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15 - 1
띠리리링~
"안녕히 가세요."
조서현은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뒤, 손님이 먹고 떠난 자리를 행주로 훔치고 쓰레기를 분리수거 한 후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다.
편의점 저녁 근무의 피크 타임인 8~11시가 넘어가서 손님이 줄어들자 조서현은 카운터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친구들에게 카톡 온 게 있는지 확인을 한 후 자주 찾는 사이트와 카페를 돌아다녔다.
음악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걸 즐겨 하는 조서현은 서핑을 하던 도중 12시가 지난 걸 확인하고 새로운 신곡이 올라온 게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멜빵]에 접속했다.
거의 매일 밤마다 빼먹지 않고 들리는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인 [멜빵]에 접속한 조서현은 최신곡을 훑어보았다.
'뺨빨간사춘기 [썸 탈거니], 에디정 [긴 밤이 올까]가 1, 2등이네. 이건 이미 다운 받은거고.. 뭐 새로 올라온 노래가 없나?'
그때 조서현의 눈에 신곡 48위에 올라와 있는 [달과 나의 이야기]라는 곡이 들어왔다.
'제목만 보면 발라드 같은데.. 가수가 누구지? 어머. 하이유네. 최근에 하이유가 신곡을 발표한다는 뉴스가 올라온 적이 있었나? 내가 바빠서 못 본 건가.. 일단 받아볼까.'
띠리리링~
"어서 오세요."
편의점 안으로 손님이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한 조서현은 손님이 매대에서 살걸 고르는 동안 다운로드가 끝난 음악을 들어보았다.
감미로우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의 현악기 소리와 들릴 듯 말 듯한 일정한 리듬의 드럼 소리에 맞춰 하이유의 서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곡이라 가사에 집중하여 듣던 조서현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노래 가사가 너무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동조한 것이다.
가사 내용처럼 흘러간 과거의 아픔과 딛고 있는 현실의 참담함 그리고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꾸 다운되어 가는 감정을 겨우겨우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상처투성이인 지금의 자신을 감싸 안고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러운 내레이션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여 들으면서 조서현은 조금씩 감정이 북받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내레이션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한 건지 굵은 남자 목소리로 약간은 흥분한 듯 힘차게 영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기에 대꾸하듯 부드럽고 감미로운 하이유의 목소리가 뒤를 이어서 화답했다.
두 사람의 내레이션이 하모니를 이루듯 영어와 한국어로 순차적으로 들려왔다.
[You can do Everything, You can be Everything.]
- 당신은 하고 싶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당신은 되고 싶은 어떠한 사람도 될 수 있어요.
[We cheer you up, We love you forever.]
- 우리는 항상 당신을 응원하고 있고,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Never give up!!
-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그 순간 조서현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카운터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매대에서 물건을 고른 손님이 카운터 앞에서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봐. 아가씨. 갑자기 왜 울어?"
"흑흑. 손님. 죄송해요. 노래가 너무.. 엉엉. 엄마.엉엉엉~"
조서현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아예 통곡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손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손엔 숙취해소 음료인 [견디셔]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컵라면을 들고서, 카운터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 시각 청담동 자이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고급 외제차에서 내린 김명석은 차 키를 건네주며 허리를 반으로 접으면서 공손히 인사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또 불러주십시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온 김명석은 또 다른 대리운전 호출이 오기를 기다리며 강남역 쪽으로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첫 손님 팁이 후한 걸 보니 오늘은 집에 돈 좀 들고 갈수 있겠는데.."
그때 핸드폰이 드르륵 울리자 김명석은 신속한 손놀림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빠. 나..]
"오. 사랑하는 우리 딸.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냐? 안 자고 있었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좀 전에 들어왔어.]
김명석은 딸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급하게 캐물었다.
"수영아!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너 울었어? 무슨 일이야? 독서실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무슨 일인데? 아빠한테 말해봐.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혀?"
[그런 거 아냐. 아빠 잠도 못 자고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힘내라고 그냥 전화한 거야. 아빠.. 사랑해요.]
평상시와 다르게 밤늦게 걸려온 딸의 전화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급히 확인을 해보니 딸의 문자가 한통 들어와 있었다.
[아빠. 노래가 너무 좋아서 아빠도 한번 들어보라고 보내요. 힘내세요. 항상 고맙고 사랑해요.]
김명석은 갑작스레 일어난 지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황당한 마음으로 딸이 보낸 문자에 링크되어 있는 노래를 눌렀다. 그런 후 노래를 들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손님이 많은 강남역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급하게 내딛든 김명석의 발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길에 멈춰 서서 노래를 듣던 김명석은 주위를 둘러본 후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늘진 아파트 담벼락 쪽으로 걸어가서 주저앉았다.
그리곤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아무런 선전도 예고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이 잠든 12시에 올라간 [달과 나의 이야기]가 밤에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SNS와 카톡 등을 통해 알음알음 퍼져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한 계단씩 순위가 올라가더니 새벽 3시를 기점으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 새벽 5시를 기점으로 최신곡 10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각 방송국 라디오 부서에서 비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연예인 중에서 건망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박소연은 라디오 진행 중간에 삽입된 광고가 시작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라디오 부스를 박차고 나가 KBC 2FM [박소연의 상쾌한 아침] 담당 피디에게 하이톤의 목소리로 항의했다.
"피디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리퀘스트 올라오는 거 안 보이세요? 10개 중에 4개가 하이유 신곡 틀어달라고 그러는데 왜 안 틀어주는 거예요?"
"그게.. 지금 그 곡이 준비가 안됐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래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설혹 방송국에 CD가 준비되어 있지 않더라도 mp3로 다운 받아서 틀면 되잖아요. 제가 직접 다운 받아서 틀까요?"
"그런 게 아니라.. 후우. 하이유가 발표한 신곡이 아직 방송국 심의를 통과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못 트는 겁니다."
"네? 아니 안에서 신곡 가사 읽어보니까 욕도 한마디도 없고 정치적인 색깔도 전혀 없던데 왜 심의를 통과 못해요? 설마 하이유가 KBC 블랙리스트에라도 올라간 거예요? 그런 거예요?"
"말도 아닌 소리를..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달과 나의 이야기] 심의 넣은 지 이틀밖에 안됐어요. 그래서 아직 심의를 통과 못한 겁니다. 블랙리스트라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저 목 날아갑니다."
"아니 그럼 그 노래가 음원사이트에는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다운 받아서 들어봤으니까 라디오로 신청을 하는 거잖아요."
"우리 방송국은 아직 심의중인데 SBC는 이미 통과를 했다고.. 그래서 음원사이트에도 올라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심의를 내주면.. 아 시간이.."
"그 사람들 출근하려면 4시간은 더 기다려야 됩니다. 그리고 KBC는 심의하는데 보통 일주일은 걸려요. 며칠 더 있어야 심의가 통과될 겁니다."
"그럼 도저히 안되겠네요. 지금 나가는 광고 끝나면 피디님이 말한 고대로 제가 안내 멘트할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안 그러면 지금 신청하는 청취자분들이 내가 그분들 요구를 무시하는 걸로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런 일이 며칠이나 더 이어질 건데.. 전 그렇게는 못해요. 안내 멘트할 거예요."
박소연은 바람이 일듯 사나운 기세로 몸을 획 돌려서 라디오 부스 안으로 들어간 뒤 의자에 앉아서 안내 멘트를 할 준비를 하였다. 부스 밖에서는 담당 피디가 안절부절못하여 몸을 좌우로 왔다 갔다 흔들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러다 내가 시말서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와 유사한 사태가 KBC, MBS의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반대로 SBC 러브 FM과 파워 FM에서는 하이유의 [달과 나의 이야기]가 파트가 바뀔 때마다 다채로운 노래 소개 멘트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진행되자 KBC와 MBS 라디오 청취자들이 조금씩 SBC 라디오로 이동하였다. 노래 한 곡으로 인해 각 방송국의 아침 라디오 청취율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YK 홍보부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김시후 대리는 평상시 출근시간 보다 이른 시각인 아침 7시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늘 아침 9시까지 하이유의 신곡인 [달과 나의 이야기] 보도자료를 준비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대리는 자기 책상 옆에 가방을 두고 컴퓨터를 켠 뒤 의자를 꺼내 앉으면서 짜증이 듬뿍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사에는 정해진 루틴이 있고 규정이라는 게 있는데 왜 자기 혼자만 멋대로 하는 거야. 인기 좀 있다고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거야 뭐야. 더러워서 못해 먹겠군.."
개인적인 이유로 평상시에도 하이유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김대리는 컴퓨터가 켜지자 [달과 나의 이야기]에 관련된 기본 자료를 읽으면서 보도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노래의 콘셉트가 어떻게 되나.. 힘들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 허참. 말은 더럽게 거창하네. 자기가 영혼을 치유하는 시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죽어라 삼단고음만 내지르던 애가 인기 좀 얻었다고 꼴값을 떠는구먼. 하이유가 많이 컸네.."
신곡의 음원 순위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으로 음원 사이트에 접속한 김대리는 깜짝 놀랐다.
"뭐야? 벌써 신곡 1위라고? 전체 3위? 신곡 발표한다고 선전도 안 했는데 이게 말이 돼? 노래가 어떻길래.."
허겁지겁 [달과 나의 이야기]를 다운 받은 김대리는 mp3 파일을 플레이 시켰다. 연달아 쉬지 않고 5번을 들은 김대리는 울먹이며 보도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가 사람을 이렇게 울리냐. 하이유가 노래 하나는 끝내주게 부르는구나.. 아. 콧물이 자꾸 나와서 미치겠네.."
코를 훌쩍거리며 김대리는 열심히 타이핑을 쳤다.
- 현대인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하는 하이유의 감성 발라드 [달과 나의 이야기]
작사 : 하이유, 작곡 : BBG 수빈, 프로듀싱 : BBG 수빈, 피처링 : BBG 케빈
* 하이유의 새로운 신곡 [달과 나의 이야기]는 요 근래 천재로 거듭난 수빈이라는 천재 작곡가의 첫 발표곡으로서 감성 발라더인 하이유와 천재 작곡가의 절묘한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명곡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끝없이 상처받고 고통받는 영혼을....
수빈은 전날 늦게까지 [Dispatch] 수정 작업을 하느라 평상시보다 늦은 시각에 YK로 나왔다. 연습실로 내려가니 가수 2팀 조실장이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발견한 조실장이 3년 전 집 나간 서방이 돌아온 듯 미친 듯이 뛰어오더니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이고. 수빈씨. 제발 나 좀 살려줘라.."
"아니 조실장님. 어제도 그러시더니.. 지금 노래 성적이 나쁘지 않잖아요? 왜 또 그러세요?"
"내가 미치겠어. 음원 성적이 예상외로 좋아서 급하게 내일 SBC 음악방송을 하나 잡았는데.."
"잘 됐네요. 그런데요?"
"하이유가 노래를 안 부르겠대. 내가 지금 돌아버릴 거 같아.."
"네? 아니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