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49화 (49/236)

# 49

17 - 1[기존 무료 분량입니다.]

수빈은 예전에 팬클럽 회원들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 수빈 오빠. 사랑해요!

- 꺄악. 오빠. 멋있어요!

- 멋있다. 어떡해. 오빠. 사랑해요!

'날 보면 소리치고 방방 뛰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오늘은 보통 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마치 절간이라도 온 것 같군. 연예인 팬클럽이 아니라 템플스테이 동호회 회원들 같은 느낌이야.'

수빈이 십여 명의 팬클럽이 모여있는 장소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조금씩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팬클럽 회원들 중 낯이 익은 여성을 발견한 수빈은 빠르게 머릿속을 검색하였다.

'저 여자가 팬클럽 회장이군. 이름은 강성희고 나이가 28이라.. 그나마 얼굴이 예쁘장하니까 용케 기억을 하고 있네.'

수빈은 팬클럽 회장에게 다가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회장님. 오래만 이네요."

"어머머머! 수빈씨. 감사해요. 이렇게 친히 아는 척을 다 해주시다니.. 그런데 강회장은 그렇네요. 그냥 성희야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이 여자도 참 특이할세. 28이나 먹은 양반이 성희야라고 불러달라니..'

"제가 함부로 말을 놓을 순 없죠. 성희씨. 그런데 오늘 다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네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얼마 전 수빈씨가 만든 [달과 나의 이야기] 발표 이후 팬클럽에 신규 가입한 분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오늘 치도락 조공을 준비하면서 그분들 위주로 모집을 했더니.. 다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봐요."

"아하. 그렇군요."

그때 갑자기 수빈을 바라보고 있던 팬클럽 회원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빈이 놀라 쳐다보니 흐느낌이 점점 거의 통곡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거야 원. 젊은 여자들이 한꺼번에 울어대니 정신을 못 차리겠네.'

"아니. 다들 왜 이렇게 우세요. 진정들 하세요. 좋은 자리잖아요."

그렇게 몇 분을 정신없이 울어대던 회원들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수빈이 말했다.

"지금 드라마 촬영이 야외가 아니라 스튜디오라서 촬영장까지 같이 들어갈 수가 없네요. 여기서 헤어져야 될 거 같으니까.. 오신 분들 모두 제가 사인을 해드릴게요."

잠시 후 수빈은 여고생으로 보이는 팬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말을 건넸다.

"학생으로 보이는데? 이름이 뭐지?"

"네. 선화여고 3학년 김수영이에요."

"이름이 이쁘네. 그런데 고3이면 수능이 얼마 안 남았을 건데?"

"원래라면 오늘도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야 되는데.. 수빈 오빠를 만나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왔어요."

"나에게 감사하다고?"

"네. 제가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안일도 잘 안 하고 아빠한테 맨날 짜증만 내고.. 그래서 아빠랑 사이가 좀 서먹했었는데.. 지금은 오빠 노래 덕분에 아빠랑 아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오늘 수정이가 독서실 안 가고 여기 온 거 알면 아빠가 나 미워하겠다."

"아뇨! 아빠한테 말하고 왔어요. 아빠도 제가 수빈 오빠 만나러 간다고 하니깐 흔쾌히 다녀오라고 용돈까지 주셨는걸요. 우리 아빠도 수빈 오빠 팬이세요."

"그러시구나. 감사하네. 수정이는 꿈이나 목표 같은게 있니?"

"저는요. S대 경영학과에 합격해서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 호강시켜드리는 게 꿈이에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가.. 흑. 아빠 혼자 고생하시며 절 키웠는데.. 흐흑. 요즘 돈 버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고생하셔서.. 저 때문에.. 흑흑."

말을 하며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학생을 보며 수빈도 덩달아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아빠도 힘내라고 오빠가 사인해서 드리면 좋아하실까?"

"그럼요!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아빠도 오빠 노래 듣고 많이 우셨대요."

"아빠 성함이?"

"아빠 성함은 김명석이에요. 밝을 명자 돌 석자 쓰세요."

수빈은 사인지에 사인과 함께 일필휘지로 글을 적었다. 김수정에게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을, 김명석씨에게는 무육지은(撫育之恩)을 적었다.

수빈은 고맙다며 아빠가 좋아하실 거라고 방방 뛰는 김수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다른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학생이니? 이름이?"

"고등 학교는 작년에 졸업했어요. 이름은 조서현이에요. 오빠.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꿈만 같고 행복해요."

"그래. 오빠도 행복해요. 서현이는 꿈이 뭐니?"

조서현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가수요."

"오 그래? 그럼 오디션 같은 건 안 보니? 우리 회사도 괜찮은데,,"

"YK 포함해서 여러 군데 오디션을 봤는데 다 떨어졌어요."

"저런. 무슨 이유 때문에?"

"...제가.. 얼굴도 별로고 재능도 별로라고.."

"음.."

"그래서 아. 나는 나의 꿈인 가수는 절대 될 수 없겠구나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빠 때문에.. 오빠 노래를 듣고..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요. 흑.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시 한번 도전을 할 거예요. 흑흑. 오빠. 진심으로 감사해요."

수빈은 서현이의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간신히 참고 말했다.

"가수가 되는데 얼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서현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시는 거야. 오빠는 서현이의 꿈을 끝까지 응원하마."

수빈은 사인지에 사인과 함께 일필휘지로 진심을 담아 노마십가(駑馬十駕)라고 글을 적어서 건넸다.

팬들에게 사인을 모두 마친 수빈은 복잡한 심정을 한채 스튜디오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만약 신이 존재하다면.. 신은 왜 날 환생시킨 걸까? 요절해서? 역사상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왜 나일까?'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니 성강호 선배가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수빈아!"

"형님. 안녕하세요."

"그래 그래. 반갑다. 이야. 수염이 이제 제법 그럴싸하게 자랐는데.."

"피디님께서 담 주에 면도신 찍는다고 하셔서 열심히 기르고 있는 중입니다."

성강호가 수빈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아. 너랑 나랑은 형제 아이가. 맞제?"

"네. 그렇죠."

"수빈아. 피디나 작가들은 어차피 드라마 끝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기라. 하지만 너랑 나랑은 다르지. 암. 다르고말고. 같은 배우고 친한 형제 사이니까 앞으로도 자주 볼 거 아이가. 내 말이 틀리냐?"

"맞습니다. 형님.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하니까 자주 찾아뵈야죠."

"그래. 언제든 찾아와라. 수빈아. 이따가 입장이 곤란해지면 나를 생각해라. 알았제?"

"네? 무슨 말이신지?"

"허어. 이따 보면 안다. 그때 나를 떠올리고 나한테 슬쩍 떠밀어란 말이다. 너만 믿는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성강호를 보고 수빈은 무슨 일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여간 이 양반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성강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강민철 피디와 정수희 작가가 굳은 얼굴을 한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수빈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강피디님. 정작가님. 작가님도 오늘 현장에 나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재촬영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수빈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질세라 급히 입을 열었다.

"수빈씨. 아무래도 작품은 드라마 제작 피디인 제가 소장해야 맞는 거겠죠?"

"수빈씨. 제가 각본을 고쳐서 재촬영을 하게 됐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이 동시에 던진 말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멀뚱멀뚱 가만히 서있는 수빈에게 옆에 있던 성강호가 작게 속삭였다.

"조금 이따가 재촬영하면서 니가 그림을 그릴 거잖아. 촬영 끝나고 그 작품을 누가 가질 건가를 두고 둘이서 한참을 티격태격했어. 애도 아니고 말이야.. 쯧쯧. 한심한 사람들 같으니.. 수빈아. 아까 형이 한말 기억해라. 입장이 곤란하면 쓰윽 나에게 밀어란 말이다. 알겠제? 니 형수가 받아올 수 있냐고 묻길래 당연히 가능하다고 내가 철석같이 약속을 하는 바람에 지금 내입장이.. 부탁한다. 동생."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수빈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나이를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이 왜 그러세요. 제가 3분 다 하나씩 드릴게요. 하지만 [명품진품]에 나왔던 수준의 그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안돼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한 분씩 그려서 드릴 테니 오늘 그린건 작가님이 가져가세요. 이제 해결됐죠?"

팔짝팔짝 뛰며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정작가와 아쉬워하는 강피디와 성강호를 남겨두고 수빈은 분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수빈은 분장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 대본을 살펴 보았다.

'대사가 간단하네. 한번 읽으면 다 암기하겠는데.'

대본을 한번 읽어보고 덮은 수빈은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신은 이 세상에 나를 왜 보냈을까? 정말로 신은 있는 걸까? 신은 과연 나에게 무얼 기대하고 다시 살려주신 걸까?'

자신의 차례가 되어 수빈은 눈을 감은 채 분장을 받으면서 계속 생각을 정리하였다.

'왜 하필 연예인일까? 이 세상에는 다른 직업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말이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무공이나 지략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처 죽이고 다니라고 살려주신 건 아니라는 건데..'

수빈은 좀 전 팬들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내가 만든 노래에 감동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고 말했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화해를 했고 심지어는 노래를 듣고선 다시 한번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뛰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지. 노래만 그런 게 아니겠지. 연기 또한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겠지. 후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라..'

그 순간 수빈의 가슴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은 싹이 돋아났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칭찬받고 몰살(沒殺)이라도 시키면 존경받는 세상에서 지금의 세상으로 넘어왔단 말은.. 어쩌면 말이야. 어쩌면 신이 나에게 원하는 건 특별하고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몰라. 내가 얼마 전 맘속으로 간절히 바랜 것처럼 인생을 행복하게 한번 살아보라고 단순히 살려주신 거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쉽지 않겠어?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이번 생에서 죽기 전까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수빈씨. 분장 다 끝났어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대답을 하고 일어난 수빈은 거울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예인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지. 그럼 나도 한번 제대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 수빈의 가슴속에 돋아난 작은 싹이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촬영을 앞두고 수빈은 무릎을 꿇었다.

앞에는 새하얀 화선지를 두고 옆에는 붓과 벼루를 둔 채 수빈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들이마시는 흡(吸)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내뱉는 호(呼)에 자신의 잡념을 날려버렸다.

수빈의 호흡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방이 점점 조용해지더니 이윽고 고요함만이 남았다.

적막함 속에서 수빈을 지켜보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피디의 큐사인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촬영을 시작했다. 그걸 지켜본 피디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린 후 수빈의 집중을 깨지 않으려는 듯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레디~ 큐

큐사인에 수빈의 눈이 번쩍 떠졌다. 모든 고민과 잡념을 다 버리고 하나로 벼려진 절대 꺾이지 않을 신념을 완성한 뜨거운 눈빛이었다.

'나는 연예인이다. 고로 난 평생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정진할 것이고 이 삶이 끝날 때 연예인으로서 한 평생 후회 없이 살았노라 생각하며 죽을 것이다. 이건 나의 영혼에 새겨진 나 자신과의 약속이자 맹세다.'

수빈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수빈의 가슴속에 자라난 나무가 어떤 폭풍에도 절대 꺾이지 않을 마치 강철기둥같이 단단한 거목으로 자라났다.

촬영을 다 끝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수빈은 유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실장님?"

[수빈이니? 촬영 잘 끝났어?]

"네. 유실장님. 잘 끝났습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

"아까 말씀하신 블록버스터 영화 주연 문제 말입니다."

[그래. 맘을 결정했니?]

"네. 결정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다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제가 주연을 맡아서 열심히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어머. 수빈아. 정말 잘 생각했어.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야.]

"네. 그리고 말입니다.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집중해서 잘 듣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수빈의 말이 끝나자 유실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수빈아. 굳이 꼭 그렇게 해야겠니?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건데..]

"그래서 제가 특별히 실장님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저녁 풍경을 쳐다보면서 수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성추행으로 고소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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