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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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기적처럼 환생까지 했는데 이렇게 끝내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가엾잖아. 절대로 또다시 그럴수 는 없지.'
수빈은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으며 호흡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반 시간 가량을 강철같은 의지로 생사의 간극에서 버티고 있을 때였다.
온몸을 부풀어 오르게 만들던 진기가 마침내 갈 곳을 찾았는지 척추 끝부분에 위치한 꼬리뼈 쪽으로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후우. 일단 고비는 넘겼군.'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꼬리뼈 쪽으로 모여들던 진기가 조금씩 압축이 되었다. 다시 컵라면 하나 끓일 정도의 시간이 흘러 충분한 압축이 끝났는지 농밀하게 뭉쳐진 진기가 일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작이다.'
수빈이 마음속으로 시작이라고 생각할 때 꼬리뼈에서 꿈틀거리던 압축된 진기가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올라가 경추를 지나 숨골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숨골을 거쳐 부지불식간 머리 꼭대기까지 도달한 진기가 뇌 속 한가운데로 스며들더니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수빈을 덮쳤다.
'이걸 견뎌야 된다. 여기서 입을 벌리면 만사휴의야'
뇌 속 깊숙한 곳에서 발생한 지극한 쾌감에 입을 열지 않도록 수빈은 이를 으스러지도록 꽉 깨문 채 으윽 하는 신음성만을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 뇌 속에서 흩어졌던 진기가 수빈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마 쪽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집결되기 시작하였다.
집결을 마친 진기는 도도한 강물인 양 거침없이 턱을 지나 목과 가슴을 통과하여 아랫배에 도착하였다. 원래부터 자신의 집인 듯 아랫배 쪽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단단히 뭉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대추알만 한 크기의 단(丹)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소주천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빈은 잠깐의 여운을 즐긴 후 눈을 떴다. 온몸에 끈적끈적한 땀이 가득하다.
땀으로 범벅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수빈은 이전 생에서 세가의 교관이 소주천에 대하여 강의를 할 때가 언뜻 떠올랐다.
[비기자부전(非器者不傳)이라.. 그릇이 안되고 인재가 아니면 전수하지 않는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주천을 완성하는 데는 지극한 위험이 따른다. 세상에 널리 퍼진 운기토납법 좀 익혔다고 소주천이 다 가능하면 중원천지에 내공고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행히 여러분들은 세가의 오랜 실험과 연구 끝에 정립된 정신, 세맥, 활락의 단계별 운공법을 제대로 배웠고, 미리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주천이 위험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명심해라. 비범한 힘에는 항상 위험이 동반하는 법이다..]
수빈은 샤워를 하기 위해 정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고 소주천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내가고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범인(凡人)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느낄 수 없는 걸 느낄 수가 있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단전에 머무는 단이 느린 속도로 끊임없이 회전을 하며 기경팔맥을 자극함에 따라 몸속의 노폐물이나 불순물 등을 계속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자정(自淨) 기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때부터 신체가 더욱 건강해지고 노화가 느려져서 수명이 연장되는 효과를 보게 되는데 이러한 효과는 대주천, 임독양맥 타동, 환골탈태, 노화반동 순으로 더욱더 효과가 증진되게 되며...]
잠시 후 수빈은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서 매니저의 전화를 기다렸다.
"네. 형. 도착하셨어요? 준비 다 됐으니 바로 내려갈게요."
수빈은 차를 타고 수원에 있는 KBC 수원센터로 출발하였다. 오늘 아침에 재촬영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는 길이다.
수빈은 백성철 매니저에게 물었다.
"드라마 방영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웬 재촬영이죠?"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쪽에서 갑자기 오늘 재촬영 하러 올수 있냐고 연락이 와서.."
"흠. 조연이라 당분간은 등장하는 장면이 없어서 다음 주말쯤 촬영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저번에 찍은 1,2 회 촬영분 중에 다시 찍어야 될 장면이 있나 보지. 암튼 가보면 알겠지. 근데.. 너 아침인데도 얼굴이 되게 뽀송뽀송해 보인다?"
"그래요? 잠을 푹 잘 자서 그런가 봐요."
'소주천을 완성한 게 벌써 효과를 보는가 보군.'
이윽고 KBC 수원센터에 도착하여 촬영 현장으로 찾아간 수빈은 강민철 피디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오, 수빈씨. 바쁠 텐데 오늘 갑자기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피디님. BBG가 지금 휴식기라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근데 오늘 재촬영이라고 하던데.. 저번에 촬영한 게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늘 밤 [연예계 중계]에 나갈 편집 완성본을 담당 피디한테 부탁해서 제가 미리 한번 봤거든요. 거기 피디가 2년 후배라서.. 암튼 그걸 보고 난 뒤에 정작가와 이야기를 해서 1, 2 회중에 수빈씨와 관련된 대본을 살짝 바꿨어요. 바뀐 대본에 따라 추가 촬영만 하고 가면 됩니다."
피디가 수빈에게 수정된 대본을 건네주었다. 수빈이 수정된 대본을 읽고 있는 동안 강피디가 초조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수빈의 눈치를 살폈다.
대본을 다 읽은 수빈이 약간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정된 대본 내용이.."
"역시.. 조금 그렇죠?"
"하아.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건 좀 많이 구차하고 좀스럽네요. 제가 맡은 역할이 명색이 조폭 두목인데.."
"그렇긴 하죠. 하지만 원래 드라마라는 게 의외로 그런 면이 또 시청자에게 먹히잖아요. 약간 오글거리는 내용이긴 한데..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그 대신 다음부터는 멋지게 나올 수 있도록 나랑 정작가가 신경을 쓸 테니 이번만 좀 부탁합시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 촬영 때까지 면도를 하지 말고 수염을 좀 길렀으면 합니다."
"수염요?"
"네. 다음 촬영 때 면도 신을 넣을 생각이라서요. 드라마 내내 수염으로 계속 가리고 있기에는 수빈씨 잘생긴 얼굴이 너무 아깝잖아요. 멋지게 찍어 드릴 테니 수염을 좀 길러주세요. 혹시 또 알아요? 그 덕에 수빈씨에게 면도기 광고라도 들어올지.."
"네. 알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드라마 재촬영을 무사히 마친 수빈은 차를 타고 YK 사옥으로 가서 제1 녹음실로 올라갔다. 녹음 장비들을 체크하며 수빈은 생각했다.
'다행히 재촬영이 금방 끝나서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군.'
그렇게 콘솔 박스들을 조정하고 있을 때 하이유가 녹음실 문을 열고 등장하였다. 검은색 플레어스커트에 순백색 블라우스를 입고 광택이 나는 검은색 슬링백 미들힐을 신은 하이유는 약간 긴장된 얼굴로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휘우. 오늘은 성숙한 커리어 우먼 같은 느낌인데.. 행사라도 다녀온 건가?'
"오셨어요. 하이유 선배님."
"안녕하세요. 수빈씨."
"어디 다녀오신 모양이에요?"
"아뇨. 집에서 나오는 길인데요.. 많이 이상한가요?"
"아. 그럴 리가요. 선배님.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셔서 물어본 겁니다."
수빈의 말에 하이유가 긴장된 얼굴을 풀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수빈씨. 아니 프로듀서님. 저기.. 오늘이 첫 녹음 날이니 선배님 소리는 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죠! 오늘은 선배와 후배가 아니라 가수와 피디 사이이잖아요. 자꾸 선배라고 부르면 제가 집중하기 힘들 거 같아서 그래요."
"그럼.. 하이유씨 아니면 하이유님? 어떤 게 좋을까요?"
"하이유씨라고 불러주면 편할 거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하이유씨. 그럼 어디 최종본을 한번 볼까요?"
잠시 후 하이유가 작사해 온 걸 꼼꼼히 다 읽은 수빈은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하이유를 보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좋네요. 수정된 가사가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전체적으로 느낌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요?"
"몇 군데는 제가 손을 봐야 될 거 같습니다.. 일단 녹음을 한번 해보고 다시 의논을 하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피디님. 잘 부탁드려요."
하이유가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수빈은 자신이 하는 말을 부스 안에 있는 하이유가 들을 수 있게 마이크 스위치를 누른 후 말했다.
"하이유씨. 일단 마이크 캘리브레이션을 하게 도~레~미~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옥타브를 천천히 3번만 불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시고~ 큐."
[도~레~미~파~솔~]
그때 소주천을 완성하여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수빈의 귀에 평상시의 하이유보다 아주 미세하게 새된 카랑카랑한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수빈은 캘리브레이션 도중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하이유씨.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아주 살짝 거칩니다. 혹시 지금 목 상태가 안 좋은가요?"
[...오기 전 차 안에서 노래 연습을 평상시보다 많이 하긴 했어요. 그래서 혹시 좀 쉬었을까요? 피디님이 귀가 많이 예민하신가 보다. 이 정도로 살짝 쉰 건 저 스스로도 잘 캐치 못하는데..]
"하하. 하이유씨. 제가 그 정도도 못하면서 이번 곡을 직접 프로듀싱하겠다고 나섰겠습니까?"
[그러게요. 피디님께 믿음이 마구마구 가네요.]
'뭐 어제만 해도 내가 못 알아챘겠지만.. 소주천을 완성한 내가고수의 청력이 얼마나 예민한데 그 정도를 못 알아챌까. 타이밍이 좋았어..'
"일단 그럼 지금은 목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도록 노래를 부르지 마시고 내레이션 부분부터 녹음할게요. 이따 목이 다시 좋아지면 노래 부분을 녹음하겠습니다. OK?"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하이유의 내레이션을 들은 수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세요. 아무래도 내레이션 부분은 의논을 좀 해야 될 거 같아요."
수빈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온 하이유와 대화를 나눴다.
"지금 하이유씨가 써온 내레이션 부분은 크게 보면 세 파트로 나눠집니다. 과거의 힘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으로 현재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다는 이야기.."
"네. 맞아요. 그런 콘셉트로 적었어요."
"제가 볼 때에는 지금 고쳐야 될게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내용이야 차차 고치더라도 첫째로 이 내레이션에는 하이유씨 팬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팬들에 대한 배려요?"
"네. 많은 젊은 여성이나 남성들이 하이유씨를 사랑하지만 하이유씨에게는 수많은 삼촌팬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 대한 배려도 하셔야죠.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줘야 노래가 더욱 뜰 걸로 생각됩니다. 이왕 부르는 거 노래가 그냥 묻히는 것보다는 대중적으로 히트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거야 당연하죠."
"지금 과거 부분의 내레이션을 보죠. [힘겹게 버텨온 지난 하루하루가 너무 괴롭고 버거웠어요. 청동(靑銅)에 끌로 새긴 것처럼 가슴속 아로새긴 상처가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아요..] 하이유씨가 이렇게 과거의 아픈 마음을 토로하면 거기에 다시 달이 대답을 합니다. 맞죠?"
"네. 맞아요."
"제 생각엔 달의 목소리는 남자가 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하이유씨가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면 하이유씨를 아끼는 삼촌팬들에게도 거기에 응답하고 달래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죠. 지금 노래를 여성이 하는데 달의 내레이션마저도 여성의 목소리로 하게 되면 너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칩니다."
"음.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 지금 하이유씨의 말에 답하는 달의 대사가 지나치게 깁니다. simple is best라고.. 달의 대답은 하이유씨에게 위로 겸 일종의 솔루숀을 제공하는 걸로 볼 수 있는데 그런 건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죠. 길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고 지나친 간섭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 안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혹시.. 마더 테레사를 좋아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