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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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장과 수빈은 드라마 제작진에게서 급박하게 걸려온 전화 통화를 끝냈다.
그런 후 유실장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과 또 다른 통화를 하고 있었고 수빈은 뉴스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고 있었다.
- [속보] 주먹이 수빈, 뛰어난 그림 실력을 KBC 드라마에서도 뽐내다.
오늘 방영된 화제의 [명품진품]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무려 2천만원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기탁한 BBG의 리더 수빈이 금주에 방영되는 [특별수사본부]에서 다시 한번 뛰어난 그림 실력을 선보이게 되었다.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는 KBC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특수본의 각본을 집필하고 있는 정수희 작가가 수빈의 그림에 감동받아 대본을 급수정하고 담당 피디가 재촬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려서...
그때 유실장이 통화를 끝내고 수빈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수빈아. 제작진 말로는 오후 4시 정도까지 드라마 촬영장으로 오라고 하니까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될 거 같은데. 분장하고 바뀐 대본 숙지하고.. 막상 촬영에 들어갈려면 아마 6시 정도에 재촬영이 들어갈거 같다고 하네."
"네. 그럼 점심 먹고 출발하면 딱 맞을 거 같네요. 근데.. 드라마 제작진들도 정말 대단하네요."
"뭐가?"
"저희 쪽이랑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고 뉴스부터 먼저 터뜨리다니.. 실장님이나 저나 재촬영 이야기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뉴스 보고 알았잖아요."
"이런 뉴스는 타이밍이 생명이야. [명품진품]에서 제대로 터졌으니 탄력받아서 기세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급하게 발표했겠지. 아마 제작진 쪽에서는 숨도 안 쉬고 [명품진품] 모니터링하고 있었을거다. 그러다 결과가 좋은 쪽으로 나오자 지체 없이 터뜨린거지. 그 덕에 지금 대중들 반응이 완전 핫하잖아. 댓글들도 이미 많이 정화된 상태고.."
"만약 제가 오늘 시간이 안돼서 촬영을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건지.."
"설혹 네가 오늘은 안되더라도 드라마 방영일인 수요일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전에 어떻게 하던 다시 찍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겠지."
"그럼 편집은 어떡하고요? 시간이 없어서 무리일 건데요."
"얘는.. 그게 뭐 대수니. 시청률에 도움만 된다면 담당 피디가 며칠 밤을 꼴딱 새우더라도 알아서 잘 편집할 거다."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유실장의 태도에 수빈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한 번씩 느끼지만 이 세상도 정말 녹록지 않다니까..'
"그런데 정말로 제가 드라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맞는 걸까요? 마약을 유통하는 조폭 두목이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린다는 게..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지 않습니까? 시청자들에게 오히려 반발을 살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연예계에 막 데뷔한 애처럼 자꾸 그러네.. 수빈아. 드라마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아. 그건 압니다. 시청률이죠."
"그래. 시청률! 그게 알파이자 오메가인 거야. 개연성? 그럼 그동안 나왔던 막장 드라마는 다 망했니?"
"..그렇진 않죠."
"드라마를 보는 주 시청자는 거의 여자고 또 아줌마들이야. 따라서 드라마를 제작할 때 제일 중요한 건 그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주고 관심을 끄는 거지. 사건의 개연성이나 논리적 근거 따위는 차후의 문제라고. 끝내주게 잘생긴 젊은 조폭 두목이 그림까지 폼나게 그린다.. 얼마나 판타지스럽니. 상상의 나래를 마구마구 펼 수 있지 않겠어? 만약 저런 남자가 내 애인이거나 남자친구라면 연애할 때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이런 식으로 말이야."
"여자 분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합니까?"
"허구한 날 여자 뒤만 쫓아다니면서 사고란 사고는 다 치던 애가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니?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들의 심리를 전혀 모르네."
유실장의 말에 수빈은 차마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통 기루(妓樓)에 팔려나가거나 나쁜 놈이랑 같이 옆에서 칼 맞아 죽던데요. 전생에서 어떡하던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느라 연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아무튼 드라마에서 네가 그림을 그리면 시청률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시청률에 도움만 된다면 똥물에서 수영하는 것도 마다않는 피디들이 즐비한 게 그 바닥인데..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강민철 제작피디가 이런 좋은 기회를 당연히 놓칠 리가 없지."
한편 그 시각 수빈의 팬클럽 회장인 강성희는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직접 작성해서 여성들만 가입이 가능한 [수빈을 사랑하는 백조들의 모임] 줄여서 보통 [빈사의 백조]라고 부르는 팬클럽 게시판에 올린 공지를 보고 있었다.
- [공지] 금일 드라마 촬영장에서 조공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오늘 조금 전 뉴스에서 보도된 것처럼 수원 KBC 드라마 제작센터에서 수빈씨의 재촬영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방금 전 남미에서 귀국한 유실장님에게 전화로 여쭤보니 오후 4시경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후 3시 30분까지 수원 드라마 센터에 오실 수 있는 빈사의 백조 분들을 모집합니다. 너무 많은 인원은 드라마 촬영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10여 명 정도로 인원을 제한합니다. 특히 요 근래 새롭게 가입하신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참석이 100% 확실하신 분들만 댓글로 남겨주시고...
'어디 보자. 벌써 댓글들이 많이 달렸네. 요즘 수빈씨 인기가 장난 아니라니까.. 신규 회원들도 많이 늘었고.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를 뽑아서 데려갈까..'
모니터를 보며 머리에 꽃단년처럼 헤죽헤죽 웃고 있는 사장을 보며 직원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 저 정도면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거 아냐?
- 냅두라니까. 우리를 두들겨 패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 조만간 네일숍 망할 거 같지 않니?
- 사장님은 집에 돈이 많아서 끄떡없을 거니까 너나 신경 쓰세요.
그 시각 사무실에서는 유실장이 진지한 얼굴로 수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마저 하자. 음악 쪽은 아까 했고 연기 쪽으로 의논을 좀 해보자. 내가 배우 1팀 박실장님과 계속해서 의논을 해왔었는데 귀국전에 통화하면서 둘 다 의견이 일치했어."
"어떻게요?"
"이제부터라도 배우로서 너의 필모그래피를 회사에서 제대로 관리할 거야. 그래서 새롭게 들어가는 영화부터는 너를 주연 배우로 밀기로 어제 결정했어."
유실장의 말에 수빈은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드라마 조연으로 딸랑 한번 출연한 게 다인 나를 회사에서 영화 주연으로 밀어 준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그렇다면?'
"저예산 독립영화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상업영화. 그것도 블록버스트급 영화의 주연으로 밀 거야."
담담한 어투로 대답하는 유실장의 말에 수빈은 순간적으로 벙쪄서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하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난 수빈도 금방의 말은 자신의 상식에 비추어 보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도 아니고 수백억의 돈을 쏟아붓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주연으로 나를 민다고? 이건 완전히 도박인데.. 흥행에 실패라도 하면 수백억이라는 돈이 공중으로 먼지가 되어 날아갈 건데..'
겨우 생각을 추스른 수빈이 유실장을 보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오버인 거 같습니다. 아무리 YK가 힘이 있어도 저를 그런 영화의 주연으로 밀기에는 역부족일 건데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영화판에서 저를 주연급 배우로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제작에 자금을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수빈의 반대 의견에 유실장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무리하지 말고 한발 한발 차근차근 밟아나가자고.. 그런데 요 며칠 사이 [달과 나의 이야기]가 대히트를 치고 [특별수사본부]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어. 수빈아. 지금 회사로 너랑 CF 계약을 하고 싶다고 연락 오는 업체가 몇 군 데인 줄 아니?"
"저야 모르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만 10곳 가까이 된다. 자잘한 기업까지 합치면 30곳이 넘어. 지금 업체 선별한다고 계약팀에서 난리야 난리."
"설마 그렇게까지.."
"설마라니. 인기 아이돌이면서 퀴즈와 암산의 천재 그리고 천재 작곡가, 천재 프로듀서, 어린 나이,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외국어 능통, 뛰어난 연기력, 놀라운 그림 실력, 훌륭한 인성.. 이런 조건을 갖춘 연예인이 이 바닥에 몇이나 될 거 같니?"
"맨 마지막 거는 사실과 달라서 듣기 좀 그렇네요.. 그것만 빼면 좀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저밖에 없겠죠."
"그래. 지금 나열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건 너밖에 없어.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이 너를 찾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게 뭔 줄 알아? 천재라는 너의 이미지 때문에 나이 먹은 어르신들이 너를 보는 시선이 아주 호의적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내던 유실장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눈빛을 번쩍이며 수빈을 바라본 후 다시 열변을 토하였다.
"남자 아이돌이라고 해봐야 머리가 텅 빈 날라리 아니면 춤바람 난 딴따라로 보는 어른들이 대부분인데.. 넌 입장이 달라. 어른들은 말이야. 너처럼 머리가 똑똑하고 영특하며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를 보면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은 기분이 저절로 들거든. 이건 누가 강요를 해서 그런 게 아냐.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같은 거라고. 그래서 지금 네가 가진 잠재적인 가치가 엄청나다는 거야. 돈에 관해서는 인정사정없다는 대기업에서 이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너를 잡으려고 안달복달 할리가 있겠니?"
수빈은 실장의 말에 반박 의견을 내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실장님이 하시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수빈이 반박을 하려는 순간 유실장이 수빈의 말을 잘랐다.
"수빈아. 내 말을 들어. 지금 이 순간이 그래서 더욱더 중요한 거야. 여기서 한발이라도 삐끗하면 너는 그냥 잠깐 아주 잠깐 반짝하고 빛났던 아이돌로 끝나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억울하겠니? 지금의 이 기세를 이어서 앞으로 홍보를 잘하고 회사에서 밀어주는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해나가면 진정한 탑급 연예인이 되는 거야. 젊었을 때 잠깐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남자 아이돌 중 하나가 아니라 진정한 탑 오브 탑인 연예인으로 우뚝 올라설 수 있다고."
수빈은 한숨을 쉬며 흥분한 유실장을 달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후우..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기를 좀 얻었고 미래에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해도 제가 지금 당장 블록버스트급 영화의 주연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저를 손가락질하면서 오히려 욕을 할 겁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저 같아도 그럴 거 같은데요."
자신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반박하는 수빈을 보며 유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너 정말 이상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사람들이 너에게 손가락질하는 게 두렵니? 네가 잘 나가면 사람들이 질투하고 욕할까 봐? 착각하지 마. 넌 일반인이 아니고 연예인이라고. 연예인에게 있어서 그런 건 인기에 딸린 세금과도 같은 거야.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년간 해봐서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전부라면 말이야. 연예인에게 있어서는 인기가 빛이고 진리인 거야."
약간의 시간을 두고 유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말했다.
"너를 주연으로 미는 건 개인적으로 너를 이뻐해서도 아니고 너를 좋아해서도 아냐. 너의 인기가 지금 하늘을 찌를 기세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미는 거라고.. 그리고 나랑 박실장님이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따로 또 하나가 더 있어. 지금 우리 회사 쪽으로 오퍼가 들어온 게 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유실장과의 회의를 끝낸 수빈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촬영에 대비해서 점심을 가볍게 챙겨 먹었다. 그런 후 백성철 매니저가 모는 벤을 타고 수원에 있는 KBC 드라마 제작센터로 출발하였다.
이윽고 촬영장에 도착한 수빈은 촬영장 입구에서 자신이 오기만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는 십여 명의 팬클럽 회원들을 발견했다.
미리 유실장에게서 이런 일들이 있을 거라고 전해 들은 수빈은 당황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서 얼굴에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며 팬클럽 회원들에게 다가갔다.
수빈은 팬클럽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왜 이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