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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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갑작스러운 뜬금포 질문에 하이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마더 테레사면.. 테레사 수녀님 말하는 거 아닌가요? 노벨 평화상 받으신.."
"네. 맞습니다. 20년 전에 사망하신 분이라서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노벨 평화상과 슈바이처상을 받으신 분이죠.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빈자(貧者)의 어머니라고도 불리시죠. 물론 그분의 사망 후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존경받기에 충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그분은 왜요?"
"테레사 수녀님이 지금 하이유씨가 쓰신 내레이션의 가사처럼 상처받고 아파하며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하신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나 해서요."
"일전에 말한 거처럼 제가 공부를 많이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뭐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분이 한국 분도 아니고 한국말로 하신 것도 아니니.. 지금 내레이션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하이유씨의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어서 흐름이 유려하고 처연한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지만 약간의 이중적이고 대비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마치 달이 남자인 것처럼요. 그래서.."
"그래서요?"
"달의 대답하는 부분을 영어로 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너무 어려우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많이 알려져 있는 구절을 응용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좋을 거 같아요. 그럼 수빈씨가 직접 달을 맡아서 그렇게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뇨. 저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 달은 목소리가 중후해야 됩니다. 그리고 영어 발음이 당연히 좋아야 되겠죠. 전 목소리가 중후한 편도 아니고 발음이 뛰어난 편도 아닙니다.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니까요."
"그럼 어떤 분이 좋을까요? 혹시 생각하신 분이 있으시면 제가 피처링을 해달라고 섭외를 해볼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마침 제 주위에 거기에 딱 맞는 인간이 하나 있으니까요."
수빈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인간에게 알아봐야 할 것들도 좀 있고 하니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잠시 신호가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수빈?]
"그래. 나다. 너 지금 어디냐?"
[나? 지금 회사.]
"그래? 마침 잘 됐네. 너 지금 혹시 특별히 뭐 하고 있는 거 있냐?"
[숙제.]
"응? 숙제? 갑자기 뭔 숙제?"
[네가 내준 숙제!]
"아아. 그거 하는 중이구나.. 그거야 급한 거 아니니까 지금 제1 녹음실로 좀 와줘라. 너한테 부탁할게 있으니까."
[급하다고 빨리하라고 닦달하더니... 부탁? 무슨 부탁?]
"일단 와보면 안다. 빨리 와라."
수빈이 전화를 끊자 하이유가 궁금한 게 많은 듯 폭풍 질문이 이어졌다.
"수빈씨는 저보다도 나이가 더 어린데 어떻게 테레사 수녀님을 알고 있는 거죠?"
"책이죠. 제가 테레사 수녀님을 아는 건 [세계의 위인 100선]이라는 책을 읽어봤기 때문에 아는 겁니다."
"그러시구나. 역시... 그럼 지금 오기로 하신 분은 누구예요?"
"아. 그건 보시면 바로 알 겁니다."
"그럼 그분이 내레이션을 해주시겠다고 하신 건가요?"
"아직 그거까지는 말 안 했죠. 이 친구가 겉으로 보기에 말수도 적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의리도 있고 속 정도 깊어서 제가 부탁하면 아마 해줄 겁니다."
"그렇구나. 그럼 아까 말한 숙제는 또 뭔가요?"
"숙제는 제가 그 친구에게 빨리 좀 만들라고 재촉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겁니다.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봐요?"
"어머. 미안해요. 제가 말이 좀 많죠?"
"하하. 아닙니다."
그때 녹음실 문이 열리며 한 젊은이가 등장했다.
잠시 후 설명을 어느 정도 마친 수빈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케빈."
"알아들었다. 근데.. 굳이 왜 나냐? 영어라면 마빈이.. 마빈은 정글에 갔구나. 그럼 로빈도 있잖아. 그리고 경빈도 래퍼 출신이라 영어도 잘하고 내레이션도 잘할 거 같은데?"
"로빈이는 목소리가 얇아서 안돼. 그리고 경빈의 그 촐싹맞은 어투로 내레이션을 하자고? 곡 말아먹을 일 있냐?"
"..그런가.."
"그래. 내가 예전에 너희들 밴드 시절 불렀던 곡을 일일이 다 분석해봤다는 거 너도 알잖아? 이 내레이션에는 네가 딱이야."
"후우. 알았다. 우리 리더께서 까라고 하면 까야지. 내용이 어떤 건데?"
"테레사 수녀님이 말씀하신 유명한 구절을 기초로 조금 손봐서 할 거야."
"응? 마더 테레사?"
"그래."
"그분의 유명한 구절이면.. little pencil?"
"그거 말고."
"그럼.. yesterday?"
"그래. yesterday. 역시 네이티브 스피커. 발음이 굿이야."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이유가 물었다.
"리틀 펜슬이면 몽당연필 아닌가요? 그리고 예스터데이면 비틀즌데.. 그걸 말하는 건 아닐 거고.."
그때 케빈이 정통 영국식 발음으로 말했다.
"a little pencil in the hand of a writing God who is sending a love letter to the world."
(저는 전 세계에 러브레터를 쓰고 계신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작은 연필입니다.)
"어머어머. 듣기에 너무 좋아요. 뜻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역시 발음이.. 근데 아무리 영국 출신이라고 해도 이걸 외우고 있다고? 혹시 너 종교가?"
"캐쓰오릭."
"..그래. 가톨릭. 너 천주교 신자였어?"
케빈은 약간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부모님이 독실한 신자이셔서 나도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녔었지. 지금은 안 다니지만.."
그때 하이유가 끼어들며 물었다.
"케빈씨. 그럼 예스터데이는 뭐예요? 내레이션에 쓸 유명한 구절이라는 것도 지금 한번 들어보고 싶어요."
"마더 테레사님이 말한 예스터데이로 시작하는 문구라면.. 아마 이걸 말하는 거 일 겁니다."
케빈이 다시 굵은 톤의 목소리를 내며 정통 영국식 발음으로 말했다.
"Yesterday is gone. Tomorrow has not yet come. We have only today. Let us begin."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다 같이 시작합시다.)
"..목소리랑 발음이 너무 좋다. 케빈씨. 멋져요. 그리고 이건 무슨 뜻인지 저도 알겠어요."
수빈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필이 끝내준다. 역시 이 내레이션에는 네가 딱이야."
"후. 그럼 이거 원본 그대로 쓸 거야? 그냥 이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거냐?"
"아니지. 그럼 달의 대답이 너무 지나치게 심플하지. 문장을 과거, 미래, 현재의 시점별로 자를 거고 거기에 각각 추가로 다른 문장을 첨가해야지. 그냥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쓰면 내레이션이랑 약간 미스매치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뜻이 잘 통하도록 적당히 손을 봐야겠지."
잠시 후 녹음 부스 안으로 하이유랑 케빈 두 사람이 들어가서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 캘리브레이션 작업을 하였다.
마침내 내레이션의 녹음 준비가 끝났다.
수빈이 콘솔 박스 옆의 마이크 스위치를 키고 말했다.
"과거, 미래, 현재로 나누어서 녹음을 할 겁니다. 먼저 과거 파트부터 녹음할게요. 제가 큐를 주면 하이유씨가 먼저 내레이션을 하고 그게 끝나고 나면 제가 다시 케빈에게 큐를 줄 거니까 그때 케빈이 시작하면 됩니다."
- 네. 알겠어요.
- 알았어.
"하이유씨. 큐."
[힘겹게 버텨온 지난 하루하루가 너무..]
"컷. 하이유씨. 지금 하는 건 내레이션이에요. 노래가 아닙니다. 다시 갈게요."
[네. 흠흠.]
"큐."
[.. 청동에 끌로 새긴..]
"컷. 하이유씨. 지금 너무 리드미컬합니다. 지금 하이유씨는 뮤지컬 무대에 서있는 게 아닙니다. 평상시 대화를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친구랑 카페에서 서로 대화하듯이 아니면 삼촌이나 아빠에게 말하듯이.. 다시 갈게요. 준비하시고.. 큐."
[..흘러도 치유되지 않아요.]
"컷. 좋습니다. 많이 좋아졌는데 한가지 더. 지금 과거의 아픈 일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 하는 내용이잖아요? 그럼 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이 나야 되는데 지금은 조금 담담하게 들립니다. 가슴 아픈 떨림이 느껴지면 좋겠어요. 그거만 더하면 아주 좋아질 거 같습니다."
수빈의 칭찬에 힘이 나는지 밝은 목소리로 하이유가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몇 번의 시도 끝에 과거 부분의 하이유 파트 녹음이 끝났다.
"좋습니다. 그럼 케빈 준비하고.. 큐."
[Don't distress..]
"컷. 케빈.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줘라. 부탁해."
[OK.]
"다시. 큐."
[Don't distress yourself. Yesterday..]
"컷. 케빈아. 지금 정도의 목소리면 딱 좋아. 톤도 볼륨도 딱 좋다. 그런데 지금 너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어."
[자신감?]
"그래. 자신감. confidence. 그게 없다. 지금 넌 사람이 아냐. 넌 달이라고. 여기서 넌 일종의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거야. 너의 말 한마디로 고통받는 사람이 치유되고 좌절했던 사람이 다시 일어서야만 되는 거라고."
[후우.]
"넌 주 예수 크리스도와 같은 존재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하다못해 사이비 종교 교주라도 돼야지. 그래야 듣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지 않겠냐? 너 스스로가 자신감을 가지고 말해야 듣는 사람도 확신을 가지고 믿지.."
[...말은 쉽지.]
"그래 그래. 어려운 거 안다. 어려운 거 시켜서 미안해. 자. 다시. 큐."
수빈의 큐 소리에 케빈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좀 전보다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Don't distress yourself. Yesterday is gone.]
"컷. 케빈. 그건 그냥 톤이 굵어진 거지. 아직도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어. 좀 더 굳건하게. 좀 더 단정적으로. 내 말이 법이요 진리라고 확신하듯이. 다시 가볼게. 큐."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본 뒤 수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은 녀석에게 신과 같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하라는 게 쉬울 리가 없겠지. 후우.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는걸..'
생각을 정리한 수빈은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잠깐 5분만 쉬었다 갈게요. 하이유씨는 목이 마르지 않도록 물 좀 많이 드시고 살살 다음 파트 연습 좀 하고 계세요. 그리고 케빈. 케빈은 부스에서 나와라.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잠시 후 케빈과 마주 앉은 수빈이 입을 열었다.
"케빈. 너랑 나랑 친구지?"
"그렇지. 당연한 말 아닌가?"
"그렇지. 당연하지. 얼마 전에 말이야. 나랑 경빈이랑 로빈이랑 같이 있을 때 로빈이 나에게 아주 재밌는 말을 해줬거든."
"어떤 말을?"
"아버지는 내 성격을 잘 몰라도 로빈은 나의 더러운 성격을 잘 안다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지. 어떻게 그걸 아냐고. 그러니까 로빈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친구이기 때문에 친구가 어떤 인간인지 금방 파악하는 건 당연한 거다] 라고 말이지."
"친구 사이에는 보통 다 그렇지. 로빈만 알겠냐. 나도 너의 그 까탈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지. 친구니까.."
"그래. 맞아. 너도 날 잘 알겠지. 친구 사이니까.. 반대로 말이야. 내가 케빈의 친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너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게 있다는 거지. 굳이 따로 조사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친구이기 때문에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 말이야."
"...도대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친구인 너를 보고 있으면 한가지 떠오르는 게 있거든."
잠깐의 텀을 둔 뒤 수빈은 케빈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Domestic Violence(가정 폭력)."
그 순간 케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그 자신도 모르게 낮고 음울한 목소리로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듯 거칠게 내뱉었다.
"Sh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