2백이 넘는 세가에서 곱게 자랐습니다만..'
"할만하던데요. 정세철 감독님이 칭찬하셨어요. 연기가 아~주 자연스럽다고.."
"그래? 이거 놀랍군. 정세철 그 친구가 누굴 쉽게 칭찬하는 성격이 아닌데.."
"감독님 성격이 좀 무뚝뚝한 편이긴 하더라고요."
"어떤 연기였는지 자세히 설명 좀 해보게. BJ 측에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적극적인지 아직까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아. 자네가 재벌 3세 연기 좀 잘했다고 300억짜리 블록버스터 주연으로 낙점한다? 그건 말이 안 되지.. 분명히 그날 또 다른 특별한 일이 있었을 거야."
"네. 제가 촬영한 장소가 가평 빠지였는데 거기가 수상 스포츠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제가 거기에 웨이크보드라는 걸 타러 갔었는데 그때 형사가 탐문수사를 하려고 저를 찾아왔다는 설정이었.."
그 순간 박실장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음? 웨이크보드라고? 자네 그거 타본 적 있나?"
"아뇨. 한 번도 타본 적 없습니다."
'등평도수(登萍渡水)로 물 위를 뛰어다니면서 수적(水賊)들 목을 자른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그럼 그날 처음으로 타본 건가?"
"네. 처음이었죠. 사실.. 빠지라는 게 바지선에서 따와서 빠지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뭔가 이상한데? 자네가 한 번도 웨이크보드를 타본 적이 없다는 걸 성강호가 몰랐나? 그런 역할이면 당연히 미리 자네에게 물어봤을 거 아닌가."
"그게.. 아마 절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 형이 드라마 촬영 때 저한테 삐진 게 있어서요. 뭐 제가 제대로 못 타면 보드를 타는 장면만 대역을 쓰면 된다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죠."
"흠. 그랬군. 그래서 대역을 썼나?"
"아뇨. 제가 다 했습니다. 5분 정도 강습 받고 리허설 겸해서 연습 한번 하고 슛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이 한방에 OK 하셨습니다."
"응? 웨이크보드가 그렇게 타기 쉬운 건가? 영화에 들어갈 장면이면 어설프게 타는 정도로는 OK가 안 떨어질 건데.."
"제가 워낙 운동신경이 뛰어나서요."
'소주천을 완성한 내가고수가 그 정도도 못하면 길 가다 칼 맞아 죽기 딱 좋습니다.'
"대단하군.. 흠. 정리를 해보면 자네가 재벌 3세 역할을 연기하고 웨이크보드를 탔다. 그게 전부라는 건데.."
"네. 그렇습니다."
"혹시 [스팅. 그 아름다움에 관한 보고서]에 수상스키나 웨이크보드를 타는 장면이 있나? 자네가 대본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알 거 아닌가."
수빈의 잠시 머릿속에서 영화 대본을 살펴보았다.
"없습니다. 외국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대사를 치는 신은 몇 번 나옵니다만 수상 스포츠를 즐기거나 수상 추격전 같은 장면은 전혀 없습니다."
"하아..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없다면 도대체 BJ에서 왜 이러는 건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군."
"저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아직 영화판 속성을 제대로 파악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당연한 거지. 카메오로 몇 번 출연한 게 다인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아무리 천재라도 그건 무리지.."
두 사람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박실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박실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자 수빈은 자신이 원한다면 예민한 귀를 이용하여 통화 내용을 얼마든지 훔쳐 들을 수도 있었지만 예의를 지키기 위해 꾹 참고 기다렸다.
잠시 후 박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끝내자 수빈이 물었다.
"어디서 온 전화입니까? 분위기로 봐서는 아까 영화 관련해서 통화했던 곳은 아닌 거 같은데요."
"BJ 측에서 왔네."
"뭐라고 하던가요?"
"이틀 뒤에 회의를 하고 싶다고 하는군."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실장님 얼굴이 많이 안 좋은데요."
"회의 이전에.. 내일 저녁에 자네랑 나랑 같이 만나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는군."
"누구를 말입니까?"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단지 자네가 찍을 영화와 관련해서 최대 투자자인 사람이라고만 하던데.. 그쪽에서 회의 전에 같이 저녁이나 한번 하자고 하는데 갈수 있냐고 물어보더군."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히 갈수 있다고 대답했지. 지금 우리가 가니 안 가니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오라고 하면 가야지."
"그게 그렇게 안 좋은 겁니까? 투자자랑 저녁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저녁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 우리 쪽에서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 이런 식이라면 모레 있을 회의에서도 질질 끌려만 다니다 끝날 거야. 당연히 계약 조건들도 우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될 거고.. 상황 파악을 해야 적절하게 밀당을 할 건데 말이야."
"흠. 문제가 심각하군요."
"후우.. 수빈군. 자네가 그날 촬영할 때 말이야. 당연히 주위에 스태프들도 많았겠지?"
"네. 제가 보기에는 80명 정도 되는 걸로 보였습니다."
"혹시 리허설을 하거나 본 촬영에 들어갔을 때 옆에 있던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내거나 웅성웅성 거리던 장면이 있었나? 가령 이런 대사를 쳤을 때 현장 반응이 정말 좋았다거나 아니면 촬영이 끝난 뒤에 다른 사람들이 그 장면은 연기가 정말 좋더라라고 칭찬을 해줬다든지..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나?"
"제가 대사를 할 때 그런 특별한 반응은 없었습니다만.."
"다만? 다만 뭐?"
"그게.."
수빈이 주저주저하며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박실장이 재촉했다.
"뭔지 모르지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일단 이야기를 해보게.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 상황이라는 거 잘 알잖나. 촬영하면서 무슨 특별한 일이 발생한 건가? 웨이크보드를 타면서 멋진 묘기라도 부렸나?"
박실장의 재촉에 수빈이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랑은 별 관계가 없을 거 같긴 한데.. 제가 보드를 타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는데요."
"옷을? 그랬는데?"
"아무래도 영화다 보니 밑에는 쫙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에 위에는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로 탔거든요."
"음? 그게 왜? 보통 날씨가 더우면 일반인들도 그러고 타지 않나?"
수빈은 체념을 한 듯 솔직하게 그때의 상황을 털어놨다.
"후. 제가 그날 탈의실에서 상의를 벗고 밑에 반바지만 입고 나왔을 때.. 그때 스태프 쪽에서 박수랑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특히 여성 스태프들 반응이 더 격렬했죠.."
수빈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잠깐 생각을 하던 박실장은 뭔가를 깨달은 듯 급히 되물었다.
"설마.. 자네 몸짱인가?"
"뭐 아무래도 권법 수련을 오래 하다 보니까.. 나름 봐줄 만은 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몸 좋은 남자 배우가 발에 채는 게 영화판인데.. 어지간한 몸 가지고는 그쪽 사람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이 자네 몸을 보고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는 거 아닌가?"
박실장은 수빈을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옷을 벗고 나에게도 한번 보여 줄 수 있겠나?"
"네? 여기..에서요?"
"남자끼리 뭐 어떤가? 걱정 말게. 난 스트레이트야. 애가 셋이라고.."
잠시 후 박실장은 수빈의 벗은 몸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박실장이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군. 보고 나니 이해가 돼.."
다음날 저녁 수빈은 박실장과 함께 최고급 세단의 뒷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만날 영화 투자자가 많이 부자인가 봐요. 이런 기사 딸린 고급차까지 보내주면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다니.."
"개봉 전까지는 흥행 여부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게 영화야. 블록버스터 영화의 최대 투자자 정도면 당연히 부자겠지.."
"그런데.. 실장님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어제 자네의 벗은 몸을 봤으니까. 거짓말 안 하고 아무리 시나리오가 개판이고 자네가 영화 내내 발연기를 한다고 해도.. 자네가 영화 속에서 계속 옷만 벗고 다닌다면 백만 이상은 무조건 찍을 걸세."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수빈의 반박에 박실장은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며 대답했다.
"말이 된다네. 내가 어제 자네 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때 정말로 좋아했던 영화배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네. 내가 한때 그 배우를 미친 듯이 좋아했었지.."
"누구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소.룡.(李小龍)!"
수빈이 이소룡이 어떤 사람인지 머릿속을 더듬고 있을 때 박실장이 다시 말했다.
"내 눈에는 그 사람보다 자네 몸이 더 멋있게 보였어. 왜 그런지 아나? 이소룡은 키가 작았거든. 173인가 그 정도밖에 안됐을 거야. 그런데 자네는 186이지 않나.. 자네 몸은 남자에게 있어서 꿈과도 같은 몸이야."
수빈이 박실장의 말에 반박을 하려고 할 때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수빈과 박실장이 차에서 내리자 궁궐과도 같이 으리으리한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운동장같이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선 후 수빈과 박실장은 집사로 보이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사방이 샹들리에 불빛으로 반짝거리며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거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수빈은 자신들을 초대한 집주인이 오기전까지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그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맘에 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