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17 - 2[유료연재 시작입니다.]
일요일 저녁 수빈의 강력한 요청으로 유실장이 직접 신인기획팀과 연락하여 급하게 미팅 약속을 월요일 아침으로 잡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간 수빈은 신인기획팀과 핑크 베리 데뷔에 관련된 마라톤 회의를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시작된 마라톤 회의가 10시를 넘어가서 어느 정도 안건별로 진행 방향이 결정될 즈음 수빈이 입을 뗐다.
"[뮤란]입니다."
회의 도중 임시로 정한 핑크 베리라는 그룹명을 정식으로 데뷔할 때 뭐로 바꿀 거냐는 정실장의 질문에 수빈이 미리 생각해 놨다는 듯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대답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뮬란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 예전에 방영한 애니메이션 제목 아닌가요?
-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중국 여자애 말하는 거 아냐?
수빈이 던진 한마디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걸 듣고 있던 수빈이 빙긋 웃었며 말했다.
"뮬란이 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제목이고 거기 여주인공인 중국 여자애 이름이라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 연습생 사이에서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콘셉트 디렉터 조정미가 수빈의 말을 잘랐다.
"수빈씨. 좀 전에 수빈씨가 핑크 베리의 콘셉트를 [힘겨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고난과 시련에 굴하지 않는 강인하고 현명한 현대 여성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그룹명을 해묵은 애니메이션 제목으로 정한 건가요?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조디렉터의 말에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뮬란이 방영된 지 20년 정도는 지난 거 같은데.. 요즘 젊은 애들에게 [뮬란]이라고 말하면 너무 구태의연한 스토리라고 거부감을 느낄 거고 자칫하면 그룹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어요."
평상시에 말수가 적은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까지도 말을 보태려는 듯 허리를 앞으로 내밀고 입을 열려고 하자 수빈이 급히 손을 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잠시만! 잠시만 제 말을 들으세요."
좌중이 조용해지자 수빈이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한 번도 뮬란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비슷한 단어로 착각을 하신 거죠. 제가 말한 건 정확히 [뮤.란.]입니다.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뮬란도 아니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뮤탈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해묵은 뮬란의 이미지를 가지고 올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성질 급한 조디렉터가 물었다.
"그럼 뮤란이 무슨 뜻인가요? 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요."
"제가 생각하는 강인한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전사라는 뜻의 단어를 가지고 온 겁니다."
"뮤란이 전사라는 뜻이라고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죠? 뮤란이 전사라는 뜻의 단어라는 건 생전 처음 들어봐요."
수빈은 이제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듯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부족 중에서 예로부터 가장 용맹한 부족이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신발 선전 때문에 자주 들어보셔서 잘 아실 겁니다. 마사이 부족 말입니다. 그런 용맹하기로 이름난 마사이 부족에서 성년식 때 한 자루 창과 방패만을 들고 초원으로 나가 무사히 사자(獅子)를 사냥하고 귀환한 전사를 높이 칭송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뮤란이 그럼 사자를 창으로 때려잡은 전사라는 뜻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뜻을 알고 들으면 아주 강인해 보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실장이 중얼거렸다.
"여자 아이돌 그룹 이름치고는 오히려 너무 살벌한 거 아닌가.."
조실장의 말에 수빈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장님. 실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현재 여자 아이돌 그룹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기존의 그룹과 새로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박 터지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 아수라장에서 생존하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하고 데뷔해야 합니다. 사자를 사냥하든 사자에게 잡아먹히든.. 결과는 둘 중 하나겠죠."
시간이 흘러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자 조실장이 수빈에게 물었다.
"그럼 [뮤란]의 데뷔를 위한 프로젝트 중에서 수빈씨가 가장 먼저 할 일이 어제 유실장에게 전해 들은 그건가요?"
"그렇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가 애들 몸부터 자세하게 알아보는 겁니다."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BBG 전용연습실로 수빈과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가 같이 내려왔다. 연습실 한쪽에는 이미 촬영장비가 셋팅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의자들을 놔두고 연습실 바닥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눴다.
"제가 부탁드린 건 잘 처리된 게 맞나요? 아까 회의 때 조실장님이 별다른 말 없으시길래 그냥 넘어가긴 했는데.."
수빈의 질문에 댄스 트레이너 박송희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연습생 애들 몸과 관련된 거라서 제가 직접 보호자분들에게 전화드렸어요. 애들 데뷔 전에 내일 신체검사를 정밀하게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데뷔 날짜가 언제냐며 처음에는 다들 좋아하셨는데.. 아마 가까운 병원이나 아니면 제가 하는 줄 아셨을 거예요. 그러다가 회사에서 웬 남자가 직접 신체검사를 할 거라고 말하니까 다들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죠. 저도 어제저녁부터 그게 걱정이 되어서.. 데뷔라는 명목으로 미성년자인 여자 연습생들 몸을 여기저기 만졌다.. 은팔찌 차고 큰집에 끌려가기 딱 좋은 시추에이션 아닙니까? 그래서 부탁드렸던 건데.. 그럼 결과가 안 좋게 나온 겁니까?"
수빈의 말에 박트레이너가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전혀요. 오히려 그 반대죠. 수빈씨가 핑크 베리 아니 이제는 뮤란이죠. 뮤란 애들 부모님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던데요. 애들이 예전부터 수빈씨 이야기를 집에다 자주 했었나 봐요. 저랑 이선생님이 입회하고 수빈씨가 직접 검사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두말 않고 동의해주시더군요. 그리고 다들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도 하셨어요."
"휴. 다행이네요. 이런 일이 밖으로 흘러 나가면 저나 회사나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고 입장이 난처해 질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이제부터 신체검사를 해.."
그때 과묵한 성격의 보컬 트레이너 이진희가 손을 들었다.
"그 전에요. 수빈씨가 정말로 한의학에 정통해서 사람이 가진 신체적 특징이나 재능을 잘 파악한다는 게 사실인지 아니지 확인을 해 보고 싶은데요."
"혹시나 하는 이 선생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흠. 그럼 제가 어떻게 확인을 시켜드릴까요?"
"저를 대상으로 먼저 해보시죠. 수빈씨가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는지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수빈은 이진희 트레이너 손목의 맥을 잡고 눈을 감았다. 1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수빈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 드립니다. 임신 중이시군요. 맥이 힘찬 걸로 봐서 애기가 아주 건강하네요. 6주 좀 넘으신 거 같은데요."
수빈의 말에 이트레이너가 잠시 동안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이트레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임신 중이라는 건 회사에서 아무도 모르는데.. 나도 3일 전 병원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을 수빈씨가 어떻게 알고.. 그리고 6주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거죠?"
"맥을 짚어 보고도 임신한 걸 모르면 돌팔이 아니면 사기꾼이죠. 맥이 두 개가 뛴다는 건 몸속에 심장이 두 개라는 소린데.. 그런 경우는 임신한 여성이랑 박지성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애기 심장은 보통 임신 3주부터 시작해서 7주가 지나면 완성되는데 주별로 맥이 뛰는 정도가 다릅니다. 근데.. 아주 축복받은 체질이네요. 임신을 해도 입덧을 별로 안 하는 체질이신데요. 고생도 덜하고 아주 좋으시겠습니다."
수빈이 밝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트레이너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축복은 무슨 얼어 죽을 축복. 임신을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우엑거리고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토하기도 하고 그래야 정상이죠. 그래야 집이나 시댁에서 귀하신 몸이라고 제대로 대접받으면서 편히 지낼 건데.. 이건 한 건지 안 한 건지 배부르기 전까지는 구별도 안되니.."
이트레이너의 왠지 한이 깊게 서린듯한 날선 반론에 수빈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으며 급히 사과했다.
"그.. 그렇습니까? 제가 거기까지는 미처 몰라서.. 죄송합니다."
그 순간 수빈에 대한 신뢰가 급상승했는지 박트레이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선생님. 임신하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그럼 제가 그럼 연습실로 가서 뮤란 애들 데리고 올테니 임산부는 가만히 계세요. 애들이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수빈이는 이트레이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뮤란 애들에게 제가 말한 대로 옷을 입고 오라고 전달하셨죠?"
"네. 수빈씨가 말한 대로 긴팔에 긴 바지 입고 오라고 전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입으면 진단하는데 불편하지 않나요?"
"뭐 촉진을 할 때는 맨살에 대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옷 위로도 못할 건 없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조금 불편한 게 훨씬 낫습니다. 괜히 애들에게 이상한 오해라도 받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수빈이 진저리를 쳤다.
"그래요?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수빈씨는 왜 그렇게 뮤란 애들에게 곡을 주려고 애쓰는 거죠? 지금 수빈씨 정도의 위치라면 유명한 가수들도 수빈씨가 곡을 준다면 좋다고 받을 건데요. 곡 하나 만드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뭐 그렇긴 하겠죠. [달과 나의 이야기]가 워낙 대히트를 쳤으니까요."
"굳이 무명인 애들에게 이렇게 곡도 주고 진단도 해주고.. 거기에 아까 들어보니 녹음 프로듀싱에 앨범 재킷 작업까지 직접 다 하실 거라고 하던데..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되네요."
"뭐 걔네들과 인연이 닿은 거죠. 그리고 사실은.. 제가 어제부로 새롭게 세운 꿈과 목표가 있습니다. 좀 많이 거창한 꿈이죠. 그런데 그 꿈을 달성하려면 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높은 곳까지 발전해 나가야 됩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때 목적지까지 자세히 잘 나온 지도가 있더라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라고.. 무명인 애들을 걸그룹으로 데뷔시키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제 자신이 과연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이 과연 이 세상에서 어디까지 통용되는지를 알아야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이트레이너의 질문에 답변을 길게 한 뒤 수빈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쑥스럽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제가 보기보다 말이 좀 많죠? 어제저녁부터 좀 많이 감성적으로 변해서.. 아주 예전에는 성격이 차갑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제가 생각해봐도 요 근래 제가 정말 많이 변한 거 같습니다."
"난 수빈씨가 지금처럼 적극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바뀐 게 훨씬 맘에 드네요. 사람 냄새가 물씬 나서 좋아요."
"다행이네요.."
그때 수빈의 예민한 귀에 여러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뮤란 애들이 오는 모양이네. 수빈아. 집중하자. 지금 이 순간이 연예인으로서 나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는 거야. 근데.. 이거 생각보다 많이 긴장되네. 차라리 사람들 목이나 따고 다니는 게 훨씬 속 편하겠다. 후우..'
수빈은 긴장을 풀기 위해 옆에 있던 생수병을 집어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연습실 문이 활짝 열리며 리더인 지영이를 필두로 뮤란 멤버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오면서 제각기 발랄하게 외쳐댔다.
- 수빈 오빠.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핑크 베리입니다.
- 실수하지 마. 우린 뮤란이라고.
- 안녕하세요. 뮤란입니다.
- 오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 순간 수빈은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공중으로 푸우~하고 뿜어버렸다.
'애네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수빈의 앞으로 뮤란 멤버 6명이 쪼로로 뛰어오더니 일렬로 줄을 맞춰 섰다. 그런 후 지영의 선창에 입을 맞춰 다 함께 소리쳤다.
- 하나. 둘. 셋.
- 안녕하세요! 사자도 때려잡는 소녀들! [뮤란]입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기가 막힌 수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냉기서린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하아.. 너희들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