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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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기가 감도는 수빈의 질책 어린 말에 뮤란 멤버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어제저녁에 내 말을 직접 전달했다고 하던데.. 너희들 중에서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뮤란의 리더인 지영이가 주뼛거리며 앞으로 반걸음 나서서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멤버들 전원 어제저녁에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래? 나한테 불만 있어서 반항하는 거야? 내가 너희들 데뷔시키려고 직접 프로듀싱하는게 맘에 안 들어? 난 빠지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맡길까?"
서릿발 같은 수빈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더없이 냉랭해지는 그 순간 이트레이너가 나섰다.
"수빈씨. 아니 왜 애먼 애들을 잡고 그래요? 생기발랄하고 보기만 좋은데 왜 화를 내고 그래? 이해가 안 된다.."
"아니. 이선생님. 생각을 해보세요.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하죠. 지금 여기가 수영장도 아니고.. 애들 복장이 말이 안 되잖습니까? 멤버들 전원 옷을 다시 갈아입고 오라고 해야 될 거 같습니다."
"애들 복장이 어때서요? 아래 위로 제대로 다 갖춰 입었는데 뭐 문제 될게 있나요?"
뭐가 문제냐는 이트레이너의 말에 수빈은 다시 한번 뮤란 멤버들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여섯 명 전원이 단체로 유니폼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허벅지가 다 드러나 보이는 하의 실종 반바지에 배꼽이 훤히 드러난 소매 없는 탱크톱을 세트로 입고 서있었다.
온통 살색으로 가득한 그 모습을 본 수빈은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선생님. 행여나 성추행이니 변태니 그딴 소리 들을까 봐 어제 제가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이건 누가 봐도 데뷔라는 핑계로 회사가 애들에게 하기 싫은 걸 억지로 강요하는 모양새 아닙니까.. 그냥 쳐다보는 것도 민망한 판국에 저보고 신체검사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수빈의 말에 이트레이너와 박트레이너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후 박트레이너가 궁금하다는 듯이 수빈이에게 물었다.
"수빈씨. 혹시 여자랑 제대로 연애해본 적 한 번도 없어? 보기 보다 숙맥 같은데.."
박트레이너의 질문에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빌어먹을. 남의 아픈 곳을 찌르다니. 내가 전생에 몸만 건강했어도 죽기 전까지 삼처사첩을.. 후우. 다 부질없는 헛소리긴 하지.'
"...그런 질문은 회사 내 성희롱에 해당하는 거 아닙니까?"
"수빈씨. 되게 웃긴다. 들리던 소문하고 완전히 다른데? 무대에서는 저것보다 더 심하게 입고 춤까지 추잖아? 지금 너무 오버한다. 쑥스러워 그러는 거지?"
"아니 그건 무대니까 그런 거죠. 지금은 그런 상황이.."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이트레이너가 뮤란 멤버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 네. 선생님.
"너희들 그렇게 입고 명동거리 돌아다닐 수 있니?"
- 당연하죠. 선생님.
-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요.
- 전 여름에는 자주 이러고 놀러 나가요.
- 맞아요. 여름엔 시원한 게 최고예요.
- 명동 한복판에서 춤도 출수 있어요.
"들었죠? 요즘 젊은 여자애들이 저 정도로 입고 다니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빈씨. 의외로 옛날 사람 스타일인가 봐?"
'하아. 내가 600년 전 사람이라 옛날 사람이기는 하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그 순간 부끄러움이 많은 에리카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수빈 오빠. 저희들이 이런 복장으로 온건 절대 회사에서 강요한 게 아니에요. 멤버들이 각자 어떤 재능이 있는지 그리고 어디가 안 좋은지 오빠가 직접 검사를 해준다고 해서 이왕이면 좀 더 정확하게 받기 위해서 다들 자발적으로 입은 거라고요."
에리카의 발언에 힘을 얻었는지 지영이가 보탰다.
"맞아요. 오빠. 우리 엄마는 어제저녁에 오빠가 진단할 때 아예 비키니를 입고 가라고 챙겨주겠다는 걸 겨우 뜯어말렸는걸요."
수빈은 오늘 이 자리에 비키니를 입고 올뻔했다는 지영이의 말에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가 겨우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걱정도 안되냐? 내가 진단한다는 핑계로 너희들 몸을 여기저기 만지고 쓰다듬고 그러면 기분 나쁘지 않아?"
수빈의 말에 에리카가 반박을 하고 나섰다.
"오빠. 여자는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지,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지 본능적으로 다 알아요. 저희들이 나이가 어려도 이미 그 정도는 다 알아챌 나이가 됐다고요. 오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저희들을 챙겨주는지는 겪어봐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요. 부모님들도 저희들이 하도 자주 오빠 이야기를 해서 이미 다들 알고 계시고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차분하고 꼼꼼하게 저희들의 몸을 진단해주세요."
"...너 진짜 에리카 맞냐? 언제부터 이런 캐릭터로 바뀐 거야?"
잠시 후 여자 8명의 융단폭격과도 같은 합공에 결국 녹다운이 된 수빈은 항복을 선언하고 지금 복장 그대로 진단을 하기로 했다.
'이 세상 여자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다 전투력이 높은 거야. 도저히 버틸 수가 없네. 후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겠지. 누구부터 할까.. 그래. 마이클 조던. 너로 정했다.'
"에리카.. 너부터 이리 와서 앉아봐라."
수빈은 양쪽 발을 빈 의자에 올린 채 앉아 있는 에리카의 옆으로 이동하여 에리카의 양쪽 발목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잡은 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일전에 발목을 치료할 때는 소주천을 이루기 전이라서 긴가민가했었지만 지금이라면 내공을 이용해서 확실히 알아볼 수 있지.'
수빈은 십여 분가량을 엄숙한 얼굴로 정신을 집중한 채 발목뿐만 아니라 에리카의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 등 다리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후우. 그때 내가 얼핏 느낀 게 맞군. 신법(身法) 공부를 주특기로 하는 쾌영문(快影門)이나 공공문(空空門)에서 최고의 재능으로 친다는 경허지체(輕虛之體)인 게 확실해. 이 정도 재능이면 아무런 내공 없이도 공중 체공시간이 장난아니겠는걸.'
수빈은 에리카의 다리에서 손을 때고 눈을 떴다.
"에리카. 혹시 예전에 농구해본 적 있니?"
"아뇨. 여자가 농구를 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하긴.. 넌 키가 작아서 농구선수로 대성하기에는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좀 무리겠다."
"제가 가진 재능이 농구선수의 재능인가요?"
"꼭 그런 건 아냐. 네가 가진 재능은 아주 특별한 거야. 에리카. 잘 들어. 지금 이 순간부터 이번 뮤란의 데뷔곡에서 메인 댄서는 바로 너다. 조금 이따 너에게 딱 맞는 훈련법을 알려줄 테니 데뷔 전까지 죽기 살기로 그것만 연습해. 네가 얼마나 충실하게 연습했느냐에 따라서 내가 안무 구성을 바꿔야 하니까.. 알았지?"
"네. 알겠어요."
"그럼 이제 지영이 나와봐라."
지영이 의자에 앉자 수빈은 지영의 목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상처 입은 카나리아가 제대로 다시 아름답게 울수 있으려나..'
"지영아.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제쳐봐."
"네. 오빠."
수빈은 지영의 목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성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잠시 후 수빈은 방패연골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양쪽 손을 이용하여 부드럽게 감싸고선 다시 눈을 감았다.
'흠. 이 정도로는 파악하기가 힘드네. 아무래도 성대 쪽에 내공을 집어넣어서 제대로 살펴봐야겠는걸.'
"지영아. 지금부터는 조금 아플 수도 있다.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아봐."
"녜~에"
수빈은 성대막 양쪽으로 직접 내공을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악. 아악. 악.."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참아."
'어디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거지.. 음? 이건가?'
"지영아! 아~하고 소리를 내봐."
"아~아~아~"
"OK. 됐다."
수빈이 목에서 손을 때자마자 지영이 급히 물었다.
"오빠. 설마 제 성대에 이상이 있는건가요?"
"그래. 조금 문제가 있네."
옆에서 듣고 있던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가 반문했다.
"설마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보컬 연습시킬 때도 아무 이상 없었고 한 번씩 이비인후과에 가서 정기검사를 받는데.. 지영이가 성대결절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아뇨. 이건 성대결절이 아니라 성대용종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물혹 같은 거죠. 그리고 위치가 안 좋아서 내시경으로 발견하기가 힘들어요. 성대막 뒤쪽인데다 안쪽에 있는 가성대 쪽으로 치우쳐서 자리한 거라 일반적인 검사로는 알 수가 없어요. 게다가 여태껏 별다른 통증도 못 느꼈을 거니까 더욱 발견하기가 힘들었겠죠."
옆에서 듣고 있던 지영이 끼어들었다.
"여태껏 아무런 통증도 없었고 노래 부르는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어요."
"그렇겠지. 이 정도 가지고 그런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니까. 네가 가수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 같으면 아예 치료 자체가 필요 없는 수준이야."
"오빠는 그럼 제 성대에 이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에요?"
"지영이는 목소리가 맑고 깨끗한 편이잖아. 그런데 자주 듣다 보면 한 번씩 평상시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깨끗하게 들리는 날이 있어. 그것도 나 정도로 귀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차이점을 발견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그래서 그런 날은 오늘은 지영이가 컨디션이 아주 좋네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지."
수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어 말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야 알아챘어. 좋은 날과 안 좋은 날 지영이의 성대 떨림이 아주 미세하게 다르다는걸. 그건 컨디션이 좋고 나쁘고에 따라서 바뀌는 게 아니거든. 지문처럼 성문이라고 해서 고유한 울림이 있는데 넌 그게 아주 미세하게 바뀌더라고. 그래서 단순한 컨디션 문제가 아니라 성대 쪽에 뭔가 문제가 있겠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알아챈 거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삼투압 현상 때문에 조금씩 성대에 걸리는 부하가 달라져서 그런 거 같아."
"그럼.. 치료를 하면 고칠수 있는건가요?"
"당연하지. 여태껏 몰라서 치료가 안된 거지 이 정도면 일주일이면 완치된다. 넌 오늘부터 노래 및 발성 금지다. 대화도 좀 자제하고.. 하루에 한 번씩 오빠한테 치료받아. 괜히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고.. 치료 끝나면 목소리가 조금 더 깨끗하게 나올 거다."
"오빠. 감사해요."
"이번 데뷔곡 메인 보컬은 너니까 관리 잘해."
잠시 후 수빈은 별다른 문제점이 없는 멤버들의 진단을 끝내고 미영에게는 서브 댄서, 수정이에게는 서브 보컬, 유리에게는 메인 래퍼 역할을 통보했다.
수빈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뮤란의 마지막 멤버인 소희를 보며 생각했다.
'후우. 지영이가 목소리가 좋긴 하지만 고음 파트를 맡아줄 멤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소희가 과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네. 얼핏 들었을 때 가능성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진단부터 제대로 해봐야겠지."
"소희야. 넌 뒤로 돌아앉아라"
"네. 왜요?."
"넌 등 쪽부터 살펴봐야겠다."
소희가 돌아앉자 수빈은 양손을 소희의 등 쪽에 가져다 대면서 생각했다.
'소희가 뮤란의 비밀병기가 되면 좋을 텐데..'
시간이 흘러 모든 뮤란 멤버들의 진단을 마치고 개개인에게 적합한 훈련법까지 전수를 마친 수빈은 마지막으로 뮤란 멤버 전원을 모아놓고서 말했다.
"지금 너희들 전원에게 숙제를 내줄 거다. 이번 데뷔곡 콘셉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야. 먼저 질문. [걸리버 여행기]가 뭔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은 손들고 말해."
"..."
"그럼 [걸리버 여행기]가 뭔지 다들 알고 있는 거지? 숙제다. 수요일 점심때까지 [걸리버 여행기]를 한 번씩 정독하고 A4 용지 한 장 정도로 감상문을 써올 것. 단 아이들용 동화책 말고 성인용으로 번역되어 나온 걸 읽어야 된다. 알았냐?"
- 네. 오빠.
잠시 후 수빈은 진이 다 빠져서 자꾸만 늘어지려는 몸을 이끌고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걸어가는 도중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빈아. 나 성철이형인데..]
"네. 형."
[너 오후에 시간 괜찮아? 성강호 쪽에서 지금 급하게 연락이 왔는데..]
"음. 성강호형 쪽이라면.. 혹시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부탁하던가요?
[그래. 어떻게 알았어? 미리 이야기가 돼있는 거야?]
"하아. 그런 건 아니고.. 어제저녁에 느낌이 싸~했거든요. 그 형이 어제 삐지셔서.. 나 때문에 집에 가면 형수님한테 박살 날 거라고.. 뭐 농담인 줄은 알지만 조만간 복수하겠다고 투덜대면서 가시긴 했죠."
[그래? 그럼 안되겠네. 바빠서 못한다고 내가 통보하마.]
"아뇨. 그러면 그 형 성격에 더 심해질 거예요. 니는 형제애가 있니 없니, 사나이가 그러면 되니 안되니 하면서.. 그럼 다음 촬영 때 그 형 등쌀에 제가 더 피곤해져요. 어차피 오전에 할 일들은 다 끝냈고 오후에는 곡 작업 말고는 다른 계획이 없으니까 간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어디로 오래요?"
[남양주 촬영장까지 3시까지 와줄 수 있냐고 그러던데..]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면 되겠네요."
[그래. 그럼 점심 먹고 전화 줘. 차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수빈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양반이 하루 사이에 얼마나 대단한 계획을 세웠길래 날 남양주까지 부르시나.. 형님. 절 골탕 먹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체질적으로 누구에게 당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수빈은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구내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틀이 훌쩍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