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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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급박한 수빈의 말에 차분하게 대답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렸다.
[안녕하세요. 하이유에요.]
"아아. 하이유 선배님이셨군요.. 어쩐 일로 이렇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수빈씨가 편곡해서 들려주신 곡 있잖아요. 조금 전에 그 곡 작사가 막 끝났어요. 그래서 수빈씨 시간이 되면 같이 한번 의논을 할수 있을까 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네? 아니 작사가 벌써 끝났어요? 그때 하신 말로는 열흘 정도는 걸릴 거라고 하시더니.."
[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어요. 그래서 지금 볼까 하는데 시간이 어떠세요?]
"제가 드라마 촬영 끝마치고 지금 회사에 와있어서 시간이 됩니다. 그럼 어디서 볼까요?"
[그려면.. 일전에 봤던 제1 녹음실에서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거기가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수빈은 하이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고 중얼거렸다.
"휴.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고 생각도 못한 전화가 먼저 오네. 일단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야겠지."
잠시 후 수빈은 제1 녹음실에서 하이유가 오기를 기다리며 녹음 장비들을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었다.
그때 녹음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에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하얀색 스트랩 샌들을 신은 하이유가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호오. 오늘은 되게 청순해 보이네. 지금 당장 청량음료 CF를 찍으러 가도 되겠는걸.'
"안녕하세요. 하이유 선배님."
"안녕하세요. 수빈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하이유 선배님께서 작사하신 걸 한번 볼까요?"
"네. 여기요."
하이유가 들고 온 A4 용지 2장을 수빈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수빈은 각각의 종이에 출력된 내용을 살펴보았다.
"어라? 제목이 두 개고 가사도 두 종류네요?"
"네. 가사를 쓰다 보니깐 그렇게 됐어요."
"흠.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열흘 전 수빈씨가 만든 곡을 처음 들었을 때나 일주일 전 새롭게 편곡한 곡을 들었을 때나 제 느낌은 거의 똑같았어요. 곡의 전반적인 느낌이 고고(孤高) 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즈넉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저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러셨군요."
"그리고 그런 느낌 속에서 수빈씨가 말한 [밤하늘에 가득한 달빛이 내 가슴속에서 빛난다]라는 걸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까 고민을 해봤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게.."
하이유는 오른손을 볼에 댄 채 잠시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깊은 밤 홀로 외로이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했어요. 텅 빈 겨울 들녘처럼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만 덩그러니 혼자 걸어가고 있는 거죠. 그때 제가 밤하늘을 올려다본 거예요. 그랬더니.. 밤하늘에 높이 뜬 달이 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걸 발견한 거죠. 그래서 제가 이리저리 막 돌아다니면 달도 절 따라다니면서 계속 제 주위만 밝게 비춰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호오. 훌륭한 해석인데요. 나쁘지 않습니다."
수빈의 반응에 기분이 업이 됐는지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하이유가 말했다.
"깊은 밤에 저랑 달, 딱 둘만 있는 거죠. 그리고 저랑 달이랑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거예요. 둘이서 서로의 힘든 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면서요. 그래서 일단 제목과 가사가 두개로 나왔어요. 달이 나에게 말하는 [달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제가 달에게 말하는 [달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이렇게요. 둘 중에 어떤 게 좋은지 잘 몰라서 일단 두 개를 다 들고 와 봤어요.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수빈씨 의견이 중요하잖아요."
"그럼 잠시만요. 선배님이 작사하신걸 제가 좀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수빈은 고개를 숙여 하이유가 적어온 두 종류의 가사를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꼼꼼히 모든 구절들을 다 읽어본 수빈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수빈의 눈앞 가까이 다가온 하이유가 커다란 눈에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을 한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크흠. 제가 하이유 선배한테 몇 가지 좀 여쭤보겠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제가 쓴 가사가 천재 작곡가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정말 궁금해요."
"천재는 좀 빼주시죠.. 일단 여쭤볼게 있는데.. 혹시 하이유 선배님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나요?"
"네? 아뇨. 멀쩡히 살아계신데.."
"그러시군요. 그럼 다음 질문으.."
그때 하이유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하고선 수빈의 말을 자르고 물어왔다.
"포탈 검색하면 금방 아실 건데요? 저랑 어머니랑 같이 나온 사진이나 뉴스들도 많이 돌아다니는데.. 그걸 지금 왜 물어보시는 건지?"
"흠. 제가 프로듀싱을 위해 지금까지 하이유 선배가 발표하고 부른 노래는 찾아서 다 들어봤지만 하이유 선배 관련해서 검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몰라서 여쭤본 겁니다."
수빈의 말에 하이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왜요? 왜 저에 대해서 검색을 한 번도 안 하셨어요? 저에 대해서 관심이 전혀 없으신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생각할 때..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제일 피해야 되는건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의 하이유 선배를 알고 싶어서 따로 검색을 해서 알아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수빈의 대답에 하이유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역시 천재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하이유의 말에 수빈은 속으로 의아했다.
'왜 자꾸 천재 천재 그러는 거지. 그런 립 서비스는 한 번이면 충분할 건데..'
수빈은 하이유의 말에 특별히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맘을 터놓고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별로 없으신가요?"
수빈의 질문에 하이유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을 했다.
"...친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가수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단 또래 친구가 적긴 해요."
"그렇군요."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가사를 읽다 보면 느낌이 옵니다. 지금 하이유 선배에게 있어서 달은 가장 친한 친구 아니면 마치 엄마인 것처럼 보입니다. 거짓이나 숨기는 거 없이 속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거죠.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혹시 하이유 선배님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거나 친한 친구가 별로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고.."
수빈의 대답에 하이유가 양손을 모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역시 천재!"
"아니 선배님. 왜 자꾸 천재라고 강조를 하시는지?"
"아. 제가 실수를.. 전 어릴 때부터 음악만 하느라 다른 공부를 전혀 못했어요. 그래서 연예인 자격으로 얼마든지 대학을 갈수 있었지만 안 갔죠. 어차피 제 자신이 공부 쪽이랑은 거리가 먼 걸 잘 알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전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마구마구 기분이 좋아져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
"아. 그래서.. 하지만 저 역시 대학은 근처도 못 가봤습니다."
"하지만 수빈씨는 누가 봐도 천재잖아요. 제 주변 사람들 모두 수빈씨는 천재라고 말하는걸요."
"하아. 또 그러신다. 뭐 일단 그건 넘어가죠. 그리고 제가 선배님께 요청할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적어오신 가사 두 종류 다 좋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굳이 이렇게 나눌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하나를 꼭 선택할 필요도 없을 거 같고요."
"그래요?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요?"
"힘들겠지만 지금 적어온 가사를 각각 반으로 줄여주세요. 그렇게 하면 [달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1절로 하고 [달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2절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1절과 2절 사이에 내레이션을 할 수 있도록 다시 편곡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1절과 2절 가사에서 못다 한 말이나 이야기들을 내레이션 쪽에 집어넣으시면 작사하기가 훨씬 편하실 겁니다."
"어머. 역시 천.. 아니 아주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노래 제목을 생각해봤는데요."
"어떤 제목인가요?"
"제목을 [달과 나의 이야기] 아니면 [달과 나의 스토리] 이런 식으로 정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하이유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전 [달과 나의 이야기]가 맘에 들어요! 동화책 제목 같아서 너무 좋아요."
"네. 선배님이 그게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시죠. 그럼 일단 제목은 [달과 나의 이야기]로 정하겠습니다. 줄여서 부르면 달나이? 그 정도가 되겠네요. 티베트의 고승 이름같이 들리긴 하지만.. 뭐 상관없겠죠."
하이유가 다시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전 달나이도 듣기 좋아요!"
"네~네~. 그럼 시간을 얼마 정도 드릴까요? 2~3일이면 가능하겠습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아주 좋습니다. 그럼 수정 작업을 다 끝내고 연락 주시면 그때 서로 편한 시간을 잡아서 녹음을 시작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하이유는 오늘 수빈과 나눈 대화가 만족스러운지 얼굴 가득 상큼한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한 후 녹음실을 나갔다.
하이유가 떠나자 수빈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털털하고 성격이 좋은데. 흠. 오늘 말하는 거 들어보니 머리 좋은 남자가 하이유 선배의 이상형이려나. 그럼 하이유 선배의 남자친구가 되려면 S대 정도는 기본적으로 나와줘야 가능하겠군.."
잠시 후 녹음실에 혼자 남은 수빈은 [달과 나의 이야기] 내레이션 부분을 위해 편곡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작업이 마무리되자 수빈은 작업한 곡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의자에 기댄 채 휴식을 취하면서 수빈은 5일 전 발생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5일 전 아침 수빈은 아침 일찍 운기토납 도중 드디어 세맥 단계를 끝마쳤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소주천이 눈앞으로 다가온 수빈은 흡족한 마음에 즐거운 기분으로 YK 사옥으로 나갔다.
수빈은 점심시간에 회사에 나와있는 BBG 멤버들을 모두 데리고 근처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의 일로 기분이 업이 된 수빈이 오늘 점심을 사기로 했기 때문이다.
단골 식당으로 걸어가던 도중 수빈은 멀리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의문의 시선을 감지했다.
'이것 봐라? 이 정도로 멀리 떨어져서 감시하는 거면 그동안 내가 전혀 발견을 못했을 거 같은데.. 오늘 아침 세맥이 끝난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나마 간신히 발견이 가능한 거지.'
걸어가면서 마빈의 곁으로 다가간 수빈은 마빈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선 고개를 돌려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역시 타깃은 마빈이 맞군. 근데 이상한데.. 이건 예전의 그 살기 어린 시선이 아닌데. 적대적이라기보다는 호의적인 느낌이 더 강한걸..'
수빈의 기억이 거기까지 이어질 때 핸드폰이 진동을 하였다. 도착한 문자를 읽어본 수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즉시 보자고 하니깐 빨리 가봐야겠군.'