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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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배우들의 매니저, 코디,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여러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맞이해 주었다. 특히 수빈과 같이 온 백성철 매니저가 가장 열렬히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쑥스러움을 느낀 수빈이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고 있을 때 성강호가 대기실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수빈아! 아이고. 똑똑한 우리 수빈이. 우찌 그리 똑 부러지냐."
자신에게 다가와 목을 강하게 휘어 감는 성강호의 팔을 두들기며 수빈이 외쳤다.
"아아. 선배님. 항복. 항복."
그때 대기실로 들어오다 그 장면을 본 김해수가 하이톤으로 외쳤다.
"성강호 선배! 왜 애를 잡고 그래요!"
수빈의 목을 감던 팔을 슬며시 풀며 성강호가 말했다.
"니는 내가 뭔 애를 잡는다고 그러냐. 남자들끼리 친밀함의 표시 아이가. 표시."
수빈이 목을 주무르며 서있자 김해수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수빈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연기도 잘하더니 말하는 것도 어쩜 그리 조리 있게 잘하는지.. 남자가 그 정도 포스는 있어야지. 오늘 멋있었어."
등을 몇 번 두드린 후 포옹을 푼 김해수가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 뻣뻣하게 서있는 수빈을 보며 말했다.
"수빈씨. 아니 수빈아. 지금부터 내가 편하게 말 놓을 테니 너도 앞으론 나보고 편하게 누나라 불러."
"...네에? 누나요?"
"왜? 싫으니? 내가 아무나 보고 누나라 부르라고 하는 사람으로 보이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럼 왜?"
수빈이 바로 말을 못하고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가 71년생이시라 올해 나이가 47이.."
수빈의 말을 자르며 김해수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야!! 그냥 누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누나."
김해수의 샤우팅에 놀란 수빈이 김해수에게 누나라고 부르자 옆에 있던 성강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누나는 개뿔.. 수빈이 엄마보다 나이가 많으.."
"선배! 죽고 싶어요?"
"아니 나는 단지 팩트를 말하는 거지. 팩트를.."
수빈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말을 던졌다.
"성강호 선배님.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는.."
수빈의 말을 자르고 성강호가 말했다.
"야. 형이라 불러. 형이라.. 누군 누나고 누군 선배냐? 해수랑 나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난다."
그때 김해수가 복수를 하려는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은 개뿔.. 결혼해서 큰애가 22살인 양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수야! 남자끼리는 말이야. 나이차가 좀 나도 사회에선 형.동생 할 수 있는기야."
잠시 동안 두 대선배의 아웅다웅을 지켜보던 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네. 형님. 근데 이제 겨우 제작발표회가 끝났는데 다들 분위기가 너무 업 되신 거 아닌가요? 드라마는 아직 방영도 안됐는데.. 지금 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요?"
성강호가 수빈의 말에 훗 하고 짧게 웃은 후 대답했다.
"수빈아. 너는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찍을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라고 보냐?"
"음. 제가 드라마가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작가의 탄탄한 각본, 피디의 훌륭한 연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등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 드라마 주제곡이나 음향, 의상, 소품 같은 것들도 중요하고요."
"이놈아. 그런 건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야. 기본으로.. 그 정도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찍는 드라마가 어디 있냐. 그것도 공중파 드라마를.."
"그럼 뭔가요?"
"드라마에서 젤 중요한 건 시청률이다. 아무리 각본이 좋니 연기가 뛰어나니 해도 시청률 안 나오면 그 드라마는 망한 거야. 그리고 그 중요한 시청률이 잘 나오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지. 그게 뭔 줄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화제성이다. 화제성. 일단 대중들의 관심을 초장에 확 잡아끌어야만 된다고.. 그래야 드라마가 안정적으로 출발을 하고 차츰차츰 시청률을 높여 나갈 수 있는 거야."
"아.."
"물론 나랑 해수가 동반 출연하니 어느 정도 화제성은 있겠지. 둘 다 이 바닥에서 연기는 좀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거기에 지금 생각도 못한 니가 복병으로 등장해서 불을 확 지핀 거야. 좀 전에 우리가 찍은 제작발표회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아마 난리가 날 걸? 그리고 뉴스도 지금쯤이면 무지하게 쏟아지고 있을 거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김해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정도 화제성이면 드라마 초반 시청률은 일단 먹고 들어갈 수 있어. 그럼 그다음부터는 수빈 동생이 말한 연기력이나 연출 같은 걸로 쭉쭉 치고 나가는 거지. 연출이나 각본은 우리가 이미 꼼꼼하게 검토를 다 끝냈으니 별문제 없을 거야. 연기력은 성강호 선배나 나나 어느 정도 자신 있으니까.. 드라마 초반에 어떡하든 대중들 관심을 끌어서 시청률 좀 올려보려고 광고에 쏟아붓는 돈이 얼만지 아니? 그렇게 돈을 들이고도 별 관심 못 받고 망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데.."
그때 대기실로 강민철 제작 피디와 정수희 극작가가 찾아왔다. 정작가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수빈에게 다가가더니 불문곡직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가 수빈씨 스도쿠 문제 푸는 걸 [문제적 인간]이나 팬들이 올린 SNS로 몇 번 봤어요. 그래서 수빈씨가 숫자에 강하고 암산을 잘한다는 걸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천재일 줄은 몰랐네요. 말은 또 어찌 그리 재치 있고 재밌게 잘하던지.."
그때 김해수가 끼어들었다.
"어머. 정작가님. 제 동생 수빈이 손은 놓고 말씀하시죠. 여성작가분이 너무 스스럼없이 남자 배우 손을 잡으시네요. 지킬건 지켜야죠."
김해수의 말에 정수희 작가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받아쳤다.
"야 이년아. 너나 나나 수빈씨 엄마뻘인데 동생은 무슨.."
"이 년이.. 작가라고 예의를 지켜줬더니 말하는 거 좀 보게?"
둘의 갑작스러운 막 나가는 대화에 벙찐 얼굴로 수빈이 얼어붙어 있자 성강호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둘이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야. 대학도 과만 다르고 같은 학교 나왔고.. 친한 친구 사이라 그런 거니 너무 놀라지 마라. 정작가 작품이라 당분간 쉬기로 했던 해수가 출연 결심을 한 거야. 그래서 덩달아 나도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거고.."
"아아. 그러셨군요. 솔직히..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공황이 올뻔했습니다."
그때 강민철 피디가 기분이 좋은지 밝은 얼굴로 수빈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빈씨 덕분에 지금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우리 드라마 관련 뉴스가 아주 핫하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천재. 드라마에 출연하다.] 이런 제목의 뉴스들이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어요. 조금 있다 동영상까지 풀리면 아마 더 핫해질 겁니다. 이거 수빈씨 덕에 드라마 PR을 아주 제대로 하는데요."
"아닙니다. 피디님. 제가 뭐한 게 있다고.."
"아니죠. 우리 드라마가 성강호씨나 김해수씨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드라마긴 하지만 지금 이 정도로 뜨거운 건 누가 뭐래도 수빈씨 덕분입니다. 너무 겸손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죄송한데 수빈씨에게 부탁 하나만 합시다."
"네. 말씀하시죠."
잠시 후 YK 사옥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수빈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성철이 형. 기분이 좋은가 봐요. 계속 싱글벙글이시네."
"그럼. 내가 맡은 연예인이 잘나가고 있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지. 박봉인 매니저를 돈 보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다들 이런 맛에 하는 거지. 형이 지금 기분이 째진다."
"형이 좋다니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근데 그런 거 암산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난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 같은데.."
매니저의 말에 수빈은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죽었다 깨어난 게 맞긴 하지.'
"구구단만 알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단지 관건은 자신이 계산한 숫자를 얼마나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느냐는 거죠. 그래야 그다음 계산에서 나오는 숫자에 더하거나 뺄 수가 있으니까요. 제가 암기력은 또 쓸만하잖아요.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기도 하고.."
"말이야 쉽지."
"그런 거 못해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잖아요. 형. 아까 피디님이 하는 말 형도 들었죠?"
"그래. 너보고 KBC 예능 프로에 한번 좀 나가달라고 부탁하는 거 나도 들었다. 피디가 널 잘 본 모양이야. 물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네가 핫할 때 다른 프로에 나가서 드라마 선전하는 걸 원하는 모양이던데.."
"피디가 저렇게 부탁하는데 아무래도 들어줘야겠네요. 어떤 프로가 좋을까요? 주연배우들이 출연하는 프로는 빼야 될 거고.. 그리고 방영 시간도 드라마 일정이랑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 할 건데."
"그러게. [1:200]이나 [우리말 맞추기] 같은 퀴즈 프로는 얼마 전에 네가 다 거절하는 바람에 지금 다시 출연 약속 잡기가 좀 그렇겠지?"
"그렇죠. 너무 속 보이는 거 같아서 좀 그러네요. 다른 프로로 뭐가 좋을까요?"
"[해피 투말로우] 같은 유명 프로는 지금 출연 날짜 정해서 찍더라도 실제로 방송 나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려. 그렇다고 [개그 콘체르토]에 나가서 잠깐 얼굴 비치는 건 별로 효과가 없을 거 같고.. 형 생각에 네가 출연하기도 쉽고 편집도 금방 끝나서 바로 방송하는 프로가 하나 떠오르기는 한데.."
"어떤 프로인데요?"
"근데 이 프로가 시청률이 별로 안 나와. 젊은애들이 좋아하는 프로도 아니고.."
"뭔데요? 일단 어떤 프로인지 알려나 주세요."
"[명품진품]이라고.. 형이 아는 형님이 피디로 있는 프론데.. 일요일 아침에 하는 프로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주로 보는 프로라 뉴스나 SNS 같은데 언급도 잘 안되는 프로야."
"흠.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집에 있는 오래된 도자기나 그림 같은 거 일반인들이 들고 나와서 감정하는 프로 맞죠? 그런 프로면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을 거고 몸만 가면 되겠네요."
"그래도 되긴 하는데.. 준비를 하면 더 좋고."
"준비요? 집에 있는 골동품이라도 하나 들고나가야 되나요? 집에 없을 건데.."
"그런 거 말고. 연예인들 나오면 한 번씩 자기가 만든 도자기나 그림 같은 거 들고 나와서 자랑하는 시간이 있거든. 그런 거 하나 준비해 가면 좋기는 한데.. 뭐 보통은 그냥 나가니까 없어도 상관없고. 일단 내가 피디형한테 연락을 한번 해보마."
차가 신호등에 걸려서 정차하자 백성철 매니저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의 핸드폰이 울렸다.
"[명품진품] 피디 형한테 전화 왔나 보다."
이어폰을 꼽고 매니저가 통화를 했다.
"형. 나야. 성철이. 어.. 아. 죄송합니다.."
[...]
"네? 지금요? 아. 그런가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럼요. 문제없습니다. 네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매니저가 방향지시등을 키고 차를 유턴 차선으로 급변경시키며 말했다.
"수빈아. 지금 온 전화가 [명품진품] 피디 형한테서 온 게 아냐. 드라마 스태프 쪽에서 지금 당장 다시 호텔로 돌아올 수 있냐고 물어보는 전화였어."
"네? 아니 왜요? 제작발표회 때 뭐가 잘못된 게 있다고 하던가요?"
"왜냐하면.. 잠시만. 차 좀 돌리고 이야기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